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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77화 (77/115)

#77화

“아…. 뭔가요?”

“저녁 식사를 가져왔어!”

“이미 먹었습니다만.”

외출복 차림의 리타는 한 손에 검은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엥. 어디 가려구?”

“근처에 사러 갈 게 있어서요. 아버지께는 비밀로 해 주세요.”

“아! 아빠 생신 선물?”

리타는 그런 일정 따위 잊고 있었지만 지금은 라멜을 떼어 내기 위한 핑계로 사용했다.

“네, 뭐. 적당히 상가를 둘러볼까 해요.”

“곧 영업이 끝나는 시간인데… 하긴 네가 오면 닫았던 문도 다시 열어야지! 나도 같이 갈까?”

“누님이요?”

“응. 네가 아빠를 챙겨 주니까 기뻐서. 우리 가족 취향은 내가 잘 알잖아~”

라멜은 기분이 좋아져서 남동생에게까지 애교를 부렸다.

“괜찮습니다. 혼자 가고 싶어서요.”

“아…, 그래?”

“일찍 돌아올게요.”

“그럼 잘 다녀와. 밤길 조심하고. 마차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까?”

“아뇨. 제가 알아서 하게 두시죠.”

어쩐지 리타가 자신을 밀어내는 기분이 들었다.

티파티에서 시엘리나에게 밀리고 이젠 동생까지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으니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러면서도 라멜은 미움받고 싶지 않아 도로 쟁반을 들고 돌아갔다.

그런 누나를 보며 동생인 리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뭘 안다고. 애교 떠는 것밖에 못 하는 주제에.’

리타는 빠른 걸음으로 공작성을 빠져나가 경비병이 없는 사각지대를 찾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검은색 가발을 꺼내 썼다. 존재감을 옅게 만드는 작업 몇 가지를 마친 후 마을로 향했다.

공작령은 교역로 개발이라는 중대한 사업을 맡았지만 그간 전혀 진척이 없었음은 물론 여러모로 내부 상황이 좋지 못했다.

광산이나 특산품 등의 자원도 없는 와중 작년에는 해충 피해로 농사까지 망쳤다.

구휼미를 풀려고 했으나 창고가 비어 배급도 이뤄지지 않았다.

리셀이 사치를 부리기 위해 구휼미까지 손을 댄 탓이었기에, 제대로 된 전수조사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 덕에 점점 공작령을 이탈하거나 거리에 나앉는 주민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리타는 지하의 힘을 연구하는 데에만 파고들었다.

변장한 리타는 무표정하게 마을을 지나 외진 길목까지 도착했다. 그곳에 며칠간 마을을 보며 점 찍어 둔 걸인이 있었다.

‘저자다.’

무연고자에다가 정해진 곳 없이 이곳저곳 떠도는 남자.

처지도 딱 적합했지만 무엇보다 시엘리나를 연상케 하는 금갈색 눈동자가 딱 마음에 들었다.

“실례합니다.”

리타는 마치 초면인 것처럼 그를 향해 다가갔다. 걸인의 옷차림은 너덜너덜한 데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취도 났다.

“뭐요?”

“혹시 이 길을 아시나요?”

리타는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렇다만.”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초행이라 혼자 다니기는 불안하기도 하고요. 사례는 하겠습니다.”

“좋소.”

걸인은 사례라는 말에 혹해서 흔쾌히 답했다.

‘사례라! 얼마나 하려나?’

리타의 옷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꽤 좋은 작물로 만들었고 피부가 희며 손톱 아래도 깨끗한 거로 미뤄 보아 최소한 중산층은 되어 보였다.

“당신, 외지인이오?”

“네. 동부 지역으로 가는 길에 공작령에서 잠시 쉬게 되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치안이 걱정돼서요.”

“하긴, 영지 꼴이 이런데 불안할 만하지. 시엘리나 공녀가 와서 도적 떼를 소탕해 주면 뭐 하오!”

“…….”

“정작 후계자라는 놈은 마법 대회에서 털리고 은둔 중이라는데. 교역로 사업도 이러다 흐지부지되게 생겼소.”

걸인이 리타의 정체도 몰라보고 영지 사정이 참 복잡하다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리타 역시 유감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따라오시오.”

“부탁드리죠.”

남자는 앞장서서 안내하다가 일부러 복잡한 길로 들어섰다. 뻔한 수작임을 알면서도 리타는 순순히 따라갔다.

“흐음. 생각보다 더 멀군. 아무래도 돈을 더 받아야겠는데.”

“어쩔 수 없죠.”

“돈이 많은가 보군. 부럽게시리.”

남자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유인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리타를 벽으로 밀치고 순식간에 돌변했다.

“죽기 싫으면 가진 거 다 내놔!”

아무 무장도 안 한 순진한 외지인을 상대로 돈을 뜯을 기회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물론 리타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웃어?’

리타가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순간 남자의 눈앞이 순간적으로 번쩍 빛났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두 시간 후. 남자는 간신히 눈을 뜨고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붉은 머리카락? 그렇다면….’

리타가 착용한 검은색 가발은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긴 책상 위에는 불길한 색의 액체가 담긴 병, 여러 상자와 종이 뭉치가 잡다하게 놓여 있었다. 창문은 전부 막혔고 희미하게 일렁이는 막이 벽을 감쌌다.

남자의 옆으로는 걸인 대여섯이 침대에 묶여 있었다.

‘도나, 제이미, 칼! 요즘 안 보이더라니 어째서 이런 곳에.’

기겁한 남자는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더 둘러보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달았을 때.

리타가 뒤를 돌아 남자와 마주했다.

“정신이 듭니까?”

“대, 대체….”

붉은색 머리에 은색 눈동자의 얼굴. 남자는 그제야 겨우 리타의 정체를 알아보고 격하게 발버둥 쳤다.

“하류 인생답게 덤빌 사람과 덤벼선 안 될 사람도 구분하지 못하더군요.”

“고, 공자. 살려 주시오!”

“품위도 전혀 없군요.”

남자는 리타를 만난 순간부터가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리타가 마치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듯 말했다.

“당신 역시 세금도 제대로 안 내던 거지 해충 아닙니까. 그동안 무료로 영지에서 지냈으면 대가를 받아야죠.”

“개소리 마! 풀어 줘, 이 미친놈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리타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당신은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게으르게 살아온 인간에게 딱 맞는 일이죠.”

리타는 남자의 얼굴에 투명한 반원으로 된 뭔가를 씌웠다.

책상 위의 상자와 긴 줄로 연결된 호흡기였다. 어느새 검은 안개가 줄을 타고 흘러들어 와 호흡기 안에 가득 찼다.

“이, 이게 뭐야!”

“해충이 질문이 많군요.”

낯선 공간, 높은 사람.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상황.

그 모든 게 숨 막힐 듯한 공포로 다가왔다. 남자가 본능적으로 숨을 참아 봤지만 결국 안개를 들이마셨다.

남자의 반응을 기다리며 리타는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

리타는 일전에 수상한 안개를 얻은 수도의 대신전을 찾았다. 이번에도 가발로 변장한 그는 그때 체닐을 알던 신관을 다시 만났다.

리타는 꿍꿍이를 숨기고 신전을 한번 둘러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 번 체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신관은 그를 반기며 신전을 안내했다.

“신전은 정말 넓죠. 가 보고 싶은 장소가 있나요?”

“네. 어렸을 때 길을 잃었던 곳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가 보고 싶어요.”

리타가 거짓말을 둘러대도 신관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후후 웃었다. 리타는 일부러 안개가 있던 지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관님. 저쪽은 어떤 공간인가요?”

“저쪽 말이죠. 창고랍니다.”

“그렇다면 고서를 보관한다거나.”

“아, 서재는 따로 있어요. 여기는 먼 옛날에 마검이 있던 장소에요!”

“마검?”

“네. 크로덴 공작님을 들어 보셨나요?”

“조금은요.”

“역시 여행자분들도 대부분 공작님을 알더라고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시피 한 분이죠.”

신관은 제국민이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역사를 설명했다.

먼 옛날 마수들이 균열에서 쏟아져 나왔을 때, 누구도 마검의 힘을 깨워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초대 크로덴 공작이 검을 각성시켰으며 그 능력은 크로덴 공작가에 대대로 전해졌다는 뻔하고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 안개는 마검에 남아 있던 힘인가?’

리타는 그런 의문을 품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마검은 에카르트가 사용 중인 데다, 이전에도 신전에 왔을 때는 정체불명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혹시 저 안까지 구경할 수 있을까요?”

“네. 어차피 볼 건 없겠지만요.”

신관은 순순히 리타를 지하로 안내했다. 그러나 이전의 수상한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후 리타는 계속 안개의 성분과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직접적인 실험을 통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물론 황실의 허가를 받지 않은 실험은 불법이었지만.

‘이런 위대한 실험을 두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건 멍청한 짓이지.’

원작에서도 그는 같은 방식으로 별의 꽃의 힘을 증폭시켰다. 지금의 리타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건만 다른 방향으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저 그는 하루라도 빨리 시엘리나보다 강해지길 원했다.

치욕을 준 것도 모자라 자신의 미래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무시하던 그 해충.

이 힘의 정체를 파악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가능하리라!

그것만이 가능한 방법이라 생각한 그는 이제 목표를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

실험체의 피부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리타는 상대가 얼마나 괴로워 하는지는 무시한 채 오직 호기심과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관찰했다.

“어떻습니까?”

“…….”

“말을 할 수 없나보군요. 힘을 더 주입할 수밖에.”

곧 남자의 몸에는 문신처럼 수상한 표식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빌어먹을 연구에 진전이 생겼다! 환희와 감동이 리타를 오싹할 만큼 전율케 했다.

“당신, 다른 사람과 뭐가 다른지 좀 알아야겠어요!”

“그, 그마안!”

한동안 날카로운 비명이 계속 들렸다.

실험 결과 남자에게는 특별한 능력도 마력도 없었다. 그저 다른 이보다 더 체력이 좋고 젊을 뿐.

‘생명력이 더 강한 숙주가 필요했나.’

리타는 그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물건과 같은 재료로 보고 있었다.

여태 실험에 성공할 만큼 품질이 따라주지 못했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공작령에서 더 찾아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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