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몇 분은 되겠죠, 아마.”
그러자 그는 주인을 따라오지 못하게 된 강아지처럼 못마땅해했다.
에카르트를 문밖에 세워 둔 후. 나와 다비온은 맞은편에 앉아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릎 위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그의 말을 들었다.
“제국에 이렇게 일찍 돌아올 줄 몰랐겠죠.”
“네, 그렇습니다.”
“공녀께서 공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온유한 성격을 가졌더라도 황태자는 황태자. 다비온의 목소리와 눈빛에 힘이 실렸다.
“지금이라도 에카르트와 거리를 유지하세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선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러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제국을 떠날 시간이 부족했다면 제가 그를 붙잡아 두죠.”
아니. 이제는 그렇게 말도 없이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나를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한 가지의 이유만 말했다.
“사실 공작님께서 다시 저주의 통증을 호소하셨습니다.”
“공녀라면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겁니다.”
다비온은 잠시 침묵하더니 통보했다.
“그 후에는 떠나세요. 타르 공국보다 더 멀고, 에카르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요.”
“…….”
나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내뱉은 다음 말했다.
“황태자 전하.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에카르트와 블랑세와 함께한 시간. 마차 안에서 나눈 진심. 나를 아끼는 공작가의 고용인들. 그런 경험들의 결론은 하나였다.
“앞으로는 그가 강하다는 이유로 혼자 있게 두지 않을 겁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네. 처음부터 그래야 했습니다.”
다비온은 어떻게 반응할지 고민하더니 결국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되지만 고맙기도 하군요. 이렇게 공녀가 든든하게 곁을 지켜 주어 그가 때론 부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더 많은 용기를 내지 못하여 죄송하군요.”
다비온이 우리를 공개적으로 돕는다면 나는 당연히 황실에 더 충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
평민 후궁으로 입궁한 아렌다 황후는 처음부터 황후의 재목으로 거론된 건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그 당시만 해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다비온을 낳자 발톱을 드러내고 수단과 방법을 불사해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다.
‘후궁뿐만 아니라 황제의 친인척까지 전부 유배를 보내거나 누명을 씌워, 오직 황제의 곁에 그녀와 다비온만 남게 했지.’
백번 양보해 그들이야 황위 계승에 위협이 되는 존재라 해도 에카르트는 황위와 무관했다. 나는 이참에 그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사실, 에카르트는 분명 제국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데… 그러시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은근슬쩍 주어를 뺀 채 말을 꺼내자, 다비온은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사실 에카르트에겐 황실의 피가 섞였습니다.”
“네-에?”
“선대 크로덴 공작 부군께서는 제5황자 출생이었습니다. 백마법에 뜻이 생겨 신분을 숨긴 채 백마법사가 되고, 성전에서 선대 공작을 만나 혼인하였죠.”
나는 독자에게 비밀이 많던 작가를 잠시 욕했지만, 황후가 그를 왜 견제하는지는 이해가 갔다.
‘에카르트도 황위를 이을 자격이 되는구나. 다비온이 비록 황태자 책봉을 받았더라도… 능력 차이가 상당하니까.’
다비온은 잠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3년 전부터 북부 마수 또한 출몰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안개 낀 산맥 너머로 접근할 수는 없지만.”
북부가 마침내 정리되면 에카르트가 세력을 확장해 황권을 넘볼까 봐 우려된다는 의견도 있다고 다비온이 덧붙였다.
“공작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저 역시 그리 생각하지만 어떤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죠. 그러니 그의 능력을 최대한 숨기려던 겁니다.”
그럼 다비온이 완벽한 황제가 될 때까지 계속 견제받으란 말인가.
‘그 후에는 괜찮고?’
나는 이 방법이 최선인가 하는 반발심이 문득 들었다.
“그보다 오늘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다비온이 몸을 숙이고서는, 차분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블랑세 양을 주의하십시오.”
“블랑세…요?”
“네. 에카르트를 경계하는 세력과 만나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아까도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셨지요. 개인적인 믿음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 없더군요.”
어안이 벙벙한 내게 다비온은 충고한 후 자리를 정리했다.
“이건, 필요할 때 쓰세요. 블랑세 양도 어머니께 받았을 겁니다.”
그가 책상에 워프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재료들을 내려놓았다.
***
블랑세는 방에 들어온 후 문을 잠그고 소매를 들춰 보았다. 피부가 불길한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크로덴 가문의 사람이 아니잖아.”
그러자 인간의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운 기괴한 음성이 들렸다.
“…누구?”
블랑세가 묻자 머릿속에 짧은 문장이 들렸다.
“네 몸을 사용할 절대적인 존재지.”
곧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두통이 몰려왔고, 심장을 관통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고통이 뿌리내리듯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작은 벌레가 핏줄에 들어와 온몸을 파먹는 것 같았다. 고통은 심장에서부터 시작해 퍼져 나갔다.
‘대체 이건… 무슨 마법이지?’
블랑세는 괴로운 와중에도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자신도 이 힘에게 말을 걸 수 있으리라 믿고 말을 걸었다.
“…신전 지하에 있던 힘. 크로덴 공작가와 무슨 관련이 있지?”
“감히 내게 질문하다니! 내 목소리를 듣기만 하는 것도 영광이거늘.”
낄낄거리는 괴상한 웃음소리는 결국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치명적인 고통에 블랑세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가슴을 찢어 심장을 꺼내 버리고 싶을 만큼 지독한 고통이었다. 알 수 없는 힘이 계속 블랑세를 뒤흔들었다.
“갖고 싶은 건 전부 갖게 하고,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주겠다. 필멸자인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내 힘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거라.”
블랑세는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이건 분명… 에카르트를 파멸시킨 저주야.’
하지만 시엘리나가 저주를 해제했을 텐데. 어째서 세상에 남아 있단 말인가?
이것이 무슨 원리인지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신전 지하의 수상한 힘으로 에카르트를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건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결국 이 저주가 자신을 조종하고 세상에 균열을 만들어 내 제국을 파멸시킬 것이다.
저주 역시도 블랑세의 기억을 훑어 내려갔다. 가늘고 긴 뱀이 귓속을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우리 구면인가?”
그러자 블랑세의 기억이 최근의 것부터 하나하나 떠올랐다.
제국을 떠났다가 돌아온 시엘리나.
지하에 숨겨져 있던 힘.
다비온과 에카르트 그리고 팔찌를 건네주던 시엘리나.
시엘리나와 성전에서 만났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이윽고 자신을 해치려다가 결국 살해당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블랑세는 입을 틀어막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네 기억. 왜 같은 시간에 두 개의 사건이 존재하지?”
“그만, 그만해!”
“발버둥을 쳐도 결국엔 나를 받아들일 것이다!”
블랑세는 초월적인 의지력으로 간신히 저주의 목소리를 억눌렀다.
겨우 정신을 유지하고 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테지. 어째서 이 힘이 자신과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믿었는지!
끔찍한 고통이 퍼져 나가고 피 대신 저주로 온 신경이 채워지는 듯했다.
“으윽.”
블랑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흑막을 막으려고 했는데 흑막이 될 위기에 처했다니. 잊으려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쯧, 마음이 약해서 그래.”
“신관 출생이었다는데 죄책감이 심했나 보지.”
“뭐 다른 이유가 있던 거 아닐까? 황태자 전하가 바람을 피웠다든가.”
이런 괴로운 기억은 저주가 자신을 잡아먹도록 더욱 부추길 것이다.
저주는 숙주가 없다면 활동하지 못하는 기생충 같은 것이다. 저주를 풀 수 없다면 무효화하는 방법은 단 하나.
‘같은 참사를 반복할 수는 없어. 결국 나는 이번 생에도 같은 결말을….’
여태까지 해 왔던 일들이 우스웠지만 자조할 시간도 없다.
‘아냐. 이번에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야. 이게 옳은 일이야.’
마음을 정했으면 어서 공작성과 멀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떠나가기가 싫었다.
‘나는… 결국 이런 운명일까?’
도저히 전과 같은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저주에 휩쓸린다고 하더라도 삶을 끝내기 싫었다.
어째서 이렇게 바뀌었을까? 아니. 애초에 자신의 상태가 의심스러웠으면서도 왜 공작성으로 왔을까. 그녀는 노크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블랑세. 안에 있어?”
이 모든 이야기의 가장 큰 변수. 바로 시엘리나였다.
***
시엘리나는 블랑세가 황후의 심복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도 블랑세가 왜 그랬는지는 내가 직접 들을 거야.’
그래서 황태자가 나간 후 곧바로 귀빈실 문을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에카르트가 흉흉한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저, 계속 얌전히 기다렸습니다. 그 자식은 왜 찾아왔답니까?”
“당신을 걱정해서 오셨대요.”
“그 인간이 당신에게 허튼 소리를 지껄일까 봐 그게 더 걱정입니다.”
시엘리나가 블랑세의 방으로 향하자 그의 불평은 더 심해졌다.
“또 저를 혼자 두실 겁니까?”
“잠시만 참아요. 10분만.”
“딱 10분만 기다리겠습니다.”
에카르트는 시엘리나가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손목시계로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시엘리나는 블랑세의 방을 찾아가 노크했다.
“시엘.”
블랑세가 저주의 고통을 간신히 억누르며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식은땀이 나오고 얼굴이 창백했지만.
“…블랑세. 어디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