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이전에 리셀은 체닐이 쓰던 물건도 전부 불태워서 흔적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단서 하나쯤은 있을 터.
라멜은 시간이 남아돌기도 하고 집안일에 손을 놓은 어머니 대신 관리해 왔기에 공작성에 대해 잘 알 거라고 믿는 리타였다.
“응? 왜?!”
“그 해충의 마법은 아무래도 모친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지하에 방이 있던데… 데려다줄까?”
“지하에요? 부탁드리죠.”
라멜은 승마장에서 돌아온 후 리타를 데리고 체닐의 방을 찾았다. 기품 없고 초라한 방을 둘러본 리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전 공작 부인이 여기서 여생을 보냈단 말입니까?”
그래도 명색이 공작 부인이 지내던 장소라고 하기엔 너무도 열악한 환경이었다.
리타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서랍의 먼지를 발견했다.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라멜이 머뭇거리며 털어놓았다.
“사실 서랍에서 레드 다이아몬드 팔찌를 찾았어.”
“레드 다이아몬드라. 어디 있죠?”
“무도회에서 크로덴 공작에게 뺏겼…어.”
라멜은 제멋대로 행동했다가 제대로 된 소득도 없었기에 선뜻 말하고 싶지 않았다.
‘멍청한 년 같으니.’
일말의 단서를 놓친 것 같아, 리타의 목 끝까지 욕설이 차올랐다.
체닐이 크로덴 가문과 연결 고리가 있는지 알아낼 기회였는데 그걸 날려 버리다니! 그래도 제보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어쩔 수 없죠. 제가 따로 알아볼게요.”
“리타. 위험한 일을 할 생각은 아니지?”
“걱정 마세요.”
라멜의 걱정은 이후에도 소시지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리타는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만약 아빠가 엄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 엄마도 이런 골방에 처박히면 어떡해?”
“전 공작 부인과는 입장이 다르지요. 해충과 달리 저는 후계자가 될 사람이기도 하고요.”
“후계자 말인데. 좀 더 빨리 되어 봐. 너도 애교를 부리면 아빠가 좀 더 좋아할지도….”
어차피 공작 작위는 당연히 제 것이고 대마법사가 될 힘 또한 얻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리타에게 더 중요한 건 아버지의 애정 따위가 아니라, 눈엣가시인 시엘리나를 누를 힘과 권력이었다.
리타가 하찮게 무시하자 라멜은 소심하게 “아냐, 내가 노력할게.”라고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동생이지만 가끔 무서울 때가 있었다.
***
고작 두 달 정도 떠났을 뿐인데. 다시 찾은 공작 저가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성을 관찰했다.
“뭔가 바뀌었네요.”
기분 탓이 아니라 벽돌색도 좀 더 밝게 바뀌고 창틀 스타일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에카르트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일부 시설을 보수했습니다.”
“보수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쉈다가 새로 세운 것 같은데요.”
“네. 당신과 그 인간을 찾으며 겸사겸사 부쉈지요.”
대체 어떻게 찾아다닌 건지. 보기만 해도 이 성을 재건하느라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고 고용인들이 고생했을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 밖이라 한숨만 나왔다.
“생각해 보니 그 인간 말입니다. 당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도 저와 북부에 다녀온 것 아닙니까?”
“아, 아닌데요.”
블랑세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거짓말했다. 그러자 에카르트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테니 더 이상 묻지 않지요. 그때는 공작성이 아니라 제국이 무너질 겁니다.”
“제가… 마검의 힘은 사람들을 지키는 데에 쓰라고 했을 텐데요.”
“물론 마검이 아니라 맨손으로 부수면 됩니다.”
“도구가 문제가 아니에요!”
이미 지난 이야기지만 나는 단호히 말했다. 혹시나 에카르트가 블랑세에게 화풀이하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블랑세는 어디에 있어요?”
“그 작자가 보고 싶습니까? 저는 당신을 찾으러 떠났기에 북부에서 돌아온 후의 행방은 잘 모릅니다. 궁금하다면 맹견을 풀어서-”
“블랑세는 사냥감이 아니에요!”
같이 지내려면 그를 위한 도덕책을 따로 집필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던 그때 내 뒤로 반가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엘?”
“블랑세!”
무사히 만났다는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블랑세를 꼭 껴안으려 했다.
“자, 잠깐만.”
하지만 블랑세는 시엘리나를 보고도 뒷걸음질 쳤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고전을 치르고 온 듯이 엉망이었다. 평소라면 차분한 머리카락도 산발이 된 데다 옷에도 재와 먼지가 묻었다.
“블랑세. 상태가 왜 이래?”
그러자 블랑세가 옷을 털며 조금은 힘겹게 웃었다.
“공작성으로 너를 만나러 왔는데 사냥개에게 쫓겼지 뭐야. 하마터면 물릴 뻔했어.”
“…에카르트?”
내가 해명을 요구하자 그는 기가 차다는 듯이 대꾸했다.
“저 인간의 모함입니다. 아직 개를 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저 여자가 물리면 당신이 치료하겠다고 나설 거 아닙니까?”
하다못해 둘이 친구 사이로라도 지내면 좋으련만 여전히 갈 길이 멀고도 멀었다. 나는 그를 가르치는 건 뒤로하고 일단 블랑세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블랑세. 나, 당분간 공작성에 있을까 해.”
“당분간?”
에카르트가 끼어들더니 사소한 단어에 집착했다. 나는 이 집착남의 뜻에 적당히 맞춰 줘 얼른 떼어 내기로 했다.
“오래?”
“아니. 평생.”
이 성의 주인께서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는 것도 피곤한지 블랑세는 아까보다 더 지친 표정이 되었다.
“시엘. 나, 일단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간만에 봐서 반가운데 나중에… 말하자.”
“어… 그, 그래. 에카르트, 블랑세가 쉴 만한 곳이 있을까요?”
“그럼요. 아무 방이나 들어가라고 하십시오.”
에카르트의 말을 듣고 블랑세는 잠시 생각하다가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쪽은 공작성과 완전히 반대편이었다. 내가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의아하게 물었다.
“어디 가? 쉰다며.”
“…….”
블랑세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나는 에카르트에게 안내를 요구했다.
“블랑세가 있을 방을 알려 주세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에카르트는 내 한 손을 붙잡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는 현관문과 가장 가까운 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블랑세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의 손을 놓고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내가 블랑세를 따라가려고 하자, 에카르트는 문을 막았다.
“저 인간은 내버려 두십시오. 당신도 쉬러 갑시다.”
나는 블랑세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에카르트는 계단을 걸으며 이번에는 나를 추궁했다.
“시엘리나. 혹시 안는 게 습관입니까?”
“네? 아닌데요.”
“그런 습관은 제게만 들이십시오.”
“말도 안 되는 말….”
“왜 말이 안 됩니까? 잠시 북부로 출정한 사이 당신이 떠났던 게 더 말이 안 됩니다.”
원래 에카르트는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앙금을 남길 필요도 없이 그때그때 죽이면 됐기 때문에 살해당한 등장인물만 해도 오십은 넘었다.
나는 그에게 허허 웃으며 부탁했다.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할까요?”
“그러지요.”
귀빈실 문 앞에 다다른 그때 누군가 마라톤 선수처럼 복도를 질주해 왔다.
“공녀님, 돌아오셨군요!”
“…니나!”
니나는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흑흑. 어떻게 말도 안 하고 가실 수 있어요. 저는 공녀님이 잠시 외출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디저트를 만들고 기다렸는데! 공작님이 성을 붕괴시킬 뻔하고 나서야 떠나신 걸 알았다고요.”
“미안해요.”
내가 니나의 어깨를 토닥이려고 하자 에카르트가 으르렁거렸다.
“이것 보십시오. 역시 습관이군요.”
나는 저 쩨쩨한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니나를 살짝 안아 줬다.
훌쩍이는 니나를 데리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왔다. 에카르트는 마력으로 작동하는 캔들 워머를 확인하고서는 떡하니 소파에 앉았다.
“저도 조금 피곤하네요.”
이제 그만 나가 달라는 뜻인데 그는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그럼 제게 기대십시오.”
“…잠시 씻고 혼자 있고 싶은데.”
“하아. 어쩔 수 없지요. 이따 다시 오겠습니다.”
살벌한 기세를 내보이던 주인이 마지못해 나가자 니나는 다시 말이 많아졌다. 나는 욕실로 가는 대신 에카르트가 앉았던 소파에 잠시 기댔다.
“저, 공녀님. 공녀님이 공작성을 비우신 사이 블랑세 양을 잠시 만났거든요.”
“언제요?”
“북부에서 돌아오셨을 때요. 제가 공녀님이 보고 싶지 않냐고 은근슬쩍 여쭤봤더니, 많이 그립다고 하시더라고요.”
“블랑세가요?”
“네. 그러니 아직 가능성이 있어요!”
‘가능성?’
아. 혹시 블랑세에게 집착해서 역지사지를 알려 주려던 일 말인가. 나는 둘의 성격이 어떻든 당분간 곁에 남기로 결심했으니 그 문제는 되었다.
“괜찮아요. 저, 공작성을 떠나 있는 동안 생각을 정리했으니까요.”
“생각을… 정리하셨다고요?”
“네. 새롭게 마음도 다잡았고.”
내가 의지를 담아 말하자 니나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우와, 새롭게 시작하실 준비가 되었군요! 그럼 이제 공작님과 연결해 드릴까요?”
“…에카르트 이야기가 왜 나와요?”
“네에? 공작님도 아니면… 헬라 님?”
니나가 몇 명의 이름을 더 대기 시작하자 나는 점점 더 갈피를 잃어 갔다.
석양이 방 안에 들어와 주황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마차를 탄 피로가 쌓였는지. 오는 내내 에카르트를 열심히 달랬기 때문인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 있었다. 밖에서 익숙한 말소리가 들렸다.
“공왕께서 주무신다면 돌아가.”
“그래. 하지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아까 한 번에 말하면 되었을 것을, 번거롭고 쓸데없고 귀찮은 놈 같으니.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인지 나도 함께 듣지.”
곧 노크 소리가 들렸고 니나가 먼저 문밖을 확인했다.
그 소리에 졸음에서 깬 나도 서둘러 나가 보니, 거기엔 잠행용 의상을 입은 다비온이 서 있었다.
“…황태자 전하.”
“이 자식이 할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돌려보내고 나중에 만나도 됩니다. 백 년쯤 후도 좋겠군요.”
“아뇨. 지금 이쪽으로 모실게요.”
나는 옆에 마련된 응접실로 안내했다. 에카르트는 황태자보다 먼저 들어오려고 했다.
“잠시 기다리겠어요?”
“잠시면 몇 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