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자욱한 연기와 함께 신령은 꼬리 아홉 개 달린 커다란 여우로 변신했다.
“타게.”
에카르트가 먼저 성큼 올라타 갈기를 붙잡았다.
“엘린. 제 무릎 위에 앉으시지요. 저 짐승과 몸을 맞댄다고 생각하니 불쾌하군요.”
“그렇게 잡으면 달릴 때 털이 뜯길 텐데요.”
“그렇다네! 가뜩이나 요즘 머리카락이 빠져서 속상하네.”
무슨 신령이 탈모까지 신경 쓰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전에 블랑세의 창문으로 잠입했을 때처럼, 마력으로 된 밧줄을 만들어 내 고삐 용도로 이중삼중 단단히 둘렀다.
내가 고삐를 쥐고 앉자 신령은 털을 뜯길 때보다 만족스러워 보였다.
“에카르트. 제 허리를 잡으세요.”
“아하. 승마 데이트로군요.”
에카르트는 내 허리를 슬쩍 쓰다듬다가 내가 손을 탁 하고 쳐 내자 다시 꽉 잡았다.
곧 신령이 높게 도약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신령은 눈앞의 바위를 단숨에 오르더니 힘껏 달리기 시작했고 너무나도 빠른 속도에 공간이 일그러져 보였다.
풍경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는데 특별한 능력 덕분인지 멀미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금세 안개 밖을 빠져나가 말을 묶어 둔 곳까지 도착했다. 나는 마력으로 만든 밧줄을 소멸시켰고 에카르트와 함께 일어났다.
“우와.”
“그럭저럭 괜찮은 말이었습니다. 엘린, 저놈을 마차에 묶어 사용하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에요. 마구간에 말들이 놀라면 안 되니 축사를 따로 지어야겠어요.”
“먹이는 여물로 주면 되겠지요.”
“나는 신령이네. 말이 아닐세!”
“뭐.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인사하자 신령은 떨떠름해하더니 뒤늦게 근엄함을 되찾으려고 했다.
“크, 크흠! 내 이름은 미랑. 이제부터 나를 부를 때마다 나오겠네.”
아직 못 미덥기는 해도 어쨌든 그의 능력은 쓸모가 있어 보였다.
산맥을 빠져나오자 곧 안개가 다시 뒤덮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묶어 놓은 말을 타고 요새로 돌아갔다.
***
크로덴 공작성으로 복귀한 나와 에카르트는 블랑세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블랑세. 약속한 시간에 좌표의 균열이 사라졌어.”
“정말?!”
“영상석을 보여 줄게.”
블랑세는 호수 위의 균열이 희미해지다가 소멸하는 모습을 보고 글썽글썽했다.
“다행이야. 우리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게 뭔지… 이제 더 알아낼 수 있겠지.”
나는 그녀가 마음을 추스르길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시엘. 그 안개는 어떻게 뚫고 들어갔어?”
“미랑이라는 수호 신령의 능력을 사용했어.”
그러자 미랑은 뭉게뭉게 구름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이전의 형편없던 이미지를 회복하고 싶었는지 고급 부채까지 손에 들고서.
“인간이여. 나를 불렀나.”
엄격 근엄 진지한 척하던 미랑은 블랑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아리따운 아가씨가 어쩐 일로 울고 있는가? 내가 피리로 그대의 마음까지 맑게-”
“들어가세요.”
내가 차갑게 말하자 붉은 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그러다 에카르트가 째려보자 미랑은 몸을 떨고 서둘러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블랑세는 떫은 감을 먹은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그게 수호 신령이야?”
“응. 이름은 미라앙.”
정확히 발음하면 또 느닷없이 튀어나올까 봐 일부러 말끝을 늘렸다.
“저래 보여도 북부의 안개도 잠시 사라지게 했어. 게다가 커다란 여우로 변하면 말처럼 올라탈 수도 있더라고.”
“어머, 그럼 나도 태워 줘! 시엘의 허리를 꽉 잡고 꽃이 가득한 들판을 달리면 너무 낭만적이겠다.”
블랑세가 뭔가를 상상하듯 눈을 감고 말하자 에카르트가 찬물을 끼얹었다.
“머리가 꽃밭이군.”
“에카르트! 아무튼… 신전 지하에 한번 가 보고 싶은데. 지금 가능할까?”
“응. 황태자 전하께서 준 이동 마법 재료가 있어. 우리 둘이 다녀오기엔 충분해.”
“둘?”
그러자 블랑세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공작님은 걸어오거나 마차 지붕 위에 타고 오라고 해.”
“뒤끝 한번 길군. 엘린, 저 여자의 재료를 뺏어서 우리 둘이 갑시다.”
결국 이동 마법을 통해 신전에 도착한 후에도 블랑세와 에카르트는 티격거렸다.
“재료 빌려 준 거 잊지 마세요. 무임승차자 같으니.”
“엘린. 저는 이곳에 걸어서 도착했지요?”
“둘 다 조용히 좀.”
내 말에 둘은 얌전해졌고 블랑세가 지하로 가는 문을 열었다. 전에 왔을 때처럼 끝없이 이어진 계단이 보였다.
“조심하십시오.”
에카르트는 아예 들어가기 전부터 내 손을 잡고는 놓지 않았다. 나는 왠지 그 적당한 압박감에 안심이 되었다.
“블랑세. 이 공간 말이야. 아무리 숨겨졌다고 해도 이렇게 깊은데… 신전 사람들이 모를 수가 있으려나?”
“나도 그게 의아해. 이 위의 지하실만이 마검을 보관하던 장소라고 알려졌을 뿐인데.”
계단 끝까지 내려오자 공기가 차가웠다.
블랑세는 다시 팔찌를 겹쳐 올려 문을 열고 먼저 안을 확인하다 갑자기 당황한 눈빛이 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심각하게 말했다.
“시엘. 분명… 이곳의 마법진은 해제했는데. 어째서 다시 생겼지?”
“뭐?”
블랑세가 떨리는 손으로 이전에 촬영한 영상석을 번갈아 확인했다.
“믿기지 않아. 그전과 모양도 바뀌었어. 심지어 규모도 더 크고 복잡해졌고.”
그녀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빠득 갈더니 중앙의 마법진을 노려보았다.
“새로 생겨난 마법진도 전부 중앙과 연결되었지.”
“그럼… 본체가 남아 있는 한 다시 재생하는구나.”
우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중앙은 여전히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어서 주변의 마법진을 먼저 해독했는데. 결국 돌아서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엘린.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아직 때가 아닐 겁니다.”
에카르트가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먼저 위로했다. 사실 이런 변화에 가장 힘든 건 그였을 텐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정 파악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도 있어요.”
“무엇인가요?”
“일단 외부와 분리된 공간이 필요해요. 황태자 전하께 아공간을 빌려 달라고 하거나요. 그 후 제가 이 마법진을 복제할 거예요.”
그럼 똑같은 마법이 발동할 테니 어떤 마법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이 동일하게 발동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술식을 완성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지식 없이 리타의 마법을 곧장 복사해 냈고 지금 중앙 마법진 역시… 이해도가 없어도 따라 그리려고 마음이야 먹으면 가능했다.
‘물론 부작용은 내가 고스란히 감당하겠지. 그래서 여태 에카르트와 블랑세가 만류했고.’
그런데 블랑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엘! 무슨 마법인 줄 알고 따라 하려고 해? 나는 네 곁에 평생 있고 싶단 말이야.”
블랑세가 질척하게 내 허리를 붙들자 에카르트 역시 내 가슴 위에 팔을 둘렀다. 띠가 두 개나 되는 안전벨트를 두른 기분이었다.
“엘린. 그런 위험을 감수할 바에 저 마법진은 내버려 둡시다. 정 안 되면 제국과 단절된 무인도로 떠나서 우리 둘이 알콩달콩 살지요. 영원히.”
“둘 다 진정해요. 지금 그 방법을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제가 지켜볼 겁니다.”
“나도.”
그건 이미 하고 있으면서 새삼!
블랑세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이 글썽거렸고 에카르트 역시 무서운 인상이 되었다. 나는 내 앞에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음이 여려지는 둘을 열심히 달랬다.
***
라멜은 평소처럼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됐고 피부는 평소보다 어두웠다.
요즘 그녀는 부쩍 걱정이 많아졌다.
‘전부 시엘리나 때문이야.’
그녀의 존재를 떠올리면 위산이 역류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
책상에는 읽다가 말은 러브레터와 선물로 받은 여러 보석품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라멜은 별 감흥 없이 그것들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잔주름이 가득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꺄악!”
라멜은 자기 자신인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그건 리셀의 얼굴이었다.
“뭐, 뭐예요?”
“얘. 드레스 좀 빌려 줘.”
“다짜고짜… 드레스라면 저보다 더 많이 있잖아요.”
“좀 더 어려 보이려고 그래!”
리셀의 호위 기사 리차드는 20대 후반. 리셀과 열 살도 넘게 차이가 났다.
라멜이 질렸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아빠는 아직 모르세요?”
“알면 뭐 어때?”
“뭐 어떠냐니! 엄마 때문에 아빠가 저까지 싫어하면 어떡해요!”
“어머, 그게 왜 나 때문이래?”
가끔 라멜은 리셀과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곧 아빠 생일이니 선물이라도 준비해요.”
“네가 내 몫까지 골라 둬.”
“아, 제발 좀 적당히 해요!”
라멜은 정말이지 무책임한 리셀의 태도가 짜증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리셀은 딸인 라멜이 그러거나 말거나 한 귀로 흘려듣고는 멋대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더니 색이 쨍한 옷 한 벌을 골라서 나왔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에 옷을 대 보았다.
“그렇게 마음대로 살아서… 행복해요?”
“당연하지.”
리셀은 라멜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고 드레스에만 집중했다.
“사랑하면 행복해지나요?”
“당연하지. 얘! 가서 남자들도 사귀고 그래. 여럿 만나 봐야 좋은 놈 고르는 거야.”
만약 리셀이 딸의 고민을 귀담아들었다면, 라멜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다면 더 나은 대답을 들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조언 또한 라멜이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저는… 크로덴 공작님이 아니면 안 만날 거예요.”
거품이 꺼진 것 같은 목소리로 라멜이 말했다.
“크로덴 공작? 아, 나도 그렇게 어리고 잘생긴 사람 만나고 싶어.”
라멜은 기가 찼고 화가 가라앉은 후에는 결국 우울해졌다.
분명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화로운 옷을 입고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지내며 여럿에게 사랑받는데.
왜 빈민가에 있을 때처럼 공허하고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
마법진 연구는 다시 초기 단계로 돌아왔다. 신전 지하에 균열이 다시 생겨난 후, 북부의 상황은 서면으로 전달받았다.
“어떻다고 하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