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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67화 (67/115)

#67화

왠지 식도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결국 몇 모금 마시지 못했다.

“마차 멈춰.”

에카르트가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는지 헬라에게 명령했다. 그는 내가 마신 물의 냄새를 맡아 보았고, 그사이 헬라가 다급히 마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에카르트의 시선을 피하며 내게 물병을 쥐여 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게… 물입니다.”

“네? 제가 마신 건 뭐였는데요?”

“…술입니다.”

“술?”

내가 어리둥절한 사이 에카르트가 헬라를 실직자로 만들었다.

“자네는 해고야.”

“주인님!”

“물론 그전에 죗값은 치러야겠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듯… 술독에 담그는 형벌을 내려야겠군.”

살해 협박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다그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월급 도둑은 오레이칼 왕국에서 진작 빠뜨려야 했습니다. 술을 그리 좋아하니 형벌을 받아도 행복해하겠지요.”

나는 다급히 에카르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리고 말했다.

“자, 잠깐만요. 오랜만에 마셨는데 생각보다 맛있네요!”

“…….”

하지만 자꾸 머리가 멍해지고 졸음이 몰려왔다. 결국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오랜만인데 꽤 맛있어요. 이거 신기하네. 되게 오랜만인데. 생각보다….”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배시시 웃는 시엘리나를 보며 모두가 깨달았다.

시엘리나가 취했다는 것을.

***

마차는 잠시 숲길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 에카르트는 술에 취해 휘청이는 시엘리나를 제 품에 기대게 했다.

“으음.”

“괜찮습니까?”

“몰라요….”

시엘리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에카르트에게 안겨 왔다.

시엘리나가 에카르트에게 와닿는 감촉이 미칠 듯이 좋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티를 낼 수 없어 화가 났다.

이미 블랑세 때문에 무리한 와중에 냄새조차 맡아 본 적도 없는 도수 높은 술을 마시다니. 도저히 헬라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처분당하고 싶은지 생각했나?”

“죄송합니다. 무엇이든 뜻대로 처분하십시오!”

시엘리나는 모두의 얼굴이 두 개로 겹쳐 보였기에, 이 상황도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꿈속에서도 갈굼을 당하는 헬라가 안타까웠다.

어차피 꿈인데 뭔들 못하랴. 담아 둔 게 많았던 시엘리나는 에카르트의 가슴을 주먹으로 한 대 치며 외쳤다.

“야.”

물론 별 타격감이 없었지만 처음 듣는 반말에 당황한 에카르트였다.

“…야?”

“그만 좀 괴롭혀!”

“괴롭히다뇨. 딱 절반만 죽이려고 했을 뿐입니다.”

“반이든 반의 반이든 하지 마. 나는 헬라가 좋으니까.”

“누가 좋다고요?”

“헬라가 좋다고.”

진심이 담긴 주사에 에카르트는 헬라를 향한 분노가 증가했다. 공작가의 집사인 헬라는 수명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공포를 느꼈다.

“또 헬라 괴롭히면 파업할 거야.”

“그렇게 협박하시면 어쩔 도리가 없군요.”

“아니. 협박은 네가 했잖아!”

“…제가 말입니까?”

“그래. 나한테도 처음에 그랬지. 성전에 영상석으로 봤다고 거짓말하고.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데….”

시엘리나는 더 서러워졌는지 잠깐 숨을 고르더니 그의 가슴을 퍽퍽 쳤다.

“탄탄해서 그런지 타격감이 좋네.”

“화가 풀리면 더 때리십시오.”

“고마워. 아니. 안 고마워.”

시엘리나는 무슨 말을 더 중얼거리며 양손으로 그를 때렸다. 에카르트는 뭐라고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조용히 맞았다.

헬라가 점점 사색이 되어 갔지만 한편으론 왠지 모를 대리 만족도 느꼈다.

얌전히 지켜보던 블랑세 역시 시엘리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몫까지 열심히 때려 주는 모습을 보니 고소해서 굳이 안 해도 되는 질문까지 하고 말았다.

“시엘. 그래도 나는 안 무서웠지?”

시엘리나는 그제야 에카르트를 때리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블랑세. 장난해?”

“장난하냐고?”

“당연히 너도 무서웠지! 특히 천장에 붙어 있을 때 정말 꿈에도 나오고-”

가슴에 쌓인 말을 털어 내며 후련해지는 그녀와 달리, 에카르트와 블랑세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물론 시엘리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어깨에 뻐근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나는 빳빳한 검은 정장에 기대고 있었다.

에카르트의 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부드러웠고, 블랑세의 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듬직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내 베개가 되어 주었던 사람을 바라봤다.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온 헬라였다. 그녀는 기사처럼 정자세로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헬라?”

“네, 공녀님. 몸은 어떠신가요?”

“괜찮아요. 그보다 어제 제가 뭔가 이상한 말을 하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속 시원했… 제가 무슨 말을!”

공작성의 고용인들이야 원래 이상했지만 그녀의 반응은 나를 더 걱정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머리가 아팠다. 아니. 내가 빙의자라고 고백한 후부터의 장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로 잠들었던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에카르트와 블랑세는 어디 있어요?”

“두 분은 마부석에 앉아 계십니다.”

“왜 그곳에?”

“제가 주인님의 뜻을 감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슬며시 마차에서 내렸다. 주변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였지만 거리는 깨끗했다.

‘수도 같긴 한데. 이런 장소도 있었나?’

서로 몇 걸음쯤 떨어진 채 서 있던 에카르트와 블랑세가 보였다. 둘은 나를 보자마자 목각 인형처럼 어색하게 맞아 주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네….”

에카르트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블랑세 역시 기운 빠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 시엘….”

“으응. 여기는 어디야?”

“크로덴 공작가 명의의 여관입니다. 식사가 준비됐다는군요.”

이곳에 도착한 지 꽤 시간이 지난 듯했다. 나를 깨워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왜 둘까지 밖에서 기다렸는지 의문이 들었다.

공작가 소유라면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찬바람을 쐬던 중이었나?’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 나는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해 멋대로 해석하게 되었다.

역시 너무 직접적으로 빙의자라고 고백했을까? 다른 세계에서 온 내가 시엘리나의 몸을 얻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겠지.

나는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우리는 여관에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테이블과 식기는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음식들이 하나둘 차려졌지만 입맛은 없었다.

나는 평상시와 어딘가 괴리감이 느껴지는 둘이 신경 쓰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에카르트는 내게 칼질한 스테이크를 내밀고 식사를 시작했다.

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접시 위에 수북이 음식을 쌓아 주는 게 습관인 그들이었는데.

가끔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조용한 식사였다. 나는 식사를 깨작거리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다 드셨습니까?”

“네에….”

“그럼 갑시다.”

이제 나를 에스코트하려고 팔짱을 끼울 시간인데 그들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 뒤를 따랐다.

***

에카르트는 시엘리나를 생각하면 늘 양면적인 감정이 들었다.

강했지만 늘 지켜 주고 싶은 존재였다. 때론 손이 닿는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동시에 강한 열망이 생겼다.

블랑세가 전생에 대해 말하고 시엘리나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고백했을 때.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당장 시엘리나를 속박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시 다른 세계로 돌아간다면 어떡하는가!

그런 참사를 방지하기 위해 자신만 아는 공간에 그녀를 가둔 다음, 단단한 사슬로 전신을 묶고 수백 개의 결계를 걸고 싶었다.

그래도 떠나 버린다면… 에카르트는 언제든지 다른 세계로 함께 갈 방법을 찾을 것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라니 안심했으나.

“아니. 협박은 네가 했잖아!”

“…제가 말입니까?”

“그래. 나한테도 처음에 그랬지. 성전에 영상석으로 봤다고 거짓말하고.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데….”

왜 진작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붉어지던 얼굴. 제게도 들릴 만큼 뛰던 심장 소리.

전부 겁에 질릴 때 나타나던 증상들 아닌가!

최근에도 그랬던 거로 봐서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에카르트가 자아 성찰을 시작하는 동안 블랑세도 스스로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여태 시엘리나가 무리해서 맞춰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이 보기엔 시엘리나가 저를 부담스러워했나요?”

“그래 보이는군.”

“아. 다시 시간을 돌리고 싶네요.”

블랑세가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지만 에카르트는 딱히 위로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더 이상 시엘리나에게 밉보여서는 안 된다는 필사적인 마음뿐.

결국 둘은 시엘리나와 함께 있는 것도 미안해졌다.

“하아.”

에카르트가 제 머리를 헝클고 괴롭게 한숨 쉬었다. 그녀에게 밉보인다는 상상만 해도 심장이 조이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물론 시엘리나는 둘의 마음도 모르고 마차에서 쿨쿨 잠들었다.

“당분간 공녀와 거리를 둬야겠어.”

“…그래요.”

블랑세 역시 앞으로는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에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도 저 여자보다는 나았지.’

‘그래도 공작님보다는 내가 나았어.’

결론을 짓자마자 에카르트는 거들떠보기도 싫은 여자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마부석에 앉을 테니 너는 따로 오도록.”

“장난하세요? 저는 어떻게 가라고요.”

“지붕에 타든 걸어서 오든 알아서 해.”

“저도 마부석에 앉을 거예요. 정말 한결같이 짜증 나는군요.”

에카르트와 티격태격대면서 블랑세는 정말 전생을 정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앞으로가 더 중요할 뿐. 특히 시엘리나와 관계가 말이다.

물론 시엘리나는 그런 이들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저는 앞으로… 시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겠어요.”

“분수를 더 깨달으면 좋겠군. 너는 가서 황태자와 놀아. 엘린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 테니까.”

“글쎄요. 사랑과 우정은 섞여 있기도 하고 둘 중 뭐가 더 중요한지도 사람마다 다르죠.”

에카르트는 한편으로는 일거양득을 기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기억도 못 하는 전생에서 저 땅딸보와 진정한 사랑을 나눈 것까지는 아니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저 땅딸보는 굼벵이와 관계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둘이 이어지면 블랑세도 시엘리나를 향한 집착을 거둘 것이다. 게다가 혹시나 황태자가 시엘리나에게 눈독을 들일까 걱정했는데, 원래의 사랑을 붙여 주면 그럴 일도 없겠지.

블랑세 역시 시엘리나의 행복을 빌었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시엘리나와 늘 가깝고 싶은 마음 단 한 가지뿐이지만 그래야 하는 이유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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