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어머니께서 꽃꽂이를 가르쳐 주었지요.”
“대단해요. 춤도 그렇고 예술적인 감각이 정말 뛰어나셨나 봐요.”
“그러셨습니다. 배워 놓기를 잘했어요. 당신을 떠올리며 다시 하니까… 좋았습니다.”
“…….”
“엘린. 당신이 제 새로운 기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가 내 앞에서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 줄 때가 좋았다. 말끔하고도 짙은 눈썹과 가만히 세어 보고 싶은 속눈썹. 하얗고 맑은 피부. 황금 비율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이목구비가 아닐까.
몸선은 호리호리하면서도 아름답고 좋은 향기가 났다. 붉은 입술은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 입술이 내 입에 닿았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고 간질거렸다.
그리고 내게만 보여 주는 다정하고 섬세한 성격. 솔직한 모습. 정착을 결심하게 만들어 준 신뢰감.
에카르트를 사랑하는구나. 그 누구보다도.
나는 가만히 그의 무게감을 느꼈다.
한편 에카르트와 시엘리나가 다녀간 후. 두 개의 꽃다발이 놓인 묘지 앞에 누군가 꽃다발 하나를 더 두었다.
“편히 쉬시길.”
다비온은 잠시 묵념을 하고 일어났다. 그는 믿을 만한 호위 기사이자 검술 스승인 브록과 함께 매년 묘지를 찾아왔다.
황실로 향하며 브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오늘은… 전보다 조금 편안해 보이십니다.”
“그런가요.”
다비온이 부정하지 않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에카르트가 이곳을 찾을 때면 늘 장례식에서 모습이 생각났죠. 이제는 그의 곁에 좋은 사람이 있어 다행입니다.”
“공작님과 우애가 참으로 깊으십니다.”
“부족한 친구일 뿐.”
그동안 아렌다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고 미리 귀띔해 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비온의 마음에는 이전과 달리 어떤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건 블랑세와 시엘리나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
블랑세의 책상 양옆으로 수십 장의 종이가 쌓여 있었다. 평소에는 시엘리나와 연구실에 있지만 가끔 혼자 방에서 늦게까지 연구를 붙들기도 했다.
‘갈 길이 멀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회귀했다는 비밀을 시엘리나와 에카르트와 공유했다. 그들, 아니, 그녀는 기꺼이 함께 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다비온과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으니 마음 한편이 설레 왔다.
이제 에카르트를 통제하는 대신 모두를 위해 신전의 마법진을 없앨 것이다. 그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블랑세가 연구하는 동안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헬라 역시 공작성을 찾은 손님을 보고 당황했다.
“황태자 전하?”
“안녕하세요. 오늘은… 에카르트가 아니라 블랑세 양을 만나러 왔습니다.”
“…….”
“여기 계시는 거 알아요. 문제 일으키지 않도록 약속하겠습니다.”
다비온 역시 스스로도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발길이 이끌렸을 뿐.
블랑세 역시 놀람 반 의아함 반으로 다비온을 응접실로 들여보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블랑세 양이… 계속 생각나서요.”
진솔한 대답에 블랑세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모든 게 많이 바뀌었는데 이 남자는 어쩌면 이렇게 그대로일까?
“사실 그날 황태자 전하께 마법을 걸었답니다.”
블랑세는 농담 반, 재미 반으로 재치 있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런 블랑세의 적극적인 모습에 다비온이 더 빠져들었다. 그래서 괜스레 시선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방을 둘러보다가 말을 꺼냈다.
“공작성에서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연구하고 있어요.”
“블랑세. 세 분끼리 아는 뭔가를 제게도 알려 주실 수는 없을까요?”
“흐음. 그것보다 우리 둘이 아는 뭔가를 만들어 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블랑세의 장난에 다비온의 말문이 막혔다. 마치 갑갑한 미로 속을 걷다가 드넓은 풀밭으로 나온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블랑세가 쓸쓸한 얼굴이 되어 다시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사실 저는 시간을 거슬러 왔답니다.”
“네?”
“저에 대한 환각을 보셨다면 과거의 아니 다른 세계일 때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 거예요.”
다비온은 블랑세의 말을 전부 믿기 어려웠으나 그렇다 해서 아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환각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환각이라면….”
그래서 에카르트와 똑같은 꾀병을 부렸다.
“블랑세 양은 백마법사이시니 저의 증상을 함께 살펴봐 주실 수 있나요?”
“공작님 친구 아니라고. 남자들은 다 똑같나 봐요.”
속을 들킨 것 같아서 어쩐지 부끄러워진 다비온이었다. 그런 마음 또한 블랑세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다비온은 생각했다. 천사 같다고 말이다. 물론 친구가 듣는다면 욕하겠지만 다비온은 사르르 녹았다.
블랑세가 용기를 내서 먼저 다음 만남에 대한 운을 띄웠다.
“저도… 연구하는 데에 마법 재료가 필요할 것 같네요. 직접 가져다주시겠어요?”
블랑세는 노래하듯 속삭였고 말뜻을 알아들은 다비온의 얼굴은 붉어졌다.
공작성에서 둘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에카르트 역시 헬라에게 다비온이 왔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전부 눈감아 주기로 했다. 시엘리나에게 집착하는 여자를 드디어 치울 기회라고 판단했기에.
어느새 다비온은 고민을 털어놓을 만큼 블랑세를 신뢰했다. 그럼 블랑세는 때론 공감했고.
“소수를 희생해서 다수의 희생을 막는 게 합리적이라고들 말하죠. 하지만 목숨을 단위로 계산할 수 있을까요?”
때론 단호하게 조언했다.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는 건 좋지만 필요할 때 결단을 미뤄서도 안 됩니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둘은 서로에게 스며들어 갔다.
어느 날 다비온은 불쑥 공작성을 찾아왔다. 오는 길에 블랑세를 닮은 하얀 장미를 들고 와서는 멋쩍게 내밀었다.
“이런 재료를 부탁하진 않았는데요.”
“…그냥 드리고 싶어서.”
둘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졌다. 블랑세가 화병에 장미를 꽂아 넣었고 다비온이 진지하게 말했다.
“환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네?”
“블랑세 양의 기억…이 생각날 때 저의 감정은 요동칩니다. 정말 환상이었다면 저는 담담하게 받아들였겠죠. 그리고.”
다비온이 말하기는 조금 멋쩍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블랑세 양이 환상이라고 말할 때 너무 슬퍼 보였어요.”
“아, 아니에요!”
그런 표정을 읽혔나 싶어서 블랑세가 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제가 섣부르게 판단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어요. …제대로 보셨어요.”
블랑세는 다비온을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듯 하얀 장미가 달빛을 받아서 은색으로 예쁘게 빛나며 밤이 깊어 갔다.
***
에카르트와 나는 정원을 걸으며 블랑세의 방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문 화병에 하얀 장미 여러 송이가 꽂혀 있었다.
“엘린, 저것 보십시오. 어제보다 꽃이 한 송이 더 늘었군요.”
“그런가요?”
마검의 지배자라 그런지 눈도 좋았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그는 내 앞으로 가서 등을 보이더니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목마를 태워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봐도 괜찮아요!
그러자 에카르트가 아쉬운 티를 내며 일어섰다.
“아무튼 그놈이 오늘도 오려나 봅니다. 굼벵이와 땅딸보가 어떤 면에서 서로의 매력을 느꼈는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곧 제 숙원 중 하나가 이뤄지겠군요.”
“하하. 저도 둘이 잘 되면 기쁠 것 같아요.”
우리는 분수대로 걸어가 아름답게 흩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봤다. 잠시 한담을 주고받던 그때 물줄기 너머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엘!”
“브, 블랑세! 방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다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나와 크로덴 공작님이 분수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거야?”
“…강물도 아니고? 아무튼 둘 다 알아서 나오겠지.”
그보다 그런 질문은 다비온에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블랑세는 마구잡이를 하듯 억지를 부렸다.
“안 돼, 안 돼. 한 명만 답해야 해.”
“…그럼 나도 그냥 빠질래.”
“엘린, 오답입니다. 저를 구하고 저 여자는 가라앉게 내버려 두셔야지요?”
“시엘, 저 남자 때문에 네 청춘을 포기하지 마!”
둘 다 당연히 자기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도 콩깍지가 쓰인 건지 이제는 그저 귀여워 보였다.
나름 나의 사랑을 확인했는지 블랑세는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바람의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내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작성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음. 결계 너머로 미약한 마력이 느껴져서요.”
“과연 당신입니다. 결계 너머의 흐름까지 읽어 내다니 역시 대단하군요.”
무슨 뜻인가 싶어 내가 눈을 깜빡이자 에카르트는 흡족히 설명했다.
“가끔 공작성을 염탐하려는 놈들이 있지요.”
“네? 아무리 결계가 있다고 해도… 그럼 어떻게 하나요?”
“걱정 마십시오. 기사단과 고용인들이 잘 처리합니다.”
처리라는 단어가 좀 무섭게 들렸지만 나는 저런 첩자들 걱정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크로덴 공작성을 염탐하려고 온 놈이라면 제 팔자를 제가 꼬았을 터였다.
무엇보다 나는 블랑세와 에카르트를 걱정하기도 바빴다. 무조건 살려 두거나 해치지 말라고 강요했다가 오히려 위험해지면 안 되지.
“네. 그냥… 당신은 다치지 말아요. 알겠죠?”
“엘린.”
에카르트는 악행을 저지른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순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나는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크흠,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하고요!”
“그러겠습니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소중하게 키스하는 그의 입술이 여리고 부드러웠다.
***
에카르트는 시엘리나를 귀빈실에 모시고는 첩자를 잡으러 나섰다. 헬라는 에카르트가 보기 드물게 직접 나서서 당황했다.
“공작님. 제게 맡기셔도 됩니다.”
“엘린의 눈에 띈 놈이니 직접 처리하지.”
엄밀히 말하자면 시엘리나는 첩자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얼핏 위화감을 눈치챘을 뿐이지만 그것조차 싫었다.
그녀의 모든 반응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이끌어 내고 싶었다.
“엘린은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만져야 해. 예를 들면 나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