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85화 (85/115)

#85화

“조무래기 마수 놈들만 나왔는데 주기는 평소와 비슷하거나 적습니다. 제가 출동할 필요도 없었죠.”

다시 생겨나는 균열은 이전보다 약화되는 건가. 가설을 세우기엔 아직 표본이 부족했다.

“흐음. 안개도 그대로고요?”

“그렇습니다.”

일단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으니 중앙의 마법진을 해독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다른 마법진을 소멸시켜도 다시 발생하니… 이 이상 섣불리 건드리지는 않는 게 좋겠지.

나는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도 마법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연구실에서 낮부터 밤까지 연구에 매달렸다. 그 마법진이 남은 이상 마수는 계속 출몰하고 에카르트는 계속 북부로 출전하겠지.

“그럼 안 되는데….”

나는 깜빡 졸다가 책상 옆에 놓아둔 컵 안으로 머리카락이 들어갈 뻔했다.

“엘린, 엘린.”

“네?”

“좀 쉬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아직 마법진이 남아 있는데….”

“당신은 지금껏 많은 일을 했습니다. 수백 년간 누구도 밝혀내지 못하고, 아무도 풀어내지 못한 마법진이니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합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에카르트가 여유를 가지라고 해도 나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는… 에카르트의 삶이 더 이상 북부에 속박되지 않았으면 해서….”

“…….”

“당신을 아프게 했던 게 뭔지 어서 알아내고 싶어서….”

많은 게 달라지고 대비할 것들도 있겠지만. 지하의 마법을 반드시 풀어내겠다.

“그래도 쉬면서 해야 합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엘린이니까요. 건강이 상할까 봐 염려됩니다.”

에카르트가 내 허리에 손을 둘렀고 문득 발이 바닥에서 들렸다. 그가 나를 안아서 방으로 데려가더니 침대에 눕혔다.

결국 그의 말대로 방에서 잠시 잠에 들었다.

혹시라도 체닐이 다시 꿈에 나올까 봐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수건을 내려 두고 직접 문을 열어 주니 에카르트가 네모난 종이 한 장을 들고 서 있었다. 그가 물기 어린 내 머리카락을 흘긋 보고는 말했다.

“…젖었군요.”

“얼른 말릴게요.”

“이런 모습도 좋지만… 감기 걸리면 안 되니 제가 말려 드리겠습니다.”

왠지 일상적인 말도 그가 말하면 좀 위험하게 들렸다. 에카르트가 마력으로 따뜻한 바람을 불러일으켜 머리카락을 말렸다.

“한데 엘린. 쓰레기를 받으면 불태워야 하겠지요?”

“뭔데요?”

“루솔릿 공작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본인 생일이라고 하는군요. 벌써 쉰 살이라니 생각보다 오래 삽니다.”

에카르트가 고급지 한 장을 보여 주었다.

- 친애하는 크로덴 공작님.

저의 쉰 번째 생일을 맞아 조촐한 연회를 개최합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같은 공작 가문끼리 교류하길 원하시며, 참석하시길 당부하셨습니다.

교류는 무슨! 초대장에는 당연하게도 내 이야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왜 오라고 할까요?”

“라멜과 이어 주려는 생각을 아직도 하나 봅니다. 이런. 이름을 말하니 불쾌하니 아무래도 입술을 정화해야 할 것 같은데요.”

“키스는 아까 제가 자기 전에도 했잖아요.”

“볼 때마다 하고 싶은데 참고 있습니다. 정말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내가 슬쩍 눈을 감자 그는 한 손으로는 내 목을 받치고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싼 채 입을 맞췄다.

말캉한 혀가 달콤했고 싱그러운 향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허리에 얹은 손이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죠?”

“죄송합니다. 손이 왜 멋대로 움직일까요? 아무래도 미쳤나 봅니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손등을 벌주듯 탁 때리고는 말했다.

“이런. 세게 쳤더니 아프군요. 아무래도 치료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할래요.”

“정말?”

나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자는 심정으로 성력을 담아 손을 잡아 주었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왔다.

“어쨌든 황후 폐하께서 오라고 하셨으니 가야겠죠?”

“네. 엘린과 함께 말입니다.”

나야 초대받지 못했지만 그가 파트너로 데려가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가서도 마법진 연구가 아른거리겠지만 에카르트의 옆을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 둘 다 공작성을 비운다면… 블랑세에게도 말해야겠어요.”

“나 불렀어?”

블랑세가 노크도 생략하고 문을 열어젖히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크로덴 공작님의 마력 냄새가 나.”

“머리를 말리느라.”

“둘이 함께 씻은 거 아니지?”

블랑세는 세계의 평화가 두 쪽이 난 것처럼 패닉에 빠졌다.

“그런 거 아냐. 아무튼 루솔릿 공작의 탄신연 초대장을 에카르트가 받았는데… 파트너로 참석해야겠어.”

“시엘. 마치 강아지 혼자 두고 집을 비우듯 늘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말티즈 같긴 하지.”

머리카락도 복슬복슬 귀엽게 생기고 부르면 후다닥 달려오는 게 말이다.

“엘린, 과한 비유입니다. 하얀색 예티나 변종 오크쯤이겠지요.”

“전혀 안 닮았는데요.”

내가 편을 들어주자 블랑세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당당해졌다. 그러더니 내 침대에 걸터앉고는 말했다.

“사실 나도 그 파티에 가기로 했어.”

“초대장 받았어?”

“그건 아니지만.”

블랑세는 루솔릿 공작성에 가게 되는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

블랑세가 일부러 수도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다시금 황후의 심복이 나타나 그녀를 이전의 살롱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만난 아렌다는 평소처럼 여유롭게 물어보았다.

“다비온과 만났니?”

“…….”

뒤를 밟힌 적은 없는데. 들켰거나 아니면 떠보는 것인가.

“괜찮아. 네가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블랑세는 황태자비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속뜻을 알아차렸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아렌다가 용건을 전했다.

“다비온은 루솔릿 공작의 탄신연에 갈 거란다. 한데 백마법사 호위 자리가 비었고… 단장은 너를 추천하더구나.”

“저를…요?”

“공녀를 보낼 수는 없잖니.”

***

그런 속사정을 들은 나는 더욱 걱정스러워졌다.

지금이야 블랑세가 황후의 신뢰를 받고 있더라도, 아니.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언제까지고 그녀를 속일 수는 없을 텐데.

“블랑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앞으로 공작성에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성전의 마법진은 내가 확인할게.”

“아주 희소식이군. 이참에 과욕 좀 부려서 입궁 날짜도 정하지 그래.”

나와 에카르트의 반응은 상반됐다.

내 연인이 내 친구를 공작성에서 치우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 보였다. 에카르트가 나를 보챘다.

“엘린. 저 여자는 내버려 두고 루솔릿 공작령은 우리끼리 갑시다. 당신이 북부에서 고생하는 동안 본인은 황태자와 히히덕거렸다지요.”

“블랑세가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편을 드시면 저 여자 버릇 나빠집니다. 당신이 변호하니 우쭐거리는 꼴 좀 보십시오.”

정말로 블랑세는 자신감이 생기다 못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후후. 황태자 전하와 재회하고 감정이 서로 생겼다고 해서 시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건 아니죠.”

“둘이나 사랑한다니 마음 참 헤프군.”

“에카르트. 말 예쁘게 하세요!”

“사랑. 마음. 아주 예쁜 말 아닙니까?”

“헤프다고 했잖아요.”

내가 따지자 그는 언제 독설을 했냐는 듯이 순순해졌다. 나는 블랑세에게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마차나 옷 같은 건 황실에서 다 준비하겠네?”

“응.”

“아쉽다. 뭔가 근사한 의상을 고르거나 함께 파티에 가고 싶었는데.”

“괜찮아, 시엘. 다음에 하면 되지. 꼭 하자!”

블랑세는 아직 사교계에 데뷔를 하지 않았다. 나는 은근히 다음을 기대하는 블랑세를 보며 진작 작은 티파티라도 열어 줄 걸 하고 미안해졌다.

물론 내가 사교회를 열 만큼 아는 귀족이 많지 않았지만.

‘변명이지. 마음만 먹으면 되었을 텐데.’

이전까지는 둘을 떼어 놓으려고 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둘에게 더 잘해 주기로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둘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내게 슬슬 달라붙기 시작했다.

***

마검을 지배하는 자의 눈빛은 정벌할 왕국의 지도를 파악하듯 신중했고, 손은 요리사가 자신 있는 요리를 하듯 거침없었다.

그는 오레이칼 왕국에서 돌아오고 시엘리나를 타르 공국에서 다시 데려온 후부터 시간이 날 때면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미 수십 개의 캔버스가 쌓인 공작성 작업실 안.

에카르트는 캔버스에 인간의 형상을 그리고 헬라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에카르트가 붓을 팔레트 위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괜찮군. 그렇지 않나?”

그의 실력은 미취학 아동의 수준에서 좀 더 발전했다.

헬라가 어떻게든 장점을 발굴해 감상을 전했다.

“추상적인 그림체가 인상적이군요. 강렬하고 과감한 붓 터치와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머리카락에서 화가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했건만.”

“공작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보입니다!”

“쯧. 그림 보는 눈을 더 길러야겠군.”

에카르트는 그림을 다른 사람의 손이 닿아서는 안 될 소중한 보물처럼 결계까지 쳐서 보관했다.

“공녀께 슬슬 한 점씩 선물해야겠군.”

물론 헬라가 아는 시엘리나라면 간신히 잘 그렸다고 말해 주겠지만, 그림을 받고 진심으로 기뻐할지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주인님. 이렇게 그리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

에카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주어를 생략하고 말했다.

“좋아서.”

어느새 성력 치료를 하지 않더라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제는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까지 좋아졌다.

어느 날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 사람.

그 고결하고 강인한 정신. 다정하고도 단호하여 의지가 되던 말들. 때론 거침없으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모습.

이 사람이라면 언제든 자신을 휘두르거나 몸을 맡겨도 괜찮다는 믿음이 생겼다.

에카르트는 이 마법이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니.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