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큰 키와 탄탄한 체격이 눈앞에 가득하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엘린. 저는 황후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당신과 교제하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이 틈을 타서 당신을 설득해 볼까 했지요.”
“그 뜻은-”
“당신을 좋아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꽃밭 사이에 서 있는 느낌이다. 그가 내 손을 붙잡자 가슴이 더 빠르게 뛰었다.
내심 고백을 기다려 왔을까.
“사람들은 저를 악마의 환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신은 그래도 저의 치료를 계속 맡아 주었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볼 때마다 가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말과는 다르게 내 손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래도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나쁜 생각이라니.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죠?”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아, 네. 그럼 감금하고 싶다거나.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싶다거나?”
“계획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습니다. 어쨌든, 연인 사이에서 할 법한 일을 생각했지요.”
“그럼 뭐… 뽀뽀나 포옹 같은 거요?”
“…정말 순수하시군요.”
붉은색 눈동자에는 약간의 죄책감이 담긴 것 같았지만 나를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 역시 에카르트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도 마음은 그대로였다.
“에카르트.”
“엘린.”
“저에게 당신은 에카르트 크로덴이고 내가 아끼는 한 남자예요.”
이제는 서브 남주도, 마검의 지배자도, 흑막도 아닌. 아끼는 존재 그 자체 말이다. 조금은 민망한 이야기 같아서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리고 저도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고요.”
“…아.”
내 고백을 듣고 그가 진심으로 안도한 듯이 웃었다. 눈은 벅차오른 것처럼 반짝였고,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에카르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그가 행복하길 바랐는데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기분 좋은 느낌이 우리를 감쌌다.
“엘린. 저는 이날을 위해 살아왔나 봅니다.”
“…당신의 마음을 확인받을 때마다 좋았고 지금도 그래요.”
“그렇다면.”
에카르트의 눈빛이 번뜩였다. 머릿속으로 경보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아까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마냥 순수하더니. 순식간에 마성을 드러내며 돌변한 에카르트가 손을 쫙 펴더니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더 확인합시다.”
“네? 뭐, 뭐를요.”
갑자기 들어 올려져 놀랐지만 탄탄하게 나를 받쳐 주는 그 느낌은 싫지 않았다.
떨리는 호흡과 세상에 오직 나뿐인 것 같은 눈빛.
곧고 오똑한 콧날과 홀릴 것 같은 예쁜 입술과 날렵한 턱선.
“설마 마음만 확인하고 싶었습니까?”
“아아! 그게….”
아무리 연애를 안 해 본 나라고 해도 지금 이 분위기에 무엇을 할지는 알았다. 아마도 가벼운 입맞춤일 것이다.
“사실 제가 처음이라서요.”
“저도 처음입니다. 다행이군요.”
“그, 그럼.”
시엘리나가 묘한 기대를 품고 눈을 감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모습을 보며 에카르트는 묘한 죄책감과 쾌감이 동시에 들었다.
‘사랑스럽고 순수한 사람.’
그녀와 함께할수록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내가 좋은 연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끔 다가가기 망설여지다가, 결국은 다시 물밀듯이 충동이 들었다.
에카르트는 더 이상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앞으로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여자였으니까. 하얀 살결에 아예 제 이름을 새기고 싶을 정도였다.
에카르트의 붉은 입술이 시엘리나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자 시엘리나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둘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부드럽고 좋아.’
그녀의 순수한 모습이 에카르트의 욕망을 자극했다.
아니. 그녀가 능숙하면 능숙한 나름대로 충동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저 시엘리나의 존재 자체가 그의 본능을 꿈틀거리게 했다.
“엘린. 더 해도 됩니까? 한 번으론 만족할 수가 없군요.”
“네?”
“감사합니다.”
물음표를 느낌표로 멋대로 해석한 에카르트는 아까보다 더 격정적으로 입을 맞춰 왔다. 혀가 입술 사이를 훑자 시엘리나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밀어내는 대로 함께 움직였다. 힘이 빠져나가는 듯이 나른하면서도 좋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왜… 왜 이렇게 잘하세요? 처음…일 텐데.”
그래서 그런지 입술을 떼어 낸 후에는 바보 같은 질문이 나왔다.
“말했잖습니까. 나쁜 생각을 많이 했다고.”
“그, 그게 이런 생각이었군요.”
시엘리나가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말하자 에카르트는 그녀를 한 품에 껴안고 웃었다.
“네. 저, 엘린이 정말 좋습니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너무 밀착한 느낌이 들어 시엘리나는 슬그머니 그의 품을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두 팔과 다리뿐이었다. 한 번 더 버둥거리자 에카르트가 마지못해 그녀를 놓아주었다.
“확신을 가지실 수 있도록 제가 잘해 보겠습니다.”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시엘리나가 눈을 굴리며 의문형으로 말했다가 이내 손을 꼭 쥐고 파이팅을 했다.
“음. 잘 부탁드려요.”
에카르트는 그런 의지 있는 모습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제길!’
에카르트 자신의 손에 의해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제 입술과 맞닿은 붉은 입술.
항상 쥐고 싶은 가녀린 손.
이 순간 시간을 멈추고 싶을 만큼 좋았다. 아끼고 조심스레 대해야겠다는 다짐이 위태로워졌다.
에카르트는 다시 시엘리나를 끌어안고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예 약혼, 아니, 결혼으로 공표하면 어떨까요.”
“일단 심호흡해요.”
그러자 에카르트는 시엘리나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 향기를 맡으라는 게 아니었는데. 난감한 시엘리나는 그를 다독이며 말했다.
“진정…이 되나요?”
“아뇨.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군요.”
에카르트는 진정으로 시엘리나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어졌다. 전부터 바라던 일이었다.
이 아름다운 사람의 손에 결혼반지를 끼우고, 가족이 되어야 안심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덜컥 부담을 느끼면 다시 달아날지 모르니까. 천천히 속박하되 절대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
다음 날. 다비온은 다시 공작성을 찾았다.
문득 창문을 쳐다보니 은발 머리카락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블랑세?’
그쪽을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에카르트와 시엘리나가 문 앞까지 마중을 왔다.
둘은 누가 떼어 내기라도 할세라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것이 멋쩍은 시엘리나가 한번 손을 빼려고 했지만 에카르트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감싸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어제부로 교제하기 시작했다.”
“그래… 축하해. 축하합니다, 공왕님.”
“그렇고말고.”
“감사합니다.”
세상을 얻은 듯이 싱글벙글하는 에카르트를 보자, 다비온은 놀리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다. 수도에 한 번만 다녀와도 제국에 소문이 파다하게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크로덴 공작께서 또 마검을 소환하거나 무서운 수신호를 할지 모르는 일.
“수도에 한번 다녀오면 어때? 모두 교제 사실을 납득하겠지만. 그래도 공개적으로 둘의 사이를 보여 주면 더 좋을 거야.”
그러자 에카르트가 히죽 웃었다.
“공개 데이트를 하라는 뜻이군.”
“…그래.”
“데이트라! 하하. 엘린, 우리 데이트를 합시다.”
“아, 네. 데이트를 하네요?”
시엘리나가 했던 말을 한번 되풀이하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그녀의 손에 마구 입을 맞췄다. 생각보다 팔불출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 역시 입꼬리가 멋대로 올라갔다.
“황태자. 들었지? 우리 공왕님께서 데이트라고 하신다.”
“진정해요.”
시엘리나는 엄한 표정을 지으려 해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 다비온은 찬물을 들이켜고 싶을 지경이었다.
둘은 서로에게 푹 빠져 있었다.
막 연애를 시작한 남녀의 풋풋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에카르트는 살기 어린 아우라를 내뿜는 대신 슬라임처럼 흐물흐물하고 말랑말랑해졌다.
“공왕. 전에 드렸던 워프 마법 재료는 다 사용하셨는지요? 그렇다면 다시 드리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전하!”
시엘리나에게 필요한 재료를 전해 주고 다비온은 공작성을 떠났다. 뭔가 미련이 남은 듯이 아까 블랑세가 보였던 창문을 흘긋 보고서.
***
나는 수도로 떠나기 전에 에카르트와 함께 블랑세를 찾았다. 블랑세는 영상석을 보며 마법진을 연구하고 있었다.
“블랑세. 다비온 황태자 전하가 다녀가셨는데.”
“응. 아까 창문으로 봤어.”
“나는… 공작님과 수도에 다녀올까 해.”
“잘 다녀와.”
막상 그녀를 보니 귀여운 강아지를 집에 두고 가듯 마음에 걸렸다. 왠지 마법진 연구도 같이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말이다.
내가 에카르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싫습니다, 엘린. 저 여자는 빼고 우리 둘만 갑시다.”
“어차피 제가 미행하면 돼요.”
블랑세는 마법진을 정리한 종이를 한번 들여다보다가 내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시엘에게 연애 경험이 없는 것보다, 한 번은 있는 게 나와 사귀기 좋을지도 모르지.”
“세상에.”
내가 할 말을 찾지 못하자 에카르트는 가소롭다는 듯이 대꾸했다.
“개소리를 하는군. 엘린의 연인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시엘. 사귀다가 영 아니다 싶으면 나한테 돌아와. 나는 네가 좀 더 절륜해져도 환영-”
“고마워, 블랑세. 올 때 맛있는 거 사 올게. 가요, 에카르트!”
에카르트는 아슬아슬한 농담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잠깐 마검의 실루엣이 보일 뻔했으니까. 나는 둘이 다시 티격태격하기 전에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
우리는 공작성 마차를 타고 수도 광장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파티장이 아닌데도 이목이 집중됐다.
그의 훤칠한 체격을 잘 드러내는 고급스러운 옷차림, 옆으로 대충 쓸어 넘겨도 멋스러운 검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는 눈에 확 띄었다.
별다른 변장을 하지 않았기에 모두가 에카르트를 알아봤다.
말은 못 걸어도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일단 실물에 감탄해서 홀린 사람 반. 나머지는 겁을 먹거나 호기심을 가졌다.
“하아.”
그러자 그가 못마땅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엘린. 다들 당신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는군요. 당신에게 변장용 망토를 씌우고 싶지만… 아무래도 땅을 새로 사서 우리만 출입할 수 있는 상업 지구를 만드는 게 낫겠군요.”
“음. 제가 아니라 당신을 보는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