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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66화 (66/115)

#66화

“시엘리나. 저 여자가 혼자 꿈을 꾼 모양입니다.”

에카르트는 동의를 구하듯 말했지만 나는 선뜻 긍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신중히 물어보았다.

“에카르트. 저주가 마검의 계약자에게 말을 건다는 이야기, 들은 적 없나요?”

“없습니다만. 당신은 저 여자의 말을 믿습니까?”

나는 빙의자라는 사실을 고백할지 고민했다.

에카르트는 블랑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사실을 털어놓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는 내가 빙의한 후에 만나 새로운 관계가 되었으니 말이다.

“블랑세의 말이 맞아요. 저는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었어요.”

“다른 세계?”

“네. 예언서 같은 거로… 당신이 저주에 휘말려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결말을 읽었죠.”

에카르트의 붉은 눈동자와 블랑세의 파란 눈동자가 동시에 흔들렸다.

“거기서 죽었다가 눈을 뜨니 이곳의 시엘리나가 되어 있었죠.”

“너도… 죽었다고? 어쩌다가.”

“이곳으로 따지자면 마차 사고였어. 아무튼-”

나는 일단 원작의 내용을 몇 가지 말했다.

에카르트가 나를 죽일 운명이었기에, 처음에는 그를 피했다는 것과 그가 결국 마검의 저주에 휩쓸려 흑막이 되었다는 정도로 말이다.

“제가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블랑세가 기억하는 전생에서는 그랬는걸요. 그 예언서의 내용을 알았기에 공작님과 멀어지려고 했죠.”

블랑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슥슥 문질러 닦고 덧붙였다.

“…이전 생의 공작님은 제 백마법에 맹목적으로 집착했어요. 저를 위한답시고 수많은 살생을 하셨죠.”

“미쳤나 보군.”

내가 에카르트를 째려보자 그는 언제 욕을 했냐는 듯이 순순해졌다.

“저는 다비온 황태자 전하와도 인연이 닿았지만…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자결을 택했죠. 저는 그 후 공작님이 저주의 속삭임에 넘어가 제국을 파괴하고 황태자 전하까지… 시해하는 것을 바라봤어요.”

“어쩐지 너나 그놈이나 목숨이 두 개인 것처럼 굴더라니.”

에카르트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에카르트의 넓은 등을 때려서라도 가만히 있게 해 차라리 절반이라도 가게 하고 싶었다. 에카르트의 반응이 버젓하거나 말거나 블랑세는 꿋꿋이 말을 이어 갔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공작님 역시 저주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제는 마음을 정리했죠.”

“그것참 다행이야. 이제 시엘리나 님에 대한 마음까지 정리하면 되겠어.”

“…시엘 덕분에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으니까. 공작님께서 시엘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 이번 생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존중이라.’

에카르트는 블랑세의 감정에 아랑곳하지 않는 흑막이었지만 내게는 원작과 다른 여러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강압적으로 굴었던 적도 내 미래가 정해진 듯이 치료를 요구할 때뿐.

나는 설득하는 대신 달아났고. 그 후 공국까지 나를 쫓아왔으나 이내 다시는 내 미래를 통제하려고 들지 않기로 약속했다.

블랑세가 물기가 남아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전생과 달리 더 큰 힘을 얻고 싶었어. 그래서 신전 지하의 문을 열어 보려 했지.”

“내게 초월적인 힘을 물어보던 것도 그래서야?”

“응. 시엘이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그 이유가 뭘까 알아내고 싶었거든. 이전과는 다른 호칭을 사용하고 싶었기에 시엘이라고 불렀고.”

“그랬구나….”

이제야 블랑세가 내게 집착하고 만난 첫날부터 애칭을 만든 이유가 납득이 갔다.

에카르트는 블랑세의 말을 듣고 갈수록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과거의 자기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까 생각했는데.

“시엘리나. 혹시 당신이 다시 다른 세계로 돌아가거나, 제가 또 기억을 잃을 수도 있습니까?”

“네?”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질문이 돌아왔다. 지금 블랑세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말이 그거란 말인가! 내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답하지 못하자 블랑세가 대신 답했다.

“일단 그럴 일은 없어요.”

“없다고?”

“저는 회귀했고 시엘리나는 빙의…했죠. 게다가 당신과 시엘리나는 별의 꽃을 통해 이어졌는데, 그런 특별한 연결 고리는 어떤 초월적인 힘으로도 끊어 낼 수 없어요. 이전 생의 저와의 관계와 달리요.”

나야 그러길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애초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확률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재확인을 받을 줄이야.

블랑세의 대답에 에카르트는 히죽 미소 지었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나 싶었는데.

‘일단 에카르트가 블랑세에게 사과하는 게 먼저지.’

이번 생에서 완전히 다른 관계가 되었다지만, 블랑세에게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여전히 우리 때문에 괴로웠을 테니 말이다.

“에카르트. 블랑세가 많이 힘들고 괴로웠을 거예요.”

“그래서요?”

“그래서라뇨.”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에카르트는 사과하지 않았고 블랑세 역시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기억이 없는 일을 사죄하라는 게 납득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그녀가 전생을 기억하는 이상 짚고 넘어가야 했다. 내가 그런 설교를 시작하려 할 때.

“계속 시엘리나라고 계속 불러도 됩니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네. 저 여자는 그동안 비겁하게 자기만 애칭으로 불렀지요. 그동안 시엘리나라고 불리는 게 어색했다면 새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적응돼서 이제 어색하진 않지만. 그럼 엘린은 어떨까요.”

내 이전 생의 이름은 아린이었다. 그와 어느 정도 이름의 뜻하는 바가 비슷하니 넌지시 말했는데 그는 적응력 빠르게 새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엘린. 아주 좋습니다.”

“그보다 다른 할 말씀이 남았을 텐데요.”

“아, 물론이지요.”

그는 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엘린.”

“네? 아니, 사과해야죠.”

“죄송합니다, 엘린.”

“저 말고 블랑세에게요.”

이렇게까지 블랑세의 감정을 단 하나도 생각하지 못할 줄 몰랐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거참 미안하게 됐군.”

“…….”

블랑세는 엎드려 절 받은 사람의 표정이 되었다. 에카르트가 뭔가 묘책을 떠올린 듯이 말했다.

“이번 생에는 다비온과 이어지도록 기필코 협조하지.”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에 내가 뒷목을 잡을 지경이었다. 블랑세가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하면 시엘과 떨어지는 건 어떤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둘은 다시 서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싫은 듯 나를 응시했다.

‘블랑세가 저렇게 착해서 어떡하지.’

착한 심성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

그것이 좋은 건가 싶으면서도 블랑세가 그렇다면, 나는 그 삶의 방식을 존중하겠다. 그 심성으로 인해 마음이 괴로워지는 일이 없도록 곁에서 지켜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도록 막아야지.

에카르트에게 제대로 된 사과는 나중에 받아 내기로 하고 나는 둘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신전의 마법진을 확인하러 갈까?”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던 둘이 지배당할 정도로 위험한 힘이니 반드시 없애야 했다.

“엘린. 당신, 지금 마력이 불안정한 것 같습니다.”

“그래. 너까지 영향을 받으면 어떡해? 이동 마법을 사용하고 저주를 막는 동안 꽤 많은 마력을 사용했는데.”

나는 가는 길에 충분히 회복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러자 블랑세가 파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복잡한 마음으로 말했다.

“결국 너까지 이 일을 짊어지게 하다니….”

“무슨 말이야? 내가 알았다면 애초에 너 혼자 해결하게 두지 않았을 거야.”

그때 풀밭을 지나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헬라가 마차를 끌고 용케 우리가 있는 곳을 찾아와 주었다.

“여기 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우리 셋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충직하게 본인의 일을 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헬라의 질문에 에카르트는 의견을 묻듯 나를 응시했다. 결연한 눈빛을 하자 에카르트가 내 뜻을 전했다.

“…신전으로.”

그렇게 우리의 행선지는 정해졌다.

에카르트는 블랑세에게 죄책감이 정말 한 톨도 남지 않았는지, 나를 가장 먼저 마차에 태우고는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블랑세가 들어오기 전에 마차 문을 닫으려고 했다.

“블랑세 아직 안 들어왔어요!”

“키가 작아서 못 봤습니다.”

“말도 안 돼요.”

“정말입니다. 저처럼 키가 크면 그런 땅딸보는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지요.”

다비온에겐 굼벵이, 블랑세에겐 땅딸보라니.

물론 블랑세는 꿋꿋하게 내 옆자리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내 맞은편 자리는 아예 비었다.

“그런데, 원래의 엘린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궁금하신가요?”

“네. 저는 당신에 대해 전부 다 알고 싶습니다.”

나는 망설이다가 짧게만 설명했다.

엄마의 얼굴을 본 적 없고 아빠는 다섯 살 때 나를 버렸으며, 그 후 시설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가, 여러 일을 하면서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고.

“당신 아버지가 쓰레기였군요. 꼭 누군가 응징할 겁니다.”

“우리 시엘을 그렇게 고생시키다니!”

그리고 고장 난 마차를 운전하다가 어린아이를 칠 수 없어 울타리를 박았다는 이야기. 트럭이나 전봇대 같은 단어를 알아듣기 쉽게 비유로 설명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에카르트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다신 그러지 마십시오. 당신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로 인해 희생하려고 하거든 제가 먼저 그 작자를 죽일 거예요.”

“…….”

내가 눈빛으로 꾸짖자 에카르트가 늦게나마 말을 정정했다.

“대신 다른 놈을 희생시킵시다. 그러면 되겠지요.”

블랑세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전보다 인성이 나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네요.”

“칭찬으로 듣지. 엘린, 저 잘하고 있습니까?”

“아, 네.”

나는 에카르트가 변화하고 내 말을 최대한 따르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급한 불을 끄고 긴장이 약간 풀리자 갈증이 느껴졌다. 나는 마차 안에 난 작은 창문을 열고 마부석에 앉은 헬라에게 물어봤다.

“헬라. 혹시 물병 있나요?”

“그럼요. 얼음을 넣어 두어서 시원할 겁니다.”

헬라는 만능 집사답게 품에서 물병을 꺼내 건네줬다.

나는 고맙다고 답한 후 뚜껑을 열었다.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헬라가 준 것이니 크게 개의치 않았다.

“뭔가… 물맛이 쓰고 이상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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