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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82화 (82/115)

#82화

“그럴 필요도 없고 애초에 안 해요. 이건 특별한 거라서요.”

“그렇습니까?”

그는 다시 팔불출 모드가 되었다. 마수 사체가 즐비하게 늘어선 전장도, 마냥 데이트 장소인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와이번에게 잡혀갈 뻔한 병사가 생각할 수도, 꿈에서라도 보기 무서운 상사의 모습에 중얼거렸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졌고 에카르트는 퇴각을 알렸다. 지금 안개를 걷어 내고 산맥에 진입하기는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안개를 잠시 바라보다가 기사단과 함께 요새로 돌아왔다.

이전에 북부 요새에 왔을 때. 에카르트는 내게 이런 말을 하며 따로 좋은 숙소를 제공했다.

“다른 백마법사들과 같은 막사를 쓰면 되는데요.”

“당신이 제 백마법사 자격으로 왔는데 당연히 특별해야지요.”

그러더니 특별 대우로 기사 한 명도 붙여 줬었다. 물론 지금도 내 방은 여자 호위 기사 한 명이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나. 바로 니나의 언니였다. 원래는 무기고를 담당하는 기사였고 내가 올 때면 임시로 나를 호위하는 역할을 했다.

“공녀님. 다시 와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녀가 싹싹하게 인사했다. 나에 대해 왈가왈부한 병사들만 마수에 물려 갔는지 더 이상의 잡음이 없는 덕분에, 북부에서 더 이상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일은 없었다.

미나 역시 나를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제 친구가 망루에서 아까 전투를 지켜봤다는데… 하얀빛이 반짝이며 마수를 공격했대요! 공녀님의 마법이었나요?”

“맞아요.”

“어쩜, 성력뿐만 아니라 마력까지 대단하세요!”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겸손하게 “뭘요.”라고 말했다.

“저, 입대하길 잘했어요. 이렇게 멋진 분과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공녀님은 북부의 햇살이에요.”

“아니에요. 미나 경이 북부에 계셔서 든든하죠.”

“공녀님, 어흑. 제가 꼭 지켜 드릴게요!”

왠지 니나가 기사가 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그녀는 에카르트가 들어오자 무슨 말을 했냐는 듯이 숙연해졌다. 에카르트는 밖에서 다 들었다는 듯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다른 놈들에게 너무 다정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이전처럼 연무장 백 바퀴 뛰지는 않으니 나름대로 발전이라면 발전이네. 내 방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에카르트와 담소를 나눌 때. 프롬이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공작님. 보고서를 정리했습니다.”

“엘린. 잠시 다녀올 테니 쉬고 계십시오.”

“네.”

나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소파에 앉아 눈을 붙이기로 했다.

***

거대한 은하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주변이 온통 별들로 반짝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원형으로 모인 빛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새로운 이름에 익숙해졌나요?”

비록 목소리만 들었지만 누구인지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체닐… 님?”

“맞아요. 시엘리나의 육체가 당신의 영혼과 맞아서 다행이네요.”

“시엘리나 님은 어떻게 됐어요?!”

“사후 세계는 말씀드릴 수 없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약속할 수 있는 건…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신비로운 공간이라 그런지 그녀가 내 생각도 파악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또 영혼이 바뀌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는데 말이다.

체닐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러려면 세계를 유지해야겠죠. 당신이 믿는 사람들과 함께 계속 앞으로 나아가세요.”

“네. 안개를 헤치고 마법을 알아낼 거예요. 그런데 그 마법진은 누구의 힘인가요?”

“그건.”

체닐이 뭔가를 답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언어였다. 하지만 마지막 말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당신은 이미 알고 있어요.”

“…다른 세계에서 온 나?”

“네. 그때의 기억은 필요할 때 떠오를 거예요.”

그녀가 더 이상 답해 줄 기색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의문 한 가지가 더 남았다. 그녀가 미래를 예측했다면 루솔릿 공작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테고 전 크로덴 공작 부부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내게 특별한 능력이 생긴 건… 결혼한 후랍니다. 그러고도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의 미래는 보지 못했죠.”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가 알고 있다고? 당장 짚이는 사실은 없는데.’

마력으로 작동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어느새 10분이 넘게 지나 있었다. 체닐이 꿈에 나타났으니 혹시라도 이곳에 뭔가 변화가 생겼는지 확인하러 가고 싶어졌다.

내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미나가 말을 걸었다.

“공녀님! 필요하신 게 있나요?”

“아. 잠시 근처도 둘러보고… 망루 쪽에 다녀오고 싶어요.”

“그럼 같이 가요!”

나는 미나와 함께 잠시 방을 나섰다. 에카르트가 보고서를 처리하러 다녀오기로 했지만, 잠시 나갔다 오는 것쯤은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

망루는 요새의 내외부가 내다보였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에 산맥은 온통 구름이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까만 밤을 정제한 마정석이 가로등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특별한 건 없나.’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순간 놀랐지만 에카르트라는 것을 깨닫고 가만히 있었다.

귓가엔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에카르트?”

“…왜. 왜 밖에 나오셨습니까?”

어서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잠시 확인할 게 있었어요. 꿈에 체닐 님이 나왔거든요. 그래서 뭔가 달라졌는지 보려고 했는데… 딱히 없는 것 같아요.”

“…….”

나는 천천히 뒤돌아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고 지금도 안심하지 못한 것처럼 내 손을 꼭 붙들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에카르트. 제 말 듣고 있어요?”

“네. 일단 요새로 돌아갑시다.”

그런데 복도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기사들이 횃불을 들고 돌아다니다가 나를 보고 안도했다. 에카르트는 그들에게 하던 일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미나 경이 잠시 망루에 다녀오겠다고 했을 텐데요.”

“그래서 인원을 나눠 수색했지요.”

이런 비상 상비군을 나를 찾는 데에 동원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그치는 대신 차분하게 당부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떠날 겁니까?”

“네?”

“…또 떠나실까 봐 불안합니다. 예전처럼.”

에카르트는 원래도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전의 나는 그런 속박이 싫어서 멀어지려 했고 마침내 타르 공국으로 도주했다.

‘아직 내게 확신을 갖지 못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파서 앞으로 믿음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에카르트의 손을 잡고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같이 자요.”

“네? 정말입니까?”

에카르트가 눈을 깜빡이더니 언제 불안했냐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런데 엘린. …여기서요?”

“네. 장소가 무슨 상관이에요.”

어린아이가 천둥소리를 듣고 무서워지면 같이 있을 사람을 찾지 않는가. 그가 두렵다면 나는 오늘 밤 계속 함께 있어 줄 생각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옆자리를 톡톡 가리켰고 그는 순식간에 앉았다. 조금은 민망함이 들기도 했지만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고 함께 마주 보고 누웠다.

“자. 이렇게 손을 잡고 자면 덜 불안할 거예요.”

“네?”

“물론 예전에도 같은 침대를 쓰려고 하셨지만 그때는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잖아요. 이제 사귀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되죠.”

“그러니까… 손만 잡고 잔다는 의미였습니까?”

순식간에 천장이 돌아갔다. 그가 나를 정면으로 눕힌 채 침대 시트를 짚고 내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시선을 어디 둘지 알 수 없었다. 곧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엘린. 어린애 취급은 싫습니다.”

“그, 그래요. 에카르트는 어른이죠?”

뭔가 슬그머니 닿은 느낌에 내 시선이 흘끔 아랫배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에카르트 역시 흠칫하더니 내게서 떨어지고는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고 나를 등졌다.

“저는 나쁜 생각이나 마저 하다 자야겠군요.”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마세요.”

“…….”

잠시 후 그가 슬그머니 돌아오더니 다소곳하게 침대에 앉았다. 그의 불안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저… 에카르트를 떠나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고요. 당신이 내게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서.”

“저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니까 함께하는 거예요.”

그러자 에카르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품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유독 밤이 길게 느껴진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이 산맥으로 가려는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유독 춥네요. 공녀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미나가 불에 넣어서 따뜻해진 돌을 들고 손을 후후 불었다. 내가 그 돌을 보자 미나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갖고 가실래요?”

“아뇨. 그건 아니고.”

그녀가 너무 추워 보였기에 나는 돌을 받아 들고 마법으로 데워서 건넸다.

“따뜻함이 더 오래갈 거예요.”

집착남에게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그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엘린. 저 여자에게 마력을 사용했습니까?”

“아닐걸요?”

“아니긴요. 제가 향도 맡고 맛도 보고 발라도 보고 제 몸에 넣어 보기까지 했는데.”

에카르트가 그걸 모르겠냐는 듯이 따졌다.

마력이라는 주어를 생략했더니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 되었다. 가뜩이나 어젯밤 같은 방에 계속 있었는데!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미나가 눈이 동그래진 채 돌을 떨어뜨린 것이다.

“감히 엘린의 마법이 담긴 물건을 떨어뜨려?”

“죄송합니다!”

미나가 서둘러서 다시 돌을 후다닥 주워들었다. 나는 에카르트의 옷깃을 잡아끌고 요새 밖으로 나갔다.

산맥 너머는 그동안 안개로 가려진 미지의 장소.

신전 지하의 마법진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나와 에카르트, 블랑세, 다비온뿐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기사들을 두고 우리 둘만 떠나기로 하였다.

에카르트는 그런 이유를 들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그가 이 작전 또한 일종의 데이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미나가 아침부터 이런 말을 전해 준 거로 봐서는 말이다.

“공작님께서 오늘 아침부터 성능은 다 똑같고 모양까지 전부 비슷해 보이는 갑옷 열 개를 두고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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