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한편 크로덴 공작성. 다비온은 블랑세에게 용기내서 이야기를 꺼냈다. 오기 전에 수십 번 마음속으로 연습했지만 결국 목소리가 떨렸다.
“블랑세 양. 어머니께 저와의 사이를 밝히면 어떤가요?”
“어떤 사이요?”
“친구가 되었다고. 제가 호감을 갖고 접근했노라 하고요.”
다비온은 에카르트와 시엘리나가 그랬듯이 이 기회에 블랑세와 정식으로 교제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블랑세는 그 서툰 진심이 싫지 않았다.
“후후. 황후 폐하께서 사랑의 오작교가 되어 주시려나요.”
“사랑의 오작교?”
“시엘에게 들은 동방 전설이에요. 헤어진 연인을 만나게 하기 위해 새 떼가 사랑의 오작교를 놓아 주는 날이 있대요.”
“흥미롭군요. 그런데 방금 사랑이라고…?”
“사람이라고 했어요.”
블랑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단호히 말했다.
익숙한 감정이 들자 다비온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황태자로서 어머니가 정해진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블랑세가 되었다.
“블랑세 양.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러다 다비온은 다른 기억 하나가 더 떠올랐다. 이전에 블랑세와 몰래 만남을 이어 가며 일 분 일 초가 소중하고 아쉬울 때.
“이런 말… 제가 전에도 했죠?”
“어떤 여자와 헷갈리셨어요?”
블랑세는 다 알면서도 다비온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즐겼다. 그리고 그가 괴로운 기억까지는 떠올리지 않도록 모른 척했다.
“전하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저도 그렇지만. 블랑세 양… 혹시 다른 분을 마음에 두고 계시는 건 아니죠?”
“누구를요?”
“시엘리나 공왕…이라든가.”
“시엘은 항상 제 마음 일부를 차지할 거예요.”
“그렇다면 저도 일부 정도는 가질 수 있을까요?”
“마음만요?”
다비온은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믿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볼에 닿았다가 떨어진 것이다.
잠시 현실감이 아예 사라졌다.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되돌려 주세요.”
“……!”
다비온은 인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황급히 물러났다.
블랑세가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귀엽긴.’
그녀는 마력으로 작동하는 손목시계를 흘긋 보고 신전으로 가기로 했다.
***
나와 에카르트는 말 두 필을 타고서 안개가 낀 산맥으로 향했다.
이전과는 다른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마 그간 경험이 쌓이며 마법 숙련도가 올라가고 좌표도 풀은 덕분이겠지.
“그럼 이제 수호신을 불러내야겠어요.”
“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태 몇 번 시도해 봤는데 통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나는 끈을 안개 가까이 가져가기도 하고 흔들어 보기도 했다. 꼬아 보고 풀어 보고 여러 마력 술식을 사용해 봤다.
“엘린. 제가 한번 보지요.”
에카르트는 내게서 끈을 받아 들고는 다짜고짜 마검을 소환했다.
“…에카르트?”
“너무 오냐오냐 해 주면 안 됩니다. 잘라 버립시다.”
“네?!”
마검을 들던 그때 동시에 끈이 번쩍 빛나며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멈추게!”
붉은 머리카락과 검은색 눈동자에 체격이 호리호리한 청년이 나타났다.
행색은 동방의 도복 차림이었는데 옷고름을 제대로 매지 않아 속살이 보였다. 보는 사람 무안해라. 그리고 등 뒤로는 붉은색 꼬리가 살랑거렸다.
꼬리의 개수가… 하나, 둘, 셋. 아홉 개… 구미호인가?
에카르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그 늑대가 제대로 된 물건을 줬을 리 없잖습니까?”
“샤사는 늑대가 아니에요.”
“여태 다 엿듣고도 나타나지 않았다니 관음증이나 관청증이 있는 놈이었나 봅니다. 둘 다일지도 모르지요.”
“에카르트. 일단 이야기 좀 먼저 들어 봐요.”
“들어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 미물은 제가 처리할 테니 잠시 눈 감고 계십시오. 착하지요?”
그러자 구미호가 꼬리 아홉 개를 모두 말더니 손을 모으고 간곡하게 외쳤다.
“나는 수호 신령이네. 인간이 신령을 살생한다니 법도에 어긋나는 일. 부디 살려 주시게!”
“정말 신령 맞아요?”
신령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품이라고는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제대로 불러낸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강한 전사에게 반응한다더니 그동안 강자에게 협박당해서 나온 건가요?”
“아, 아닐세. 나를 불러내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뭔데요?”
“1년간 끈에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말을 걸어야 하네.”
“누가 그렇게 물건과 대화를 나눠요?”
내가 핀잔을 주자 구미호, 아니 신령의 검정 눈동자가 글썽글썽했다.
혹시 그동안 외로워서 저런 조건을 만들었나 마음이 조금 약해질 찰나 에카르트가 단칼에 잘라 말했다.
“일단 남자라서 마음에 안 드는군요.”
“당신이 언제부터 성별을 따졌다고.”
“하긴 그렇지요. 역시 내 사랑은 똑똑합니다.”
그사이 신령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사라질 준비를 했다.
“그,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노라!”
“그전에 이 산맥의 안개를 걷어 주세요.”
“허어.”
신령은 뒷걸음질 치더니 안개의 규모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은 뒤로 가야 제대로 보일 텐데. 그런 모습을 보며 에카르트가 비웃었다.
“노안이 왔나 보군. 마력이 많으면 노화가 느리건만 어지간히도 약한 모양이야.”
“그, 그게 아닐세! 안개 속에서 마수의 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에.”
“네. 여기서 마수가 나오니까요.”
내 말에 신령이 질색했다가 에카르트의 포스를 보고는 경기를 일으켰다.
마수와 마검의 지배자 중에서 뭐가 더 무서운지 제대로 가늠한 신령은 도복 안쪽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뭔가를 꺼냈다. 갈색에다가 두 뼘쯤 되어 보이고 구멍이 뚫린 물건이었다.
“…담배?”
“아닐세! 이건 만파식적이야.”
그건 이전 세계의 전설인 줄 알았는데.
신통한 물건들은 시간대와 세계를 불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령이 피리를 어색하게 쥐더니 미리 경고하듯이 말했다.
“다만 오랜만에 불어 봐서…. 단 몇 시간 정도만 맑은 날씨가 유지될 걸세.”
“더 오래는 안 되나요?”
“미안하네.”
“뭐 어쩔 수 없죠.”
신령이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걱정과 달리 연주는 제법 듣기 괜찮았다.
그런데 짙은 구름이 몰려들더니 날씨가 더욱 안 좋아졌다. 눈빛으로 해명을 요구하자 신령이 피리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자, 잠깐! 내가 잘못 불은 게 아닐세!”
그가 좀 더 잔잔한 멜로디를 연주하자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었지만 에카르트는 그래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연주가 끝난 후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뾰족한 잎을 가진 나무들이 들어섰고 푸석한 토양 군데군데에 마수들의 발자국이 엉망으로 찍혀 있었다. 높은 바위나 쓰러진 고목이 많아 말로 이동하기 어려워 보였다.
뒤에서 신령의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나는 물러가도 되는가?”
“아뇨. 같이 가시죠. 저희도 초행이라서요.”
내가 요구하자 신령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한 걸음씩 마지못해 뒤따라왔다.
“허으.”
“히긱.”
“아이고.”
오랜만에 능력을 썼다고 힘든 건지 늙어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내 옆에서 손을 꼭 잡고 걷던 에카르트가 차갑고 짧게 명령했다.
“입 다물고 걸어.”
신령은 엄살이었는지 바로 조용해졌다. 에카르트는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엘린. 힘들지는 않습니까?”
“괜찮아요.”
“지형이 험하니 조심하십시오. 제가 안고 갈까요?”
“후후. 손만 잡아 주세요.”
계속 안개 속을 걷던 나는 반짝이는 검은 빛을 발견했다.
블랑세가 이전에 숲으로 갔을 때와 같았지만 더 강한 파장이 느껴졌다. 우리는 반짝이는 것들이 모여드는 지점으로 걸어갔다.
“요, 요즘 젊은이들은 겁도 없군!”
뒤에서 신령이 꿍얼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흙이나 나무 색깔과 다른 청회색의 뭔가 펼쳐져 있었다. 넓은 호수였다. 얼은 것처럼 금이 가고 주변의 땅은 부식되었으며 계단처럼 회색의 암벽이 서 있었다.
“에카르트. 블랑세가 저주받았을 때 생긴 금과 일치해요.”
“…근처의 발자국 역시 최근에 해치운 마수들과 같은 종류입니다.”
마법진의 좌표는 호수. 그리고 근방에 존재하는 불안정한 균열. 지하의 마법진이 이곳의 마수를 소환하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균열을 만져 보려고 하자 에카르트가 만지지 못하게 조심히 손목을 잡았다. 나는 그 균열과 접촉하는 대신 영상석으로 촬영하기로 했다.
“신령님. 이런 균열 본 적이 있어요?”
“글쎄다. 어쨌든 여기서 마수가 나온다는 거 아니냐? 가까이 가기도 싫구나.”
에카르트의 시선이 꽂히자 신령이 기겁하고는 외쳤다.
“정말 못 봤노라, 못 봤어!”
“아, 네.”
나는 마력으로 작동하는 손목시계를 흘긋 보았다.
“에카르트, 곧 블랑세가 예고한 시간이에요.”
5, 4, 3, 2, 1 하고 나는 작게 초를 셌다. 정각이 되자 균열 하나가 희미해지더니 아예 사라졌다. 아마 블랑세가 지하의 마법진을 풀어냈으리라.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선대 공작들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균열 때문에 마수를 상대로 평생을 전투하며 살았다는 뜻이니까. 에카르트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왜 이따위 망할 게 여기 있습니까?”
“그건… 앞으로 더 알아 가야죠. 다른 마법진을 해제하면 기억 마법이 더 드러날 거예요.”
붉은 눈동자가 호수의 물을 전부 끓일 듯이 노려봤다.
“영상석으로 촬영했으니 이제 요새로 돌아가요. 맑은 날씨를 유지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마법진을 전부 해제해서 균열을 없애면 마수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고 북부의 입지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왜 이 마법진이 있는지 먼저 밝혀내야 했다.
에카르트가 영상석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신령은 용기 내 호수 가까이 다가오더니 작은 돌 안에 담긴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호오. 인간들은 갈수록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구나.”
만파식적을 들고 다니는 신령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어쨌든 도움을 줬으니 더 이상 구박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갈 거예요.”
“크흠. 내가 데려다주겠네.”
“신령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