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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70화 (70/115)

#70화

“아아. 저는 마법사라서 보시는 것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리타는 이미 준비된 대답을 했다.

기실 마력이 많은 일부 마법사는 노화가 더디게 진행된다. 대답이 된 신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했다.

그 신관은 무엇보다 체닐을 찾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가움이 더 컸다.

“아. 체닐 님은 저도 많이 도와주셨지요.”

신관은 청소를 함께 도왔다든가, 맛있는 음식을 양보했다거나, 그런 사사로운 미담만을 말했다.

“하지만 체닐 님을 만나진 못하실 거예요. 그분은 오래전에 신전을 떠나셨거든요.”

신관은 부고 소식을 전하는 대신 말없이 눈물을 삼켰다. 리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그랬습니까?”

“네. 혹시 시엘리나 공녀를 아시나요?”

“아뇨. 모릅니다만.”

“체닐 님의 따님이세요. 그분의 하나뿐인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백마법사가 되었다는데, 운이 좋다면 수도에서 만나실지도 모르겠어요.”

“백마법사라… 혹시 체닐 님께 성력이 있었나요?”

“그건 저도 몰라서, 그분이 백마법사가 되었단 소식을 듣고 놀랐답니다.”

신관의 대답에 리타의 눈썹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체닐이 그렇게 눈에 띄는 실력이 없었고, 능력이 개화하지 않았다면…. 결국 시엘리나가 천재였다는 말인가! 그는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캐내기 위해 질문을 이어 갔다.

“유감이네요. 혹시 말입니다. 체닐 님과 가까웠던 분은 없나요?”

“신전을 떠나실 때쯤엔 조금 겉돌으셔서… 그래도 방명록을 살펴보고 올게요. 보여 드리진 못하지만요.”

신관은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고, 리타는 고맙다고 답한 후 생각했다. 저렇게 신관처럼 아무 대가 없이 봉사하는 삶은 그의 방식과 전혀 맞지 않았다.

‘그 멍청한 성격도 신관인 어미에게서 물려받았나.’

마법 대회에서 시엘리나가 부상당한 여자 앞에서 끼어들던 장면이 떠올랐다. 가뭄이라서 물을 소모하는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훈수를 늘어놓은 것도.

‘웃기지도 않는군.’

본디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제 아버지는 어머니를 취했고, 제 누이 역시 사랑에 집착하며, 자신은 강한 힘을 얻고 싶다. 한데 남들 따위는 알 게 뭐란 말인가!

잠시 시엘리나를 회상한 사이 신관이 정갈한 걸음걸이로 돌아왔다.

“찾아봤는데요. 제적당한 신관의 기록이나 방명록은 전부 소각했답니다.”

“…….”

“체닐 님을 기억하는 분이 있다니 너무 반가워요. 저도 할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하지만, 오시면 가끔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리타가 궁금한 건 그녀의 생애가 아니라 성력이었다.

별 소득 없이 발걸음을 돌리려니 짜증이 났다. 그가 짧게 욕설을 중얼거리던 그때,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로 와. 내가 부르는 곳으로.”

사람이 아닌 듯 기묘하고도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게다가 가까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라지고 남은 흔적 같았다.

‘…정령인가?’

리타가 그 소리를 듣자 곧 신비한 힘도 느껴졌다.

리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소리를 따라 지하로 향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장소에 실망하였다. 그는 숨겨진 계단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상한 기운이 감도는 공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리타는 얼른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서 안개를 담았다.

비록 성력은 아니었으나 그가 원하던 힘 같았다.

***

우리는 마차를 타고 공작성으로 향했고 그동안 나는 앞으로 할 일을 떠올렸다.

‘지하의 마법진을 풀어봐야 해. 그 힘이 남아 있는 이상 안심할 수 없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사이 다른 사실 한 가지가 신경 쓰였다.

이전에는 내 양옆을 어떻게든 독차지한 둘이, 이제는 서먹하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둘의 눈치를 흘금 살폈다. 그러자 둘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 내가 불편하게 느껴지나?’

어느덧 마차가 공작성에 도착했다. 에카르트는 평소처럼 먼저 내려 내 손을 잡아 줬다. 하지만 그의 호의는 딱 그뿐이었다.

마차가 정차할 동안 그 주변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맴돌던 니나는 내가 내리자마자 와락 안겼다.

“공녀님, 저 잠도 못 자고 기다렸어요!”

“그, 그래요?”

“네에. 공녀님도 주인님도 블랑세 양도 안 계시고!”

밤새 잠을 못 잤는지 눈가가 붉은 니나였다. 니나가 안은 바람에 혹시나 해서 에카르트를 흘긋 봤지만, 그는 아예 내가 있는 쪽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니나는 우리들 사이에 그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지 곧바로 나를 욕조로 직행시킨 후 먼지가 묻은 옷을 가져가고 새 옷을 내왔다.

목욕을 마치고 나는 슬쩍 문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혹시… 저 목욕하는 동안 아무도 안 왔나요?”

“네.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분명 평소대로라면 이 자리에 블랑세나 에카르트 한 명 정도는 있는 게 자연스러운데. 나는 고개를 젓고 문을 닫고는 터덜터덜 침대에 걸터앉았다.

둘은 내게 일정한 선을 그은 것 같았다.

종일 손을 잡고 다녔을 에카르트는 내가 계단에서 넘어질 뻔하자 한번 붙잡아 주는 거로 끝났다. 블랑세도 유난히 말이 없었다.

한때는 둘이 집착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나에 대한 애정이 식었을까 봐 걱정되잖아.’

나는 소파에 침울하게 쭈그리고 앉아 니나에게 슬쩍 고민을 털어놓았다.

“니나. 혹시 가까운 사람이 그동안 정체를 숨겨 왔다면 곤란하겠죠?”

“…공녀님.”

니나는 잠시 신중히 생각하다가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공녀님이 숨긴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몰랐던 거예요.”

“네?”

“공녀님께서 어떤 분이든 상관없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스스로의 행복이 더 중요해요. 물론 범죄만 아니면!”

미리 준비한 대사처럼 니나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부었다.

“그러니 만약 안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되거든 한 귀로 흘려듣고 꽃길만 걸으세요.”

“혹시라도 정체를 알게 된 후에 더 멀어진다면-”

“그럼 애초에 멀어질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건 절대 안 돼요!”

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카르트와 블랑세와 멀어진다니 생각만 해도 싫고 무서웠다.

“어쨌든 좋은 말 고마워요.”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여러 명에게 고백할 생각은 없었지만, 니나의 말은 내게 용기를 줬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앞으로 해결할 일이 많았다. 그러니 계속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되었다.

나는 방을 박차고 나가 일단 에카르트의 방문을 노크했다.

“에카르트. 얘기 좀 해요.”

“지금…요?”

그는 잠시 침묵 끝에 문 너머로 말했다.

“죄송한데 좀 이따 해도 됩니까?”

나를 만나 주려고도 하지 않다니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둘이 집착하던 때가 좋았다. 가끔 둘이 부담스럽긴 해도 나는 내 생각보다 더 그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불쑥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전 세계에서 울었던 이후 처음 눈물이 나왔다.

“…….”

떠나는 대신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자 문이 열렸다.

***

이전 세계의 내가 처음부터 의지할 데 없이 태어난 건 아니었다. 나는 다섯 살까지 아빠와 함께 살았다.

“저렇게 덜떨어진 게 어미를 죽이고 나왔다니.”

아빠는 내게 늘 그렇게 말했다. 때때로 폭력이 오갈 때도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의 의미도 잘 모르는 채 나는 미안하다고만 했다.

“죄송해? 죄송하면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한동안 우리 집에는 늘 여자가 드나들었고 어느 날 아빠는 집을 나갔다.

나는 계속 기다렸고 뻔한 이야기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동안 울었으나 나중엔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

하지만 이곳에서 에카르트와 블랑세는 내가 어디에 있든 찾아냈다.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둘을 만난 후 단 한 번도 난 혼자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둘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벌을 받는 거라면 싫었다.

내가 그렇게 서 있는데 문을 연 에카르트는 눈을 크게 뜨고 굳었다. 그러다가 한 손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린 후 우는 얼굴을 보고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왜?”

“저기. 혹시… 이제 제가 어색한가요?”

“네?”

한번 울기 시작하니 쉽게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흑.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털어놓으니까. 좀 달라졌잖아요.”

차마 구체적인 말은 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알아차리길 바랐다. 에카르트가 내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고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더니 어느새 그가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고 있었다.

“제가 울린 겁니까?”

“몰라요….”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이 저보고 무섭다고 하시기에-”

“무섭다고 했다고요?”

그건 한참 전 이야기 아닌가. 내가 열심히 기억을 되짚자 에카르트가 내 눈을 맞췄다.

“엘린.”

“…엘린?”

“어제 술에 취해서 하신 말. 기억나지 않습니까?”

엘린이라는 호칭을 듣자 그제야 뭔가 조금씩 기억이 났다.

빙의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후에도 둘은 내게 변함이 없었다. 엘린이라는 호칭도 새로 만들었고. 하지만 나는 술에 취해 에카르트를 때리기까지 했지.

“그건… 더 이상 마음에 담아 둔 일이 아닌데.”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더 죄송합니다. 아니. 헬라 다 탓이지요.”

“그건 맞는 것 같아요.”

“역시 오레이칼 왕국에서 입수하도록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노력하지요. 여하튼 제가 무섭지 않을 때 다가오시길 기다리려고 하다가, 먼저 사과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안 무섭다니까요. 아니. 무서울 때도 있지만 괜찮아요.”

“그렇습니까?”

에카르트는 십년감수한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아까는 왜 저와 말도 안 하려고 했어요?”

“공작성을 떠나겠다는 말일까 봐 두려웠습니다. 정식적으로 사과하기 위해 준비했지요.”

에카르트가 방 안쪽을 보여 줬다. 아직 꽃이 다 꽂혀 있지 않은 꽃바구니와 여러 보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안도감에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그, 그런…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데. 둘 다 갑자기 서먹해져서 걱정했다고요!”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상관없습니다. 제가 아는 시엘리나는 오직 당신뿐이니까요.”

그런 말을 할 때 아까 다정히 나를 위로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냐는 듯 그의 눈빛은 다시 포식자처럼 강하게 바뀌었다. 그가 어느새 내 어깨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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