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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81화 (81/115)

#81화

“달리 할 사람도 없는데요.”

“그래도 한 번 더 당부해야겠습니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 확실히 내 이마에 도장을 찍듯 몇 번 더 입을 맞췄다.

‘좋기는 한데. 원래 사귀면 다들 이렇게 스킨십을 많이 하나?’

언젠가 이 이상도 할지 모르는데 벌써 걱정이 되었다. 슬금슬금 몸을 떼어 내려 했더니 그는 더욱 나를 꽉 끌어안았다.

“제가 그동안 북부를 지키길 참 잘했습니다. 제 모든 행적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나 봐요.”

강인한 지배자의 눈빛과 날카로운 인상.

그리고 어떤 때도 묻지 않은 듯 순수한 눈동자.

내가 발견한 그의 모습에 따뜻하고 달콤한 음료를 마시듯 마음이 포근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신은 저를 정말 좋아하네요.”

“네. 사랑하지요.”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나로 인해 변하고 나를 변화시킨 남자.

그런 그를 꼭 지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흠흠, 이제 가요.”

“네. 따뜻하게 입고 가셔야 합니다.”

에카르트는 나를 온갖 마법 작물로 만든 옷으로 중무장시키고는 마차로 데려갔다.

다비온이 도착하여 블랑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홍조를 띠기도 하고 수줍게 미소 짓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와 에카르트가 나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에카르트, 공왕. 북부로 가실 수 있도록 마법진을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조심히 다녀오시길.”

“네. 그럼 블랑세… 안녕.”

“기다리고 있을게.”

배웅하는 이들에게 간단한 작별 인사를 마친 후.

나와 에카르트는 북부로 떠났다.

***

“그럼, 여기 더 오래 있어도 되나요?”

다비온이 기대를 담아서 묻자 블랑세가 말했다.

“오늘과 내일은 아니에요.”

그러자 황태자는 시무룩하게 황궁으로 돌아갔다. 블랑세는 다비온을 돌려보내고는 로브를 눌러쓰고 홀로 수도로 향했다.

술식은 시엘리나가 안개 너머로 진입한 후에 해제하기로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한 번 더 지하의 상황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블랑세가 신전으로 가려다 걸음을 잠시 멈췄다. 아까부터 뒤따르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렸는데 그녀가 멈추자 들리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니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누군가 쫓고 있어. 언제부터였지?’

광장에서부터였나. 그녀는 낯선 사람을 따돌리는 대신 일부러 인적이 드문 길로 걸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짚이는 바가 있었기에 얼른 한쪽 편에 자리를 잡은 뒤 블랑세는 걸음을 멈췄다.

“황후 폐하께서 보낸 사람인가요?”

그러자 모퉁이 뒤에서 갈색 머리의 중년 남자가 나왔다.

“그렇소.”

순순히 따라가지 않으면 과격한 방식을 사용하겠지.

블랑세는 이런 심복 한 명을 따돌릴 수 있었지만 더 큰 사태를 막기 위해 따라가기로 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따라오시죠.”

“…기꺼이.”

남자는 블랑세를 인적이 드문 길로 안내하고 처음 보는 살롱으로 들어갔다.

내부 구조는 잘 몰랐기에 블랑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 있는 얇은 커튼을 걷고 안쪽의 방으로 들어가니 베일을 쓴 아렌다가 앉아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가 보았다.

“폐하.”

“앉으렴. 오랜만이구나.”

블랑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얌전히 앉았다.

아렌다가 더없이 우아한 몸짓으로 찻잔에 물을 따르자 말려 있던 꽃잎이 천천히 퍼져 나갔다. 황후가 먼저 차를 음미하는 사이 블랑세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마시지 않고.”

“…감사합니다.”

블랑세의 붉은 입술을 따라 찻잔이 기울어졌다.

차를 삼키며 목울대가 움직였다. 마신지 시간이 흘러도 큰 이상은 느껴지지 않아 블랑세는 한숨 돌렸다.

“그래. 부탁한 일은 잘되어 가니?”

“변수가 생겼지만 계속 임무를 수행하려고 합니다.”

아렌다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시엘리나가 복귀해서 재밌는 말을 하더구나. 참 발랄한 아가씨야.”

“…….”

“블랑세.”

“하명하십시오.”

“앞으로는 둘을 감시하렴. 할 수 있겠지?”

황후의 질문은 곧 명령이었기에 블랑세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복종했다.

블랑세가 나간 후. 아렌다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 블랑세가 비운 잔을 바라보았다.

독을 탔다. 달의 꽃으로 만들어 조금씩 생명력을 가져가는 독.

해독제 역시 오직 달의 꽃이다. 독이 온몸에 다 퍼지고 나면 그제야 블랑세도 그 사실을 알아낼 것이다.

만약 블랑세가 시엘리나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면 더 좋을 것이다. 시엘리나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달의 꽃을 받아 내려 할 테니까.

그렇다면 그 제멋대로인 공녀도 길들일 수 있을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나를 찾아오게 되겠지.’

어릴수록 정에 쉽게 휩쓸리므로 아무리 강해도 약한 면이 있었다. 다비온이 아렌다에게 여전히 여리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너는 새끼 마수를 보고도 어미를 잃었다며 안타까워했지.’

그래서 그동안 그녀는 더 독하게 마음을 먹어 왔다.

자신과 그녀의 아들인 다비온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

주변의 영지와도 멀리 떨어지고 세상의 끝처럼 넓고도 황량한 곳.

평지와 그 뒤의 산맥 너머로는 안개가 넓게 펼쳐졌다. 그곳이 북부였으며 마수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역대 크로덴 공작들의 의무였다.

요새는 안개 낀 산맥과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크로덴 공작성처럼 화려하기보다는 오직 방어와 군사적 기능에만 충실했다.

요새 밖에는 망자를 기리기 위한 묘지가 보였다. 비석이나 작은 나무 십자가를 엮어 세워 두었는데 그 영역부터 마법 결계를 쳐 놓았다.

우리는 웅장한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내부는 여러 용도의 막사와 훈련장이 훤히 내다보였다.

“오셨습니까?”

이클립스 기사단의 부단장이 다가와 인사했다.

그의 이름은 프롬. 말단 기사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사람이라서 그간 안면이 있었다. 늘 깔끔한 인상의 그는 내게 인사를 건넸다.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네, 프롬 경. 항상 수고가 많네요.”

“하하, 뭘요. 공녀님이야말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무슨 뜻이지?”

에카르트가 날카롭게 노려보자 프롬이 바짝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공녀님께서 이 먼 곳까지 오시니 걱정이 되어서-”

내가 에카르트의 소매 끝을 잡아끌며 갈구지 말라는 무언의 신호를 줬다.

“일 봐.”

“존명!”

프롬은 여태 기사단에서 살아남은 부하답게 한숨을 돌리고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내가 살짝 에카르트에게 항의했다.

“왜 겁을 줘요?”

“그놈 편을 드십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 자식, 저 때문에 고생이 많다는 의미로 말했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건만 혼자 찔린 모양이었다. 나는 가여운 부단장을 변호하는 대신 집착남을 달래 주기로 했다.

“고생은 무슨. 그리고 제가 원해서 왔잖아요.”

에카르트는 곧바로 순순해지는 것도 모자라 시무룩하기까지 했다.

“엘린. 당신이 제게 여러모로 맞춰 주고 있는 거 압니다. 그래서 고맙고 죄송하군요.”

“원래 연애는 둘이 맞춰 가는 거예요. 당신도 제 말에 잘 따라 주면 되잖아요.”

“…이렇게 착해서야.”

에카르트가 내 뺨을 쓰다듬는가 싶더니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거기서 끝날 줄 알았는데 눈가, 코, 볼과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이러다가 점점 진해질 기세였기에 나는 그의 볼에 한 번 입술을 닿았다 뗐다.

그는 진정하는 대신 오히려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내 입술을 씹을 듯이 빤히 바라봤다.

강하게 말릴 수도 없고 어떻게 할까 싶은 찰나 다행인지 그때 프롬이 급히 되돌아왔다.

“공작님! 1시 방향으로 마수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중상급 와이번들과 블랙버드까지 다수입니다.”

날아다니는 마수는 마병에게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였다. 물론 에카르트에게는 날파리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마법으로 원거리에서 보좌해서 피해 규모를 줄이는 게 나을 터.

“같이 가요, 에카르트. 제가 마법으로 후방에서 도울게요.”

“전장은 위험합니다만… 저는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지 못할 무능한 놈이 아니지요. 그럼 제 말을 타십시오.”

“알았어요.”

프롬이 재빠르게 다른 말보다 눈에 띄는 검은 말 한 필을 가져왔다.

에카르트의 명마는 머리가 좋아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아차린다. 고삐만 제대로 쥐고 있다면 나 때문에 진열이 엉망이 되거나 위험할 염려는 없었다.

나는 에카르트의 검은 말 위에 올랐고 곧 요새 문이 열렸다.

검은 파도처럼 몰려드는 마수 떼를 향해 모두가 진군했다.

경험이 풍부한 기사들인데도 전투 앞에서는 늘 엄숙해졌다. 에카르트 역시 방심하지 않았다. 그가 선두로 마수들을 베며 진열을 정리했다.

기사들은 그의 지휘대로 일사불란하게 대열별로 흩어져 마수를 공격했다.

노인의 피부처럼 주름진 와이번, 아가미가 달려서 물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와이번, 날카로운 깃털을 떨어뜨리며 공격하는 블랙버드. 그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와이번 한 마리가 거대한 발톱으로 마병 한 명을 낚아채 올렸다. 마수가 병사를 끌고 높이 날아오르기 전. 나는 곧장 와이번의 다리를 베어 참사를 막았다.

수많은 마수가 기사단의 무력 앞에서 스러졌다. 마수의 살점이 마구 나부끼며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에카르트의 후방으로 다가가려던 커다란 괴조를 처치했다. 바로 뒤이어 곧 에카르트의 마검이 몇 번 더 가른 후 상황은 쉽게 끝났다.

병사들은 모두 무사해 보였고 나는 연인에게 따로 물어봤다.

“다친 곳은 없어요?”

“아. 아까 이쪽을 공격받았습니다. 와이번의 비늘이 스친 것 같은데요.”

에카르트가 뒤늦게 손등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내가 봤다. 비늘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날아갔고, 내가 바람의 방향을 바꿔 장갑조차 긁지 못한 데다, 그조차 그의 포스에 묻혀 사라졌다.

이제는 꾀병 부리지 않아도 언제든 얼마든 성력을 나눠 줄 수 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므로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많이 아팠어요?”

“네. 손이 얼얼하군요. 부러진 게 아닐까요?”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만져 보다가 미소 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제가 호 하면 나을걸요.”

“호?”

내가 그의 손을 잡고 호호 불었다. 그는 히죽 웃다가 덜컥 겁이 난 듯이 신신당부했다.

“엘린. 이런 치료는 절대 다른 놈팽이에게 하면 안 됩니다.”

“안 해요.”

“우리, 요새로 들어가서 피의 각서를 씁시다. 당신의 피로 쓸 수는 없으니 짐승의 것으로 대체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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