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황실에 루솔릿 공작령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것을 보고하고 돌아온 후. 나와 블랑세는 크로덴 공작성에서 마법진 연구를 이어 갔다.
블랑세가 저주의 목소리를 듣고서 균열이 발생했고, 이전의 에카르트 역시 공통적으로 저주의 목소리를 들은 뒤 마수가 쏟아졌다.
‘그렇다면 지하의 마법진 역시….’
확신할 수 없지만 균열과 관련됐다고 가설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발동하는 마법이 무엇이든 그 위치가 수도는 아닌 것 같았다. 며칠간 수도를 둘러본 결과 결계 마법 외에는 영향을 안 받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은?’
나는 자작령의 교역로도 바로 이상함을 눈치챘으니 희박한 확률이었다.
“블랑세. 마법진에서 가장 빠르게 분석할 수 있는 부분이 뭘까?”
“으음, 좌표?”
“좌표.”
“중앙 마법진을 제외하고는 전부 공통된 무늬가 있어. 아마 그 부분이 좌표로 추정되는데. 이중으로 암호화됐지만 빠르면 며칠 내로 해독할 수 있을 거야.”
“좋아. 그럼 필요한 재료는 미리 구해 두자.”
“응!”
재료는 각 지역의 흙, 나뭇잎, 자갈, 물방울 등의 물질이었다.
해독한 술식은 그 지역의 자연물과 반응하므로 우리는 제국을 8방위로 나누고 유의미한 반응이 나오는 지역을 세부적으로 분류하기로 했다.
“좌표 분석이 끝나면 직접 그곳으로 보러 가야겠어.”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쉴까?”
“그래. 고생했어, 시엘.”
“너도.”
한숨 돌리며 기지개를 켜자 맞은편 책상에서 에카르트가 서류를 덮고 일어났다.
“엘린, 고생했습니다. 이제 목욕물을 받아 놓을까요?”
“그걸 대체 왜 공작님이 하시죠?”
블랑세가 따지자 에카르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처럼 미덥지 못한 여자에게 시키나?”
“됐어. 그냥 내가 마법으로 받으면 되니까.”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둘은 대놓고 시무룩해졌다.
지금쯤에서 집착남과 집착녀에게서 나를 보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슬슬 연구실을 벗어나려 했다.
한데 오랫동안 펜을 잡고 있었더니 목과 어깨와 손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뻐근해진 목을 문지르니 블랑세가 슬며시 손을 잡고는 은근하게 물어보았다.
“아파? 내가 마사지해 줄게.”
“아니, 괜찮-”
그러자 에카르트 역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제가 하지요. 마사지와 목욕 시중 모두 같은 사람에게 받아야 편합니다.”
“전부 나한테 맡겨!”
“나 정말 괜찮-”
내가 아무리 사양해도 둘은 이미 내 팔 한쪽씩 붙잡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만! 블랑세, 정말 하고 싶어?”
“당연하지, 시엘. 네 몸은 내가 잘 알잖아.”
“그게 무슨! 에카르트, 정말 해야겠어요?”
“물론입니다. 저 말고는 다른 놈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실 정도로 극진히 모시지요. 틀림없이 좋아하실 겁니다.”
나는 이대로 인대가 늘어나기 전에 급히 대책을 마련했다.
“그럼 왼쪽은 네가 맡고 오른쪽은 에카르트가 맡는 게 어떨까? 끝나고 나도 둘에게 피로 회복 주문을 걸게.”
“한 명에게만 걸으시지요. 둘 중 더 잘한 사람에게만 말입니다.”
“나도 찬성이야.”
그렇게 갑자기 내 피로 회복 주문을 보상으로 걸고 승부가 벌어졌다.
최대한 빨리 자유를 되찾기 위해 나는 순순히 연구실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블랑세가 쿠션을 들고 말했다.
“시엘. 앉아서는 제대로 할 수 없잖아.”
대꾸할 틈도 없이 나는 이마와 가슴 쪽에 적당한 높이의 쿠션이 받쳐진 채 엎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곧바로 마사지가 아닌 고문이 시작됐다.
“어억!”
“아악!”
나는 어깨와 등이 눌리는 대로 비명을 질렀다.
“시엘! 어느 쪽이 더 시원해? 나지?”
“많이 뭉치셨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저겠지요.”
그러다 블랑세의 손이 귓가 부근에 닿았고 나는 간지러워서 움찔했다.
“엘린! 저 여자가 감히 합의하지 않은 부분을 만졌습니다.”
“그, 그럴 수도 있죠.”
“그래요? 그렇다면 저도 만지죠. 저 여자에게만 몸을 허락하는 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블랑세는 동성이고 에카르트는 이성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우리에게 해당 사항이 없었다. 역시 처음부터 마사지를 빙자한 허튼짓이었으리라.
내가 됐다며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한쪽 어깨에 부드러운 손이 올려졌다.
“시엘. 아직 충분히 안 풀어 줬다고.”
“네. 갑자기 일어나시면 어지러울 겁니다.”
하필 이럴 때면 죽이 잘 맞아서 나는 도로 엎드려지게 되었다.
“이제 그만해도 돼요!”
“아뇨. 당신의 몸은 더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쪽도 풀어 줘야 해. 아직 너무 단단하잖아.”
그러고는 블랑세가 예고도 없이 다시 예민한 목선 부위를 훑었다.
“흐흑!”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틈 사이로 책상 근처에 서 있는 헬라의 모습이 보였다.
“헤, 헬라?”
“그… 요청하신 재료를 갖고 왔습니다만. 책상에 두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나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채 문을 닫아 주었다. 아무래도 헬라가 또 오해할 상황이 생긴 모양이었다.
“저리 가. 둘 다 치료 안 할 거야!”
나는 벌떡 일어나서 쿠션으로 블랑세와 에카르트를 한 번씩 퍽 소리가 나게 쳤다.
“시엘!”
“엘린!”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방으로 대피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에카르트와 블랑세에게 지압받은 이곳저곳이 쑤시기 시작했다.
“으으.”
“공녀님! 왜 그러세요?”
“그냥 좀 무리했나 봐요.”
“그럼 제가 마사지를 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제 마사지라면 절대 사양이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니나가 향초에 불을 붙이는 사이 나는 협탁 옆의 달력을 흘긋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에카르트와 블랑세와 함께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마사지를 너무 힘들게 받은 모양이었다.
좋은 일. 힘든 일. 미친 일을 떠올리며 감회가 새로울 때.
내일이 무슨 날인지 퍼뜩 생각이 나서 눈을 떴다. 에카르트에게 몹시 중요한 날이었다.
“니나. 내일… 선대 공작 부부의 기일이던가요?”
작년 이맘때쯤 에카르트를 만났을 때 그는 기분이 저조해 보였다. 원작에 나와 있던 일화는 아니었지만, 그다음 날이 선대 공작 부부의 기일이었다는 걸 우연히 신전에서 듣게 되었다.
“네, 맞아요.”
니나의 표정 역시 진지해졌다. 아무래도 공작가의 고용인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에카르트가 매년 선대 공작 부부의 기일에 묘소를 찾는다는 것을.
“에카르트가 묘소를 찾을 때 고용인들과 동행하나요?”
“아뇨. 늘 마부만 데리고 가셔요.”
“…늘 혼자 보냈던 거군요.”
매년 그래 왔다고 생각하니 문득 마음이 안 좋았다. 내가 에카르트와 블랑세의 곁에 남기로 결정했다면 그들의 중요한 날에 함께할 의무도 있는 거겠지.
“니나. 혹시 모르니 내일 입고 갈 만한 옷을 준비하겠어요? 격식에 맞는 것으로요.”
“어머. 공작님과 같이 가시려고요?”
“에카르트가 허락한다면요.”
“공작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럴까요?”
“저도 가끔 언니들과 함께 부모님을 찾아가거든요. 묘지 앞에 꽃을 놓으며 우리가 얼마나 자랐는지 들려드리곤 하죠.”
니나의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구나. 나는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다가 여러 감정을 배제하고 말했다.
“항상 니나를 지켜 주고 계실 거예요.”
“고마워요! 아이, 상냥하셔라. 옷은 지금 준비할게요.”
에카르트가 원할지 원하지 않을지 알 수 없지만, 날이 밝는다면 그의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에카르트가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분위기로 일찍 나를 찾아왔다.
“엘린. 오늘은 잠시 제가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저 없는 사이에 그 여자가 혹시라도 허튼짓을 하려고 든다면… 이것을 사용하십시오.”
에카르트가 긴 막대처럼 생긴 호신용 마도구를 보여 줬다.
혹시나 하고 시험 삼아 창문을 열고 사람이 없는 수풀 쪽을 향해 버튼을 눌러 보니, 그 자리는 잠깐 빛이 번쩍하다가 땅이 패이고 재만 남았다.
“사양할게요. 그보다 에카르트.”
나는 이 위험한 마도구를 일단 고이 거절하고는 말했다.
“오늘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같이?”
“…묘소에 가시는 거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잠시 후 내 말뜻을 알아차린 에카르트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그럼. 저도 빨리 준비를 마칠게요.”
나는 어제 니나가 준비한 옷을 입기로 했다. 화려한 장식이 없는 단정하고 짙은 색상의 드레스였다.
그 이후는 에카르트가 평소처럼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
선대 크로덴 공작을 비롯한 전쟁 영웅이나 제국에 큰 기여를 한 위인이 작고하면 황실에서 지정한 묘소에 안치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수도의 묘소로 향했다. 묘소 근처에 간판이 단출한 꽃가게로 잠시 들렀다.
에카르트와 함께 들어가자 가게 주인은 미리 준비한 듯이 싱싱한 꽃다발을 건넸다. 아마 묘지에 둘 꽃다발이겠지.
나는 진열된 꽃을 둘러보다가 그의 꽃다발을 참고해 색상이 화려한 꽃 몇 송이를 골랐다.
“저도 당신의 부모님께 드리려는데 좋아하실까요?”
“그럼요. 제 마음에도 듭니다.”
나는 주인에게 내가 고른 꽃으로 하나를 더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에카르트가 값을 치르고 완성된 꽃다발을 받아 들려고 했지만, 나는 먼저 돈을 내밀고 꽃다발도 재빨리 쥐었다.
선대 공작 부부의 묘지는 나란히 놓여 있었다. 차분한 바람이 불어와 잔디가 같은 방향으로 흔들렸다. 에카르트와 석판 앞에 경건한 눈빛으로 무릎을 꿇고 꽃을 내려놓았다.
“…….”
“안녕…하세요.”
나도 꽃다발을 두고는 에카르트와 함께 천천히 일어섰다.
“부모님을 지켜 드리지 못해서 여전히 마음에 걸립니다.”
“당신은 보호받아야 하는 나이였어요.”
“평생을 저주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셔서….”
“그래도 당신이 있어서 행복한 순간도 있었을 거예요.”
내게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는 그의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 말했다.
“에카르트. 저는 부모의 마음을 잘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알아요. 당신이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라시겠죠. 그러니 좋았던 일은 좋았던 일로 기억해 주세요.”
그러자 누구보다도 강하고 나에게만 약한 사람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공작성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에카르트는 부모님과 관련된 좋은 추억들을 하나씩 나에게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