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녀는 이번 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
블랑세는 시엘리나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함께 성전에서 공부하고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며 친구가 되어 갔다.
시엘리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신분도 가장 높으면서도 블랑세를 거리낌 없이 대했다.
‘게다가 오히려 나를 보호했지.’
백마법사의 뜻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선하지는 않았다.
블랑세를 선망하든 질투하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여전했다. 목숨에 위협이 되는 심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교묘한 괴롭힘도 자주 있었다.
식당 테이블에 앉아 시엘리나와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던 그때. 블랑세의 접시 위로 물이 쏟아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백마법사 동기가 반쯤 남은 물컵을 들고 서 있었다.
“아, 미안해. 실수였어.”
“…괜찮아요.”
블랑세는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엘리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물컵을 쥐어 그 동기에게 뿌렸다.
“나도 실수.”
“실수라고요?”
머리카락이 축축이 젖은 동기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네. 블랑세는 괜찮다고 해 줬는데 그쪽은 용서 못 해 줘요?”
“…하.”
그 수습 백마법사는 보복하고자 남은 물컵을 기울여 다시 블랑세를 향해서 뿌렸다.
틀림없이 이번에도 실수라고 둘러대려던 의도였다. 공녀라는 지위를 고려하면 차마 시엘리나에게 하지는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엘리나는 블랑세에게 결계를 만들어 줬고, 그 덕에 물이 반사돼서 동기의 눈에 들어갔다.
“아악!”
“두 번이면 실수가 아니라던데. 아니면 손을 많이 떠시나 봐요.”
시엘리나는 사과하는 대신 싸늘하게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가, 가자.”
다른 동기들은 쫄딱 젖은 그 동기를 부축해 사라졌다. 시엘리나는 젖은 접시를 바라보고 말했다.
“식사는 다시 받아 와야겠네. 같이 가자.”
“…고마워.”
그 뒤로도 블랑세의 책이나 보고서를 누군가 숨겼을 때도 시엘리나는 선뜻 도와줬다.
“블랑세. 같이 보자.”
“보고서는 내 꺼 보고 다시 쓰면 돼. 나는 그동안 범인을 찾아낼게!”
“하여튼 한심한 놈들. 그럴 시간에 자기 공부나 할 것이지.”
자신과 다르게 할 말도 전부 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다. 가까이 지내면서 블랑세는 시엘리나의 당당한 모습을 조금씩 닮아 가고 싶었다.
그렇게 점점 더 친해진 시엘리나와 블랑세는 함께 수도로 산책을 나왔다. 둘은 서점에 들러 새 책도 사고 부티크에 들러 옷도 산 뒤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시엘리나가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처음 보는 음식들을 가리켰다.
“이거… 무슨 맛일까?”
“글쎄.”
“먹어 보면 알겠지. 그냥 다 시켜 보자.”
블랑세는 시엘리나와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때 누군가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블랑세 양.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죄송하지만 가 주시겠어요? 친구와 이야기 중이라서요.”
“아아, 네.”
남자가 돌아가자 시엘리나는 블랑세에게 물어봤다.
“누구야?”
“그냥… 전에 서점에서 만난 귀족.”
블랑세는 적당히 둘러댔다. 며칠 전에 구애를 받은 적 있는데 거절하자 성전까지 찾아와서 협박했던 남자였다. 이전 생에서는 이 귀족에게 혼자 수도에 나왔다가 납치당할 뻔한 적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구역으로 왔는데 결국 마주치다니. 블랑세는 괜히 시엘리나까지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후 말했다.
“시엘. 나는 뭐 살 거 있어서. 먼저 성전으로 돌아가.”
“음. 아까 그 귀족, 이름이 기몬 후작이던가?”
“맞아. 어떻게 알아?”
“예에-전에… 파티에서 만난 적 있는 것 같아.”
“파티에서?”
“아무튼! 나 먼저 가지는 않을 거야. 기다려 줄 테니까 같이 가자.”
블랑세는 어쩌면 둘이 같이 있다면 후작도 접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 많은 길로 향했다.
하지만 후작은 인파 사이에 섞여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블랑세를 닿을 듯 말 듯하게 건드렸다.
‘치안대에 넘길까.’
그때 시엘리나가 그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뒤로 꺾었다.
“으아악!”
“죽고 싶냐?”
대답도 듣지 않고 시엘리나가 아예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녀의 반대편 주먹이 반짝였다. 시엘리나는 마력을 실은 주먹으로 후작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후작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지, 진정하시오, 공녀! 나는 기몬 후작이오!”
“후작이든 뭐든 범죄자인데 어쩌라고.”
“내, 내가 언제 추행했단 말이오?”
“추행이라는 말은 아직 안 했는데.”
“그, 그건.”
후작은 제 발이 저렸는지 말을 더듬다가 빌빌 기었다.
“제, 제발 그만 때리시오. 귀족 가문끼리 친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시엘리나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으르렁거렸다.
“무, 무슨 상관이냐뇨!”
“나는 집 나왔는데.”
“그, 그런.”
“너. 블랑세를 납치할 생각이었잖아. 어디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해?”
시엘리나가 후작의 멱살을 쥐고 흔들자 그의 품에서 희귀한 불법 마도구가 툭 떨어졌다.
“거봐, 이 새끼야. 이래도 발뺌할래?”
“이, 이건.”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마침 치안 기사가 다가와서 시엘리나는 그를 넘겨주며 사건에 대해 말했다.
“저 후작이 성전의 백마법사를 추행하고 심지어 납치하려 했어요.”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블랑세는 성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물어보았다.
“그런데 시엘. 납치하려고 한 건 어떻게 알았어?”
“아, 그건….”
시엘리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재료의 힘이 느껴져서!”
“그렇구나….”
납치할 때 필요한 희귀한 재료는 그 자체로도 신비한 힘을 담고 있었고, 감각이 뛰어난 마법사들은 재료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눈치챈다.
시엘리나는 성력뿐만 아니라 마력까지 뛰어난 대단한 실력을 갖춰 그 정도의 경지는 된다고 생각했기에 블랑세는 쉽게 납득했다.
“어쨌든 미안해. 오늘 괜히 나 때문에 쓰레기와 엮였네.”
“아니, 아니. 네 탓 아니야! 네가 통제할 수 없는 일로 자책하지 마. 그리고 저런 쓰레기는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알지?”
“알아. 네가 항상 하는 말이잖아.”
블랑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엘리나의 단호한 금색 눈빛은 이내 누그러졌다. 시엘리나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정말 재밌었어.”
“나도.”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면 좋겠다.”
태양 같은 금색 눈동자가 블랑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엘리나가 전생에도 나를 아꼈다면. 아니. 에카르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의문은 집어넣었다.
‘나는 세계를 지키겠다는 사명을 가졌지만 그 길이 외롭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시엘리나 너 덕분이었어.’
처음에는 달라진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시엘리나에게 접근하고 감시했지만 그건 점점 진심 어린 집착으로 바뀌었다.
그런 시엘리나가 이번에는 자신보다 먼저 에카르트와 엮이게 되었다. 블랑세는 여전히 에카르트가 두려웠고 원망스러웠으며 한편으로는 동정했다.
물론 때로는 그가 집착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로덴 공작님, 잘생겼지?”
블랑세는 시엘리나와 함께 백마법 공부를 하다가 슬쩍 떠보았다.
“응? 그야 그렇지.”
“좋아해?”
“아니?”
시엘리나는 정말 떨떠름하게 말했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점점 시엘리나를 볼 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모습과 태도였다.
‘에카르트가 너를 사랑해서 걱정했지만… 네 앞에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
그리고 시엘리나 역시 그럴 때면 잠시 시간이 멈춘 듯이 에카르트를 바라보았다.
‘서로 호감 정도는 가졌구나.’
사실 시엘리나가 이왕이면 그런 흑막이 아니라 다른 평범한 사람을 사랑하길 바랐다. 그러나 전생과 달리 순종적인 에카르트를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어쩌면 우리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와의 관계도 달라질 거야.’
그런 예감이 들었다고 해서 시엘리나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알게 모르게 시엘리나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
시엘리나 일행들이 타고 있는 마차가 도착한 곳은 신전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후. 블랑세는 문지기가 있는 정문으로 향하는 대신, 뒤쪽의 외딴 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쪽이야.”
막혀 있던 벽이 그녀의 손이 닿으니 뚫렸다. 환각 마법으로 길을 감춰 둔 모양이었다.
그렇게 블랑세가 안내한 곳은 지하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바닥을 짚고 새로운 문을 열었다.
“여긴 어디야?”
“내가 돌아온 시점은 이 지하를 발견했을 때였어. 전생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전을 떠났지만… 이번에는 이 안에 숨겨진 힘을 밝혀낼 운명이라고 믿었지.”
물론 그게 아니었지만. 블랑세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블랑세를 선두로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누가 이런 곳을 만들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깊은 공간이 숨겨져 있는지 의문이었다.
지하에는 벌레 한 마리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두개골 형상이 보였다.
“꺅.”
소리가 크게 들릴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블랑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자세히 보니 그저 구멍이 나 있는 둥근 돌이었다.
“미안. 뼈…인 줄 알았어.”
“걱정 마. 자주 와 봤는데 그런 건 없었어.”
“그래?”
“…핏자국 같은 건 있었지만.”
“뭐?”
“듣기로 아마 초대 크로덴 공작의 핏자국이라도 하던데.”
“하! 말도 안 됩니다.”
나는 그래도 혹시 뭔가 튀어나오기라도 할까 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발을 헛디딜 뻔했다.
“앗.”
“조심하십시오.”
에카르트는 나를 한번 붙잡아 주고는 평소와 달리 그대로 손을 떼었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