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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64화 (64/115)

#64화

“아니, 괜찮아.”

시엘리나의 눈빛에는 걱정과 혼란이 담겨 있었다.

블랑세는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늘 먼저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가갔으면서, 이번에는 밀어냈으니 이상해 보였겠지.

‘오늘뿐만이 아니라 그전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블랑세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동시에 시엘리나가 걱정하지 않길 바랐다.

“블랑세. 솔직히 말해 주면 좋겠어.”

시엘리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상태에 대해 이미 알아차렸을까. 안색이 나빠 보여 걱정했던 걸까. 하지만 시엘리나의 질문은 블랑세에 관한 게 아니었다.

“전에 에카르트를 지켜봐 주겠다고 한 말. 진심이었지?”

그 말에 뾰족한 가시가 블랑세의 심장을 찔러 오듯 아팠다. 적어도 지금은 시엘리나의 관심사가 온전히 제게만 집중되었으면 했다.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온 거야?”

그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다니 블랑세는 실망했다.

“중요한 이야기라서.”

“그건 안 중요해!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나를 더 걱정해 달란 말이야.

그 말이 블랑세의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시엘리나는 이런 오해는 빨리 풀고 싶었기에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블랑세. 네가 황후 폐하께 에카르트의 상태를 보고했다고 들었어.”

그러자 블랑세의 말문은 잠깐 막혔다.

‘다비온이 전했구나.’

블랑세의 파란색 눈동자가 더없이 쓸쓸해졌다. 차라리 오해를 해명하는 대신 이참에 정을 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뒤를 돌아서 일부러 모질게 말했다.

“그래. 내가 그랬어.”

“에카르트의 저주를 풀었다는 말도 했어?”

“곧 하려고 했지.”

“…왜 그랬는지 말해 줘.”

그야 내가 아니었다면 황후는 시엘리나가 떠나고 다른 심복을 보내려 했을 테니까.

그런 말은 애써 속으로 삼키고, 블랑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악역을 연기했다.

“나는 처음부터 첩자였어. 황후 폐하께서 내게 포상한다고 하기에-”

“거짓말은 관둬!”

고작 저런 허접한 변명으로 인정하려 하다니, 시엘리나는 저도 모르게 블랑세에게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시엘. 기껏 말해 줘도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 거야? 나는 네 믿음을 이용했고. 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공작님을 이용했어.”

블랑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시엘리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블랑세의 멱살을 잡았다.

“뭐라는 거야!”

원망이 쏟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엘리나는 그저 슬퍼 보였다.

“나는, 나도. 예전부터 네가 신경 쓰였다고! 언제쯤 나를 믿고 솔직해질래?”

분명히 첩자라고 자백할 뿐만 아니라 계속 모질게 대했는데 여전히 자신을 염려한다니. 블랑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착해 빠졌어.’

시엘리나가 블랑세 자신을 아끼는 마음은 충분히 확인받았다. 그러므로 끝까지 숨기는 게 보답하는 길이었다.

‘시엘리나는 물론 내가 왜 이랬는지 알아내려고 하겠지만.’

신전의 힘은 아마도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 그런 거대한 일 따위 시엘리나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블랑세 자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녀가 어떤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고, 오래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블랑세였다.

“시엘리나.”

“왜.”

“나와 함께한 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랄게.”

블랑세가 잠시 손을 들어 올리자 소매 끝이 펄럭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시엘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블랑세가 작은 유리병 뚜껑을 연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병 속에서 수면제의 연기가 새어 나올 때야 시엘리나가 간신히 말했다.

“야! 너….”

“나를 찾지 마.”

“설마-”

시엘리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블랑세는 얼른 그녀가 다치지 않게 붙잡았다.

부축하느라 드러난 블랑세의 손목까지 저주로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봤어도 모르겠지.’

그리고 품에 안긴 시엘리나를 애정, 미안함, 아쉬움, 고마움, 슬픔이 담긴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꼭 행복하게 살아.”

블랑세는 시엘리나를 침대에 기대게 한 후, 그대로 창문 밖을 가볍게 빠져나갔다.

***

“왜 네가 도망치는 것이지?”

속삭임 같던 저주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블랑세는 가능한 시엘리나가 있는 장소에서 계속 멀어졌다.

워프 마법에 필요한 재료는 이미 황후에게서 받았다. 재료를 전부 소진한 후에는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풀밭이 마구 블랑세의 발길에 지르밟히고 나무들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블랑세의 손에는 단검이 꼭 쥐어져 있었다.

“이번 생조차 같은 결정을 내리려 하다니!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터.”

“같은 결정? 네 기억이 두 개인 것을 말하는 것이냐?”

“너 같은 미물은 모르겠지.”

이전 생에서 에카르트가 폭주하고 나자 마물이 넘쳐나 수많은 사람이 죽은 걸 알고 자결한 이전과 다르다.

블랑세는 그땐 도저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수 없어서 죽음을 택했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삶을 지켜 주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시엘리나의 삶을 말이다.

저주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완전히 지배당하기 전에 목숨을 끊어야 했다.

지금도 저주는 더욱 강해지는 중이니 곧 있으면 통제 범위를 벗어나겠지.

이 악마는 블랑세의 몸에 들어온 상태.

만일 빠져나갈 수도 없다면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누구도 없는 곳으로 가서 이 악마와 함께 동귀어진하겠다고 그리 마음먹는 블랑세였다.

“그 남자보다 강해지기 위해 내 힘을 얻으려던 거 아니었나?”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나는 그저 너를 편하게 만들어 주려는 거야, 블랑세. 내 존재를 받아들이면 편해질 터. 나와 함께 공생하는 거야.”

“편해진다고? 거짓말! 공생 따위 하지 않아!”

“그 여자만은 살려 줄게! 세상에 둘만 남는 것도 퍽 낭만적이잖아.”

마지막 말을 듣고 블랑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온몸이 불에 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좋아해 줄 리가 없잖아.”

블랑세는 간신히 다시 저주의 힘을 억누른 채, 그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곳으로 도망쳤다.

***

“…엘리나.”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잠시 뒤척이다가 눈을 떠 보니 익숙한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에카르트가 시원한 물 한 컵을 건넸다. 덕분에 아직 남아 있던 수면제의 약효가 깼다.

“블랑세는요?”

“기사단과 사냥개들이 추격 중입니다. 이번엔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떠나기 전에 블랑세에게서 에카르트의 저주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왜 처음 만났을 때 눈치채지 못했을까? 블랑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황태자의 말이 사실인지 물어볼 게 아니라 그녀의 상태를 먼저 살펴야 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과 서글픈 마음마저 들었다. 한편으로는 여태 많은 시간을 함께했으면서도 혼자 일을 해결하려는 그녀에 대한 원망도 생겼다.

“에카르트.”

이름을 부르자 안광을 내뿜던 눈동자가 천천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말씀하십시오.”

“블랑세, 지금 잡으러 가요.”

아까 그 순간이 블랑세와 마지막이 되어선 절대 안 되었다.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그런 저주가 새겨졌다면 그녀의 판단은 뻔했다.

게다가 블랑세가 했던 말로 미뤄 보아 더더욱 확신이 섰다.

‘착해 빠졌어.’

더 큰 후회를 하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야 했다. 일단 블랑세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어디로 갔을지 예상 가는 장소가 있어요. 반드시 늦기 전에 찾아내야 해요!”

“좋습니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반드시-”

“해치러 가는 거 아니에요!”

에카르트는 언제 기대했냐는 듯이 처연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 나는 에카르트의 눈가가 붉은 걸 뒤늦게 눈치챘다. 내가 기절해 있을 때 내 손 위에 겹쳐진 무게감도 떠올랐다.

‘…울었나?’

하지만 지금은 한시 빨리 이동해야 했다.

“가요. 워프 마법을 사용해서.”

마법진은 직접 가 본 장소만 이동할 수 있다. 내가 떠올린 장소 근처는 성전에서 재료를 얻기 위해 한번 가 본 적이 있기에 다행이었다.

나는 문 근처에서 대기하던 헬라에게 지시했다.

“헬라. 같이 가 줄 수 있어요?”

“그럼요, 공왕님.”

“이동하는 좌표를 다르게 설정할 테니, 그 주변에서 마차를 구해 숲 길목으로 와 주세요. 왕복할 만큼 충분한 재료는 없어서.”

“네, 알겠습니다!”

황태자에게 받은 재료로 나는 워프 마법진을 순식간에 그렸다. 와중에 에카르트는 내 마법을 또 대단해했다.

“시엘리나. 못하는 마법이 없군요.”

“제 손을 잡아요. 헬라도 어서요.”

재빨리 발을 올려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자 마법진의 복잡한 기호가 환하게 빛났다.

***

순식간에 두 좌표를 동시에 그려 헬라의 좌표는 다르게 설정한 후. 에카르트와 나는 윈터로드 제국의 북서쪽에 있는 숲에 도착했다.

어두워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장소였다. 이따금 풀벌레 소리나 동물 울음소리만 들렸다.

나는 주변의 생물을 살펴봤다. 노루발꽃과 커튼 버섯. 분명 외곽 숲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인데, 전부 시들어 있었다. 불안함이 한층 짙어졌다.

“시엘리나. 그 작자가 여기에 있습니까?”

“그럴 거예요.”

블랑세는 원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고민했다. 성전과 숲 중 어디서 최후를 맞이할지 말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안식을 찾길 바라며 성전에서 죽음을 택한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흑막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니라 사람이 없는 곳을 선택하겠지.

“만약 여기가 아니면 어떡하…죠?”

내가 초조하게 지팡이를 만지작거리자 에카르트가 든든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기사단이 추격했을 테니 수확이 있을 겁니다.”

그때 에카르트가 풀숲을 바라보았고 동시에 마검을 소환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검기가 빠르게 움직인 것과 동시에 검은색 슬라임 한 마리가 몸통이 갈라져 죽었다.

‘하급 마수긴 해도 여긴 마수가 출몰하는 숲이 아닌데.’

주변에 검은색 빛 알갱이가 작게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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