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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80화 (80/115)

#80화

주인께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해 보였기에, 집사인 헬라는 차마 뭐라고 하지 않고 “그렇습니다.”라고 얼른 맞장구쳤다.

에카르트가 성벽 주변을 기웃거리는 첩자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첩자는 인기척도 못 알아차리고 순식간에 제압당해서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십니까?”

“엘린의 연인이다.”

에카르트가 자부심을 느끼는 동안 헬라는 익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잡힌 이가 헛소리를 시전하기 전에 그녀는 첩자의 입을 틀어막고 공작성 지하로 끌고 갔다.

냉동고라고 불리는 이곳의 위치는 오직 극소수의 고용인만 알았다. 첩자의 몸수색을 마친 후에 헬라가 뭔가를 보여 줬다.

“공작님. 이것을 발견했습니다만.”

손목시계 모양의 마도구였다.

“상당히 복잡한 구조입니다. 공왕님이라면 해석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우리 엘린에게 일거리를 맡길 수는 없지.”

에카르트는 우선 마도구에 자폭 기능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의 능력 중에서는 검술이 가장 뛰어났지만, 선대 공작 부부가 암살당한 후 여러 마도구의 사용법이나 구조까지 홀로 익혀 왔다.

그 능력은 웬만한 마도구 감정사 못지않았다.

포박당한 남자의 머리가 에카르트의 검은 구두에 지르밟혔다.

“누구의 명을 받았지?”

“저, 저는… 공작성의 하녀를 보러 왔습니다! 이름도 모르지만 첫눈에 반한 바람에 어느새 여기까지 따라오게 되어서.”

“하녀?”

“네. 초록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였습니다.”

첩자는 아까 공작성 문을 드나들던 여자의 얼굴을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아. 벨라 영지로 심부름을 보냈지.”

“네, 네. 거기서 만났습니다.”

“개소리군. 그 하녀는 수도에서만 심부름을 처리하는데 말이야.”

수많은 첩자를 상대한 에카르트였기에 당연히 거짓말을 간파하고 떠본 것이다. 에카르트가 마도구를 해체했다.

‘이동 마법 술식. 위치를 변경하는 마법이군.’

여차하면 납치하려는 용도였으리라. 이런 재료와 복잡한 기술을 가진 세력은 별로 없었다.

“내게 대놓고 허튼짓을 할 리는 없고… 땅딸보를 따라왔나 보군. 황후가 시킨 짓인가?”

“…아, 아닙니다!”

“네 얼굴이 기억났다. 길드에서 퇴출당한 용병이로군.”

“어, 어떻게 그것까지.”

첩자가 당황한 사이 에카르트는 헬라에게 눈빛으로 명령했다.

헬라가 벽에 손을 대자 타일 하나가 밖으로 밀려 나왔다.

헬라는 첩자를 기절시킨 후 들것같은 직사각형의 타일 위에 눕히고 다시 밀어넣었다. 어떤 정보든 밖으로 새 나가지는 않는 아주 간단한 처리 방식이었다. 상황이 정리된 후 에카르트는 해체한 마도구를 헬라에게 건넸다.

“이것도 보관해.”

“알겠습니다.”

“잠깐.”

갑자기 붉은 눈동자가 불길함을 직감한 듯이 예리해졌다. 헬라는 혹시 다른 첩자가 남아 있는지 못 다한 일이 있는지 긴장했다.

“그 땅딸보가 엘린에게 집적거리고 있겠군.”

에카르트는 헬라를 덩그러니 남겨 놓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

먹고 자고 씻거나 쉬는 시간 빼고 마법진 연구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며칠간 지속했다. 복잡한 기호와 술식이 빽빽하게 적힌 종이가 나와 블랑세의 키만큼 쌓여 갔다.

오전부터 계속 연구하느라 글씨체도 더 괴발개발해지고 있었다. 결국 꾸벅꾸벅 졸다가 깃펜도 놓쳐 버렸을 때.

“시엘, 시엘!”

“응?!”

블랑세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퍼뜩 깼다.

“좌표 술식을 알아냈어! 이제 재료를 사용하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거야. 내 답이 맞는지 한번 검토해 봐.”

“알았어.”

나는 에카르트가 옆에 다가온 것도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술식을 검토했다.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도 그녀의 공식은 완벽했다.

“대단해, 블랑세! 너는 천재 마법사야. 이제 신전 마법진 좌표를 알아낼 수 있겠어!”

“잠에서 막 깬 모습도 귀엽군요.”

“네?”

나는 블랑세와 말하고 있었는데. 뭐 어차피 다 그와 연관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데 에카르트는 나의 어떠한 모습도 좋은지 찬양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졸음기 하나 묻지 않은 얼굴로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헛기침하고는 정신을 차렸고 나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재료를 사용해 보자.”

“응.”

블랑세가 바닥에 앉아서 지팡이로 술식을 썼다.

술식을 완성하자 글자가 제대로 되었는지 재료와 반응하며 붉은색으로 빛났다. 그 위에 시범 삼아 넓은 잎사귀 한 개를 띄웠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다음 미리 준비한 검은색 돌 하나를 술식 위에 띄우자 빛이 순간적으로 타오르며 주변이 환해졌다.

“이건….”

“맞아. 북부의 자갈이야.”

북부에 어떤 마법이 작동하고 있는지는 직접 확인해야 알겠지만, 가설은 보다 확실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차라리 다른 마법이 있기를 바랐다. 크로덴 가문이 누군가 만들어 낸 균열 때문에 수백 년을 바친 거라면… 에카르트 역시 분노할 테니까.

“에카르트. 만약 북부에 있는 게 균열일 경우.”

당신은 어떻게 하겠어요? 나는 미리 그의 의견을 묻고 싶었다.

“그 망할 균열이 왜 그곳에 있는지 밝혀낼 겁니다.”

“…그래요.”

“엘린. 연구는 계속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의 곧고 굳은 의지의 표현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어떤 위기가 닥치고 무엇이 바뀌든 함께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하며.

“그렇다면 이제 북부로 가는 겁니까?”

“네.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있으니까요. 그곳을 확인해 봐야죠.”

북부는 지도에도 표시하지 못한 크고 수많은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산맥은 안개로 뒤덮여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

뛰어난 마법사들이 안개를 걷히게 하여 그 너머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재해와도 같았다.

“에카르트. 샤사가 준 끈 기억하죠? 수호 신령을 불러낼 수 있다는 거.”

“그 개 말입니까?”

“여우라니까요. 아무튼 마수를 퇴치할 뿐만 아니라… 신령을 불러내면 풍랑을 가라앉히고 흐린 날씨도 맑게 한대요. 안개가 걷히면 그 너머도 확인할 수 있겠죠. 실험 가치는 충분해요.”

“엘린. 당신은 나를 치료할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새로운 시도를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군요.”

에카르트가 벅찬 듯이 말하는 바람에 괜히 민망해졌다.

“그저 우리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인 걸요. 우리란 블랑세를 포함하는 단어에요.”

“정말 당신의 일처럼 생각해 주셔서 기쁩니다.”

내가 뭐라고 하든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블랑세 역시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때 머릿속으로 어떤 공식 하나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만.”

좌표를 해석하자 마법진의 다른 부분도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는 펜을 쥐고 곧바로 술식을 파악해 나갔다. 중심이 되는 원형과 그 옆을 지나는 수십 개의 직선과 곡선들. 기하학적인 패턴. 나는 블랑세에게 원리를 설명했다.

“블랑세. 이렇게 하면 마법진을 해제할 수 있겠어. 그런데….”

그동안 내가 봐 오던 마법들과 달랐다.

일반적으로 해체할 방법을 찾아낸다면 어떤 마법인지도 가늠할 수 있는데 말이다. 내가 머리를 슥슥 쓸어 넘기고 펜을 탁 내려놓았다.

“하아. 역시 직접 가 봐야 알 것 같네. 좌표의 마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확인할 겸.”

“둘로 나눠서 행동해야겠구나.”

“그럼 효율적이겠지.”

…말은 당차게 했지만 막상 블랑세와 따로 행동하려니 불안했다.

홀로 신전 지하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다비온과 사랑까지 포기한 블랑세였다. 무서웠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도 생각났다.

블랑세가 내 걱정을 알아차린 듯이 든든하게 말했다.

“시엘. 내가 신전으로 가서 마법진을 해제할게. 너는 북부로 가서 안개를 걷어 내고 변화를 확인해.”

“…그래.”

“무슨 일이 있거든 공작님께서 전서구도 빌려 주시겠지. 그렇죠?”

“네 편지는 땔감으로 쓸 거다.”

저 남자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블랑세를 싫어하고 싶을까! 내가 에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에카르트. 북부로 바로 갈 수 있을까요?”

“네. 지금 준비해서 가시지요.”

그는 언제 내 친구를 구박했냐는 듯이 천사표로 미소 지었다.

“출전 명령 없이 가도 되겠죠? 하긴 모든 권한은 당신에게 있으니 괜찮겠죠.”

“아. 사실 출전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음? 언제요?”

“어제 오후에요. 엘린과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서, 그놈들끼리 알아서 싸우게 내버려 뒀지요.”

그는 마치 핫도그에 설탕 버무리기를 깜빡했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되냐고요! 그럼 어서 가요.”

“적극적인 모습, 아주 좋습니다.”

이번 북부 출정은 최소 사흘 정도로 예상했다. 아무래도 연구와 실험의 목적으로 향하는 것이다 보니 나름 조용히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카르트가 늑장을 부렸기에 시간이 촉박한지라 결국 다비온이 직접 와서 워프를 준비했다.

아예 북부에 살림을 차리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에카르트는 짐을 챙겼다. 출정을 싫어하더니 이번엔 수학여행을 준비하는 학생처럼 들떠 보였다.

“전에는 몸만 가시지 않았나요?”

“이번엔 당신도 함께 가니까요. 옷과 식재료도 많이 가져가야 합니다.”

“이동 마법진으로 다 가져가려면 재료가 많이 들 텐데. 황태자 전하께 무리가 될까 봐 걱정이네요.”

“엘린.”

그는 내가 입을 옷의 두께를 손수 만져 보다가 말고 정색했다.

“무리하는 건 그 자식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그놈은 우리에게 무릎 꿇고 가 달라고 빌어도 시원찮지요.”

호칭을 정정해 주려던 그때 그는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혹시 엘린의 애착 물건이 있으면 그것도 챙깁시다.”

“애착 물건은 없고.”

나는 연인끼리 할 법한 농담을 건네며 은근히 눈웃음을 지었다.

“사람은 있는데… 에카르트요. 읍!”

그러자 그가 순식간에 내 입을 제 입술로 덮어 버렸다. 놀리려고 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랐다.

“다, 다짜고짜 뭐예요!”

“너무 좋아서요. 그런 말, 다른 사람에게는 하면 안 됩니다.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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