#86화
루솔릿 공작의 생일 파티를 앞두고 라멜은 하녀 다섯 명에게 한껏 치장을 받았다. 붉은색 드레스와 진주 귀걸이도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꽃을 달아야겠어.”
라멜이 잠시 생각하다가 손가락으로 실라를 지목했다.
“너. 레이크 로즈를 가져와.”
레이크 로즈는 외곽의 강가 근처에서만 피는 장미였다.
하지만 일반 장미와 외형상 비슷하고 향기가 더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파티 시간이 다가오는 와중 거기까지 다녀오란 건 일부러 괴롭히는 명령에 불과했다.
다른 하녀들도 라멜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그저 실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깐. 가기 전에 손 내밀어 봐.”
라멜의 뾰족하게 다듬은 손톱이 실라의 손등을 할퀴었다.
실라를 괴롭혀 스트레스를 풀은 라멜은 총총걸음으로 리타의 방으로 향했다.
“리타. 준비 다 됐어?”
“네.”
리타는 말쑥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머, 장가가도 되겠다. 아냐, 다른 여자에게 주기는 아직 일러!”
라멜은 리타를 보고 흐뭇해했다. 꾸미고 나니 정말 자기가 반할 정도로 근사한 동생이었다.
“리타 정도면 최소한 공주 정도는 만나야지. 안 그래?”
“그럼요~”
라멜을 따르는 하녀들이 대충 비위를 맞췄다. 라멜은 혹시라도 하녀들이 순진하고 공부밖에 모르는 동생인 리타를 꾀어내려고 할까 봐 덜컥 걱정이 들었다.
“너희. 분수 넘는 짓은 꿈도 꾸지 마!”
“그, 그럼요!”
그녀의 장단에 맞추는 건 너무나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데 리타. 아빠 선물은 준비했어? 요즘 마을도 몇 번이나 다녀왔잖아.”
“아. 그게… 상점에 두고 왔습니다.”
보통은 공작성으로 물건을 보내 줄 텐데. 라멜은 의아함이 들었지만 굳이 리타의 말에 토를 달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그럼, 저건 전부 너랑 같이 준비했다고 할게.”
라멜은 루솔릿 공작을 위해 산더미처럼 준비한 선물을 가리켰다. 누나 역할을 톡톡히 한 기분이 들어서 뿌듯했다.
“고마워요, 누님.”
게다가 리타의 말 한마디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리타는 라멜이 얼마나 많은 선물을 준비했든지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적당히 있다가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동안 술식을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실험체는 충분히 모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술식의 마지막 문장까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 환희와 설렘으로 아버지인 루솔릿 공작의 생일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
실라는 라멜의 명령에 따라 레이크 로즈를 꺾으러 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지금 말을 빌려 달라고?”
“응, 부탁할게.”
세라의 동생인 마구간지기 소년은 실라의 처지를 잘 알았다.
세라는 늘 공작성에서 고된 하루를 보내는 실라가 안타까워 가끔 기분을 환기시켜 주고자 남동생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가끔 동생이 타는 말을 실라에게 빌려 줘 승마를 가르쳐 달라고. 그것이 라멜의 귀에 들어가 호되게 혼나기도 했지만, 덕분에 실라는 말을 몰 수 있게 되었다.
‘그 여자는 갑자기 또 무슨 일을 시킨 거야.’
소년이 속으로 라멜을 욕하며 튼튼한 말을 준비했다.
실라는 소년이 준비한 말을 타고 공작성을 나왔다. 차라리 이대로 어디든 달려가고 싶었다.
그녀는 루솔릿 공작령의 성벽을 바라보다가 침울하게 호수로 향했다.
마법으로 작동하는 수도 시설은 따로 있었지만, 일부 외곽 주민은 호수까지 와서 물을 길어 왔다. 지금은 저녁이라 그런지 인적은 없었다.
물가 근처에 레이크 로즈가 여러 송이 피어 있었다. 실라는 말을 세워 두고 꽃을 따기 위해 물가로 다가갔다.
‘악취가 나는걸.’
호수의 정화 작업을 위해 들어간 공작령 예산이 적지 않았으니 또 비리가 있던 모양이었다.
고요하던 호수 수면이 움직였지만 실라는 가위로 장미를 자르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똑. 장미를 따던 그때. 갑작스레 물이 위로 솟구쳤다.
실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3미터도 넘는 회색 도마뱀이 입을 벌리고 그녀를 잡아 삼키려 하고 있었다.
거대한 구덩이 같은 목구멍에 커다란 혀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빨은 단단한 바위도 씹어 삼킬 정도로 날카로웠다.
“꺄악!”
괴물의 입이 닫히고 실라의 치맛자락이 뜯어졌다. 뒤에서 이를 맞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실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꽃 한 송이를 꼭 쥐고 말을 세워 둔 곳까지 달렸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호수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치마 끝자락과 장미 넝쿨이 엉망으로 뜯겨져 나갔을 뿐.
‘…악어?’
실라는 괴생명체의 생김새를 기억해 보려 했다.
오래전 그림책에서 읽었던 적 있는데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였다.
‘마수구나!’
북부와 제국 외곽의 일부 지역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마수가, 어째서 한적한 호숫가에 출몰했단 말인가?
실라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고 호수에서 벗어났다. 급하게 몰은 적은 처음이었기에 한 번 낙마할 뻔했지만 다행히 근처의 치안 기사를 찾아갔다.
“기사님, 기사님!”
“뭐요?”
치안 기사는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사실 루솔릿 공작가의 하녀 복장이 아니었다면 말도 무시했을 것이다.
“저, 저기… 호수에 괴생명체가 있어요!”
“그럴 리가.”
치안 기사는 확인할 생각도 안 하고 헛소리로 넘겨짚었다.
혼기가 되어도 마땅한 직업이 없어 뇌물을 먹이고 산 기사 자리였다. 당연히 영지를 보필하겠다는 책임감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 민원이나 신고가 들어와도 늘 대충 처리했고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확인해 주세요.”
“…….”
기사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호수로 함께 갔다.
실라는 호수를 향해 돌을 던졌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요했다.
“잔잔하기만 하구만. 됐소?”
“아까 분명히 봤어요! 물릴 뻔했다니까요. 접근 주의 표지판이라도 붙여 주세요.”
“아아, 그래.”
기사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그만 물러나라는 듯이 귀찮게 손짓했다.
곧 탄신연이 시작할 시간이었기에 실라는 걱정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에 올랐다.
***
루솔릿 공작령으로 가는 내내 에카르트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름다워서요?”
“잘 아시는군요.”
에카르트는 부끄러움도 없는지 미소 지었다. 황실 무도회에 갔을 때보다 더 깊은 기류가 흘렀고 우리는 서로를 의식했다.
“엘린. 요즘도 제가 무섭습니까?”
“가끔 제게 질리실까 봐 무서울 때가 있어요.”
“이런.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걸 두려워하는군요. 제가 안아 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하고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때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무서운 건 말할수록 덜 무서워지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럴게요.”
우리 사이가 어느새 이렇게 발전했고 그와 내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게 때때로 신기했다.
***
니나는 새로 산 이불을 들고 크로덴 공작성 문으로 걸었다.
그러다 귀가 토끼처럼 쫑긋했다.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린 그녀는 이불을 펴서 단숨에 옆으로 덮어씌웠다. 그곳에는 첩자가 있었다.
“제, 젠장!”
첩자는 시야를 가린 이불을 걷기 위해 마구 손을 뻗었다. 니나는 첩자의 얼굴을 연속으로 가격했다. 부러지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 공녀님께서 좋아할 것 같아서 산 이불인데!”
니나는 화가 나서 첩자를 한 대 더 쳤다. 그리고 피가 묻고 너덜너덜해진 이불, 아니 사람을 질질 끌고 성문으로 들어왔다.
그 시각 헬라는 정원용 삽으로 성문 밖 화단의 흙을 고르고 있었다. 집사가 이런 잡무를 처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4시 방향인가.’
헬라가 삽으로 수풀을 불쑥 찌르자 비명과 함께 피가 나뭇잎에 튀었다.
“으, 으악!”
자객이 독약을 뿌리려고 했지만 헬라는 삽으로 독을 막았다. 삽이 독성에 의해 부식하는 사이 헬라가 자객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어디서 보냈지?”
“미, 미친.”
“어서 말해!”
“다, 달린 상단입니다.”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던가? 거기서 온 놈들은 195일 전에 죽였어.”
“그, 그런….”
“멍청한 것 같으니.”
성 내부는 결계가 작동했으나 성문 바깥은 잔챙이들이 있었다. 물론 블랑세를 제외한 누구도 안으로 잠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헬라는 단숨에 자객을 제압해 끌고 갔다. 이 자객은 냉동실에 잘 보관될 것이다. 다른 자객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불 안에 사람을 김밥처럼 말은 니나와 기절한 자객의 멱살을 쥔 헬라가 마주했다.
“어머, 헬라 님! 그쪽에도 있었군요.”
“네. 오랜만에 힘 좀 썼습니다.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순찰하죠.”
시엘리나의 시중을 들던 다른 하녀 역시 정원에서 뱀 한 마리를 잡아 왔다.
“헬라 님! 이거 술로 담가서 드릴까요?”
“…술 끊었습니다.”
“어머, 왜요?”
헬라는 차마 공왕께 술을 잘못 건넸다가 죽을 뻔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이와 건강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아직 젊으신데!”
이렇듯 공작성의 평화는 무시무시한 고용인들 덕분에 유지되고 있었다.
에카르트는 고용인 한 명도 허투루 고용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기 한 몸쯤 거뜬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
시엘리나가 방문하기 시작한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그중에서도 니나의 언니는 북부의 기사였기에 니나 역시 강인했다.
***
오랜만에 온 루솔릿 공작성은 희미한 장식용 불빛들로 반짝였다. 붉은색 카펫이 2층 계단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고 루솔릿 공작은 로비 밑에서 직접 손님들을 맞아 주고 있었다.
그는 크로덴 공작가의 마차가 보이자마자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어서 오십시오, 크로덴 공작님! 시엘리나를 데리고 오셨…군요!”
에카르트의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곤 난처하게 입가가 떨렸다.
“내 파트너로 모셨지.”
“하, 하하. 반갑습니다! 어서 오거라, 시엘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