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오히려 이러는 게 이상하잖아. 분명 에카르트가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주길 바랐지만, 막상 그가 나를 밀어내면 불안해졌다.
게다가 그의 미련 어린 눈빛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그가 잡았던 손을 잠시 쥐었다 폈다.
마침내 우리는 어떤 문을 열고 조각상 앞에 다다랐다. 블랑세는 지팡이의 불빛을 이리저리 비추고 냄새를 맡고는 말했다.
“안개가 생각보다 더 옅네. 조각상 바깥쪽에는 남아 있지도 않았고.”
“안개?”
블랑세가 익숙한 듯이 조각상을 조작하자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간 그녀는 안쪽의 문 하나를 가리켰다.
“응. 저 문을 열었을 때 안개가 새어 나왔거든. 흑마법의 기운이 섞여 있었어.”
“시간이 지나서 사라진 거 아닐까?”
“으음,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는 검은색 문을 바라보다가 망설였다.
“시엘. 정말 다시 열어도 괜찮겠어?”
“걱정 마. 아까도 무사했잖아. 나도 내 눈으로 직접 봐야지.”
“알았어.”
블랑세가 손목 안쪽에서 팔찌와 반지 세 개를 꺼냈다. 내가 준 팔찌를 보고 눈빛이 흔들리자 블랑세가 해명했다.
“속여서 미안. 열쇠 역할을 해 줄 게 필요했거든.”
선대 크로덴 공작의 팔찌를 확인한 에카르트도 싸늘히 덧붙였다.
“유품을 잘도 도둑질했군.”
“어쩔 수 없잖아요.”
블랑세는 팔찌와 반지를 겹쳤고 육중한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다른 문장이 수백 수천 가지가 겹쳐져 있었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어떤 힘이 움직인다거나 스며드는 이상은 없었다.
‘블랑세의 저주를 풀었는데도 아직 남아 있다니.’
이것이 무슨 종류의 마법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파악하려면 먼저 술식을 해독해야 했다.
한데 무슨 마법진이든 보면 바로 해석하던 나조차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글자를 수십에서 수백 번 겹쳐 쓴 모양새였기에 더 힘들어 보였다.
‘이 정도면 애초에 풀지 말라고 만든 것 같잖아.’
나는 그중에서 색이 미묘하게 다른 마법진 하나를 발견했다.
“잠깐, 블랑세. 이건 다른 마법이 느껴져.”
“그래?”
“다른 마법진에도 영향을 주는 건 아니야. 지금 해방해서 무슨 마법인지 알아보자.”
간단한 원리였다. 나는 술식이 시작하고 끝나는 부분을 찾아내 거꾸로 그려 냈다. 그러자 영상석을 재생할 때처럼 어떤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따뜻한 갈색 머리에 신비로운 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
갈색 머리를 지닌 그녀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뒤에 펼쳐진 공간은 신전 같았다. 여자가 신전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구를 지키던 기사에 의해 가로막혔다.
“변절자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쯧, 애까지 데리고 오다니.”
그 뒤로 다른 신관들끼리 주고받는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공작 부인이 되었다더니 생각보다 차림이 좀.”
“천대받아서 다시 돌아오려고 한 거 아니야?”
영상처럼 보이는 속에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는 바로 체닐이었다.
그녀는 루솔릿 공작과 혼인한 후 신전 사람들과 교류를 끊어야 했다.
체닐이 오도 가도 못하던 그때, 신전에서 젊은 부부가 나왔다.
검정색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와 금색 눈동자에 눈매가 처진 남자였다. 남자는 고급스러운 포대에 두른 아기를 안고 있었다.
바로 선대 크로덴 공작 부부와 어린 에카르트였다. 에비게일이 체닐을 흘긋 보더니 문을 가로막은 병사에게 말했다.
“신전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여자는-”
마검을 지배하는 공작의 눈빛 앞에서 병사는 말을 삼켰다.
사교계에 관심 없던 에비게일이었기에 체닐이 루솔릿 공작 부인인 것도 몰라본 것이다.
에비게일은 체닐의 이름도 사정도 몰랐지만, 아기를 소중히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체닐에게 작은 도움을 줬다.
“들어가게.”
체닐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에비게일은 품을 뒤져 금화를 내밀었다.
“적선이 필요한가?”
“아, 아니에요. 대신… 그 팔찌를 주실 수 있나요?”
“팔찌?”
에비게일의 손목에는 레드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가느다란 팔찌가 둘려져 있었다. 뜬금없는 요구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보, 그건-”
“괜찮아.”
에비게일은 부군의 만류에도 팔찌를 풀어 건넸다.
체닐은 팔찌를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부군의 품에 안긴 에카르트를 바라보았다. 부군은 아기를 제 품에 바짝 끌어당기고는 경계했다.
“…저는 제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만. 누군가 이 아이와 세상을 도울 겁니다.”
“자네가 안고 있는 그 아기가?”
“이 아이가 아니라, 다른 아이예요.”
체닐의 눈빛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
이 장면을 끝으로 영상은 안개처럼 흩어졌고 마법진 역시 사라졌다.
루솔릿 공작성에 있다던 선대 공작의 팔찌가 이렇게 전해진 건가.
“이건.”
에카르트는 한 줌의 기억을 그러모으듯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리를 설명했다.
“어떤 마법은 사용자의 기억이 무작위로 남겨져 있어요.”
“그렇다면 이곳의 마법 중 몇 가지는 체닐 님이 걸었던 겁니까?”
“아마도요.”
부모를 영상으로 마주한 에카르트와 나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물론 내게 체닐은 친모가 아니지만, 그에게 선대 공작 부부의 의미는 남다를 테니까.
‘체닐은 왜 이런 마법을 남겼고 어디까지 예측했지?’
먼저 입을 뗀 사람은 블랑세였다.
“…방금 이 영상을 보고 떠올렸는데.”
“응.”
“그때 나는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공작님이 저주의 속삭임을 듣고, 그 모든 참사가 펼쳐지던 것을 목격했어.”
“살아 있지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였다?”
“그러다 마침내 과거로 되돌아오며 어떤 여자의 모습이 얼핏 스쳐 지나갔는데… 그 여자가 전 루솔릿 공작 부인, 아니, 체닐 님 같아.”
“그럼 네가 회귀한 것이… 원래 시엘리나의 어머니인 체닐 님과 연관된 걸까?”
“그건 알아봐야지.”
시엘리나의 기억을 되짚어도 체닐에 대해 인상적인 추억은 없었다. 그녀가 크게 앓았다는 것 외에는.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시간이 길어지며 원래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만약 특별한 능력이나 예지력이 있었다면, 왜 자신과 선대 공작 부부의 미래는 바꾸지 않았지?’
에카르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면 혹여 체닐을 원망할까 봐 홀로 의문을 삼켰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블랑세에게 말했다.
“체닐 님이 세상을 돕는다고 말한 아이가 너였을까?”
“너였을지도. 시엘은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까.”
“음…. 일단 단서를 더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마법진을 풀어봐야겠어. 이 장소를 촬영해 가면 좋을 텐데.”
“내게 영상석이 두 개 있기는 해.”
“두 개나?”
그녀는 하나는 황후에게 받았고 다른 하나는 3년 전에 직접 구했다고 설명했다.
“황후? 그러고 보니 너….”
“성전에서 들었는데, 네가 떠나자 황실은 공작님의 백마법사를 구하려 했어.”
블랑세가 황후와 만났던 사정을 털어놓았다. 다비온의 오해를 사면서까지 일부러 위험한 일을 자처하고 정보통까지 해 준 것이다.
그 사실을 난 다 이해했지만, 물론 에카르트는 비꼬았다.
“아주 고맙군.”
“…….”
그녀는 에카르트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이 무시하고 내게 말했다.
“어쨌든 영상석이 몇 개나 있든 소용없을 거야. 이 장소는 영상석에 담기지 않아서 늘 직접 와서 술식을 해제했거든.”
일단 블랑세는 마름모 모양의 영상석 두 개를 꺼내 보여 주었다.
황후가 준 하얀색 영상석은 영상을 바로 전송하거나 감시하는 마법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왠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찜찜하니, 성능이 좀 떨어진다 한들 3년 전의 영상석을 사용하기로 했다.
“내가 하지.”
에카르트가 블랑세의 손에 쥔 보라색 영상석을 뺏어 갔다. 영상석을 작동하는 법은 간단했다. 딱밤을 때리듯 손가락으로 튕겨 충격을 준 후 핫팩처럼 몇 번 흔들면 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영상석에는 지하 내부의 모습과 마법진이 정확히 담겼다. 블랑세는 당황하더니 멋쩍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했을 땐 안 됐는데.”
“그럼 그렇지.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크, 크로덴 공작 가문이라서 특별한 힘이 작용하나 봐!”
에카르트가 비꼬자 내가 서둘러 말을 수습했다. 사실 그 가설이 유력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는 내게 영상석을 건네주려다 무슨 변덕인지 제 품에 넣었다.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일단 공작성으로 가시지요.”
어쨌든 덕분에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마법진을 연구할 수 있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으로 보아도 되었다.
“그전에…. 블랑세, 결계를 더 걸고 가자. 누가 들어오면 안 되니까.”
“그래.”
블랑세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몇 가지 결계를 더 만들어 보강한 뒤 다시 계단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블랑세는 뭔가 찜찜한 눈빛으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
안개의 기운이 옅어졌다는 블랑세의 느낌은 들어맞았다.
시엘리나와 에카르트, 블랑세가 신전에 도착하기 전. 이미 지하에 들른 사람이 있으니 바로 리타였다.
그는 체닐에 대한 단서를 알아보기 위해 신전을 찾았다.
‘신전의 신관이었다고 했지.’
라멜이 팔찌 이야기를 더 일찍 했다면, 마법 대회에서 시엘리나의 반응을 떠봤을 텐데 아쉬웠다.
리타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리는 갈색 가발을 쓰고 마차에서 내려 유유히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중 인상이 순해 보이는 정식 신관 복장을 입고 있는 중년 여자 신관에게 다가갔다. 리타는 그녀에게 태연히 물어보았다.
“혹시 신관 체닐을 아십니까?”
“죄송하지만 그런 정보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신관이 경계하자 리타는 미리 준비한 돈을 얹어 주려고 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이유로 그분을 찾으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렇게 정직한 신관에게는 돈보다 사연이 먹힐지도 모른다. 리타는 사람을 방심하게 하는 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름 아니라, 제가 어렸을 때 신전에서 길을 잃었는데 체닐 님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근처를 들르다 문득 그분이 베푼 친절이 생각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여 찾아왔습니다만.”
신관은 순간 의아했다. 이 젊어 보이는 남성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라면 체닐은 공작가에 있었을 시기였기에.
“실례지만. 나이를 여쭤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