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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65화 (65/115)

#65화

‘블랑세의 마력이 옅게 남아 있어.’

그 빛들을 관찰하는데 문득 기류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주변을 둘러보던 에카르트가 다시 검을 들었다.

동시에 중상급 마수들이 튀어나왔다. 평범한 모험가는 기척을 눈치채지도 못하는 마수였다. 물론 마검의 지배자가 그것을 처치하는 데에는 손가락 까딱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잠시만요, 에카르트. 저, 샤사가 준 끈이 있어요. 효과가 통한다면 마수를 처치하지 않고도 숲을 지날 수 있을 거예요.”

“그 하룻강아지가 준 선물이 도움이 됩니까?”

“샤사는 하룻강아지가 아니라 여우에요.”

나는 지팡이의 끈을 풀어 에카르트와 함께 쥐었다. 우리는 검은색 빛 알갱이를 따라 걸어갔다.

반신반의했지만, 정말 마수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뿔이 달린 멧돼지도 발톱이 긴 검은 늑대들도,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만 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이제 검은빛을 따라 걸어가 블랑세를 찾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우리는 손잡고 계속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왠지 갈수록 마수가 많아지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숲을 날리면 될 텐데.”

“잊지 마세요. 우리 목표는 블랑세를 찾는 거예요.”

나는 에카르트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는 곁을 지키는 대형견처럼 내 옆을 듬직하게 따라왔다.

“앗.”

그때, 나는 검은빛들이 모여드는 지점을 발견했다. 그 주변에도 유독 많은 마수들이 몰려 있었다. 유리 같은 반투명한 막 안에 서 있는 블랑세가 보였다.

불길한 검은색 기운이 끈처럼 블랑세의 손을 묶듯 감겨 있었다.

손에는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사된 단도가 들렸다. 주변에는 열 겹도 넘는 방어진이 느껴졌다.

“에카르트. 제가 가 볼 테니 여기 있어 주세요. 끈을 놓고 마수가 몰려들거든 처리를 부탁해도 될까요?”

“저야 괜찮지만…. 저 작자에게 가까이 가면 당신이 위험해질지 모릅니다. 함께 확인하시지요.”

에카르트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듯했다. 하지만 나는 자칫하다 그까지 저주의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됐다. 차라리 여기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게 나을 터.

“괜찮을 거예요. 여기 계세요.”

“그럼, 마수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겠습니다.”

나는 에카르트의 손을 한번 잡았다 놓았다. 팔찌의 효과가 사라지자 마수들이 그를 향해 몰려들었고 나는 돕고 싶은 마음을 참은 채 입술을 꽉 깨물고 블랑세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몇 걸음 다가간 그제야 블랑세가 기척을 눈치챘다. 나는 일단 다가서지 못하게 막은 방어진을 전부 무효화시켰다.

“블랑세!”

“시엘. 대체 어떻게 여기에?!”

“나 역시 묻고 싶은 게 많아. 그보다 우리 사이에 이런 방어진은 필요 없잖아.”

블랑세가 혼란스러운 눈빛이었지만, 이내 검의 방향을 바꿔 내게 겨눴다. 서늘하게 빛나는 칼끝은 가검이 아니라 진검이 분명했다.

“나한테서 떨어져.”

손도 떨고 있으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나 역시 긴장으로 몸이 굳었으나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알았다. 블랑세를 살리는 것. 우리 사이가 한 발자국만 남긴 채 가까워진 순간.

블랑세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오지 말라고!”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곧바로 칼날을 쥐었다. 날이 잘 들은 칼날이었는지 따뜻한 피가 새어 나왔다.

“뭐 하는 거야!”

블랑세가 칼을 든 손에 힘이 풀린 사이, 나는 칼을 쥐어 멀리 집어던졌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공작성에 있지 왜 여기까지 왔어!”

“너도 내 말 안 듣는데, 내가 네 말을 왜 들어.”

“시엘리나, 대체 왜 도망쳐야 할 때는 도망치지 않는 거야? 나를 그냥 내버려 둬….”

“싫어. 언제는 내가 하는 집착이 좋다더니.”

나는 순식간에 블랑세가 도망치지 못하게 손을 잡았다. 그녀가 뿌리치려고 했지만 내 힘이 더 강했다. 그러자 블랑세가 낙담한 듯이 말했다.

“신전 지하에 마법진이 숨겨져 있었어. 내가… 어떤 저주를 깨운 모양이야.”

“저주라니. 에카르트의 저주라면 치료했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거기 뭔가 남아 있던 거야.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야.”

“뭐든 내가 다시 해결할게. 그러면 돼.”

여유로운 척했지만 나 역시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걸 알았다. 블랑세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어쨌든 나는 살아 있으면 안 돼. 이건 의미 있는 죽음이야!”

“그딴 의미 부여하지 마!”

옥신각신하던 그때 순식간에 불길한 기운이 우리를 감쌌다.

거대한 뭔가가 짓이기는 듯한 압박감이 들고 머릿속이 뿌옇게 어지러웠다. 블랑세는 고통스럽게 심장을 감싸 쥐었다.

“시엘리나. 이제 그만 나한테서 떨어져!”

“싫다고!”

거울이 깨지는 것처럼 주변의 공간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바로 균열이었다. 저 균열이 시작되면 그 틈으로 마수들이 드러나겠지.

방울방울 떠다니던 검은 빛 알갱이가 합쳐지고 서서히 덩어리가 되었다. 땅과 풀은 물론 공기까지 검게 물들었다.

그건 에카르트가 저주에 완전히 물들고 암흑으로 침잠할 때와 같은 징조였다.

‘막아야 해!’

나는 성력을 최대한 방출하는 마법으로 주변의 기운을 중화시켰다. 신성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검은 알갱이끼리 뭉쳐지지 못하게 막았다.

전처럼 별의 꽃으로 능력을 확장하고 성력을 주입하는 과정은 필요 없었다. 지금 블랑세의 몸 자체가 암호화된 거대한 마법 그 자체니까.

‘그렇다면.’

내가 블랑세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있자 그녀가 나를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블랑세, 가만히 좀 있어.”

“기껏 되돌아왔는데 너라도 살라고!”

“뭐?”

순간 정신이 흐트러졌지만 눈을 감고 집중해 주변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했다. 청각, 후각, 촉각이 모두 예민해지고 저주의 힘 자체가 내게도 느껴졌다.

내게 블랑세를 잠식하려고 하는 마법이 보였다. 나는 지팡이를 들고 술식을 써 내려갔다.

“…어떻게?”

블랑세는 당황하면서도 더 이상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설명할게. 지금은 조금만 기다려 줘. 반드시 이 저주를 해제할 테니까.”

이전 세계의 나는 종종 고난도의 스도쿠를 풀고 큐브를 잘 맞췄다.

일정한 규칙을 찾아 빈칸을 완성하면 텅 빈 마음도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점점 누구보다 빠르게 문제를 풀 수 있었다. 그런 취미가 이곳의 마법 능력에 영향을 준 모양이다.

마법을 해제하는 원리는 모두 같았다. 암호화된 술식의 답을 구해 내거나, 빈칸을 완성하거나, 흩어진 단어들을 올바르게 배열하면 된다.

오레이칼 왕국에서도 비슷한 능력 덕분에 나는 마법 대회의 우승자가 될 수 있었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내 능력을 발휘해야 해.’

나는 첫 번째, 두 번째 술식을 차례로 풀어냈다. 그러자 어떤 희망을 찾은 듯 블랑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았어. 믿을게.”

블랑세는 지팡이를 쥔 반대편 손을 꼭 잡아 주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손은 둘 다 떨리고 있었다.

‘침착해. 제발. 해내야 해.’

심장을 토해 낼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이 벌벌 떨리는 바람에 술식이 삐뚤빼뚤하게 써졌다. 머릿속으로는 분명히 다 해결할 수 있는 공식들인데 긴장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파도가 몰아치듯 공기가 전부 불안정해졌다.

블랑세와 에카르트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술식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주변의 암흑과 균열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다행히 내가 해결한 술식들이 늘어 가며 숲의 불안정한 기운도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마지막 마법진까지 파괴했다.

“또… 너인 것이냐!”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에카르트의 저주를 해제했을 때, 꿈결에서 들었던 것과 같았다. 에카르트도 모자라 블랑세까지!

“살아 있었나. 그때 분명히 사라지게 한 줄 알았는데. 대체 정체가 뭐야?”

“나는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 필멸자 따위는… 나를 다루지 못한다!”

그 기운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곧 숲을 뒤덮은 검은 기운과 균열은 모두 사라졌고 블랑세 역시 원래의 몸 상태로 돌아왔다. 주변의 마수 떼를 이미 다 해치운 에카르트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고요해진 숲은 블랑세가 내게 안겨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내 어깨는 그녀의 눈물로 점점 젖어 갔다.

“흐윽, 흑. 어흑.”

“언제 입을 열겠다는 거지?”

에카르트는 마검을 집어넣지 않고 블랑세에게 날카로이 쏘아붙였다. 내가 입 모양으로 좀 기다리라고 말하자, 그는 모두의 귓가에 꽂히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저 여자, 너무 음흉합니다.”

“네?”

“아까부터 당신을 점점 세게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러다 숨이 막히면 어떡하지요?”

하마터면 블랑세가 자결하려 했는데. 균열이 발생해 마수들이 세상을 뒤덮을 뻔했는데. 고작 나를 안고 있는 게 못마땅하단 말인가!

“저는 괜찮아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등을 좀 많이 더듬고 있지만 말이다. 한참 후 겨우 진정했는지 그녀가 훌쩍이며 말했다.

“시엘리나. 전부 다 말할게. 나는….”

“응.”

“한 번 죽었던 적 있어.”

“죽었다고?”

내가 화들짝 놀라서 그녀를 안은 손을 풀어냈다. 그러자 에카르트는 블랑세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포옹이 풀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슬쩍 내 어깨를 붙잡고 제가 있는 쪽으로 잡아당겼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내 몸이 어느 쪽으로 기울든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지.”

블랑세가 내 손을 꼭 쥐더니 다시 나를 끌어오려고 했다. 나는 한쪽 어깨는 에카르트에게 붙들리고, 한쪽 손은 블랑세에게 잡힌 상태로 혼란스럽게 질문했다.

“과거로 회귀…했다는 뜻이야?”

“그래. 나는 제국이 멸망하는 모습을 봤어.”

“제국이 멸망했다고?”

“응. 전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공작님의 저주 때문이었지.”

블랑세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회귀하거나 빙의하지 않고서야 멸망하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개소리군.”

같잖다는 듯이 일축하는 에카르트를 블랑세가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정말 하나도 기억 못 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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