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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59화 (59/115)

#59화

부하에게 각박하던 그가 육아휴직은 허가했다니 충격이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단어의 뜻이 바뀐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는 의아함을 눈치채고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가끔 에카르트를 잘 알 수가 없어서요.”

“무슨 의미지요?”

“좋은 뜻이에요. 정말로.”

당신이 단순한 흑막이 아니라 여러 인간적인 면모가 있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이 점점 마음에 스며들어 왔다.

며칠 후 델은 공국에 와 줬다. 북부의 보좌관으로 있어서 그런지 옅게 난 주름까지 강인해 보이는 여자였다. 체격은 다부졌고 금발의 머리는 하나로 땋아 올렸다.

“공왕님께 인사드립니다. 델입니다.”

“반가워요, 델.”

우리는 무리한 개혁을 추진하는 대신 일단 완만한 방법을 선택했다. 세금 설정, 환수한 재산 재분배, 군사 재배치…. 몇 가지 복지 제도와 시설도 손보느라 애를 먹었다.

“무분별한 벌목을 하여 토지가 유실된 상황입니다만, 마법으로 복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사자를 토장한 3지구에 전염병이 돌까 봐 우려됩니다.”

“물자 수송은 다른 마을에서 하는 게 편할 겁니다.”

며칠 지켜본 결과 그녀는 믿음직할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 척척 처리했다. 그 능력이 마음에 드는 데다 에카르트가 신뢰하는 수하였기에 바로 보좌관에 임명했다.

델은 기뻐했다. 아이와 남편도 곧 공국으로 이주할 거라나.

나는 델과 함께 수많은 공문서에 왕실 도장을 찍으며 공국을 정비했다. 유실된 토지 몇 군데를 복구하고,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구휼미를 풀었다.

다행히 에카르트가 치안 기사들을 진압한 뒤 빌론을 포획하여 영웅처럼 추앙받고, 내가 마법을 활용해 최대한 상황을 수습했기 때문인지 국민들은 나를 따라 주었다.

나는 성력으로 나머지 사람들도 치료하며 민심도 얻을 수 있었다.

“제가 잘하고 걸까요?”

“네. 그야말로 성군 중의 성군이시군요. 아예 제국을 버리고 여기서 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고민에 빠질 때면 에카르트가 열심히 추켜세웠다.

‘백마법으로 시작한 관계인데 어느새 나를 왕으로 만들어 주다니.’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당장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 집중했다.

사실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왕궁에서 머물고 있는 샤를도 시간이 나는 대로 열심히 돌봐야 했다.

“저도 치료해 주십시오.”

그럴 때마다 에카르트가 끼어들었지만 말이다.

“저주 말인데요. 이제 정말 안 아파요?”

“네. 당신과 함께 있으니 말입니다.”

“흐음. 원인이 뭘까요?”

“분석은 제국으로 가서 하면 됩니다.”

그는 가능한 빨리 나를 제국으로 데려가야 안심할 것 같았다. 아니면 정말로 공국에 눌러 붙든가 말이다.

***

며칠 후, 에카르트가 수인족 수장과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샤사와 샤를의 어머니였다.

원래는 남매의 아버지가 부족을 이끌었는데, 빌론과 전투해서 죽은 후 그녀가 새 우두머리로 추앙받았다나. 말하자면 남매는 왕자와 왕녀 같은 위치였다.

“반갑습니다, 공왕님.”

공왕님이라는 칭호는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태연한 척했다.

나는 수인족을 해방한다고 선언하고, 족장과 보상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하여, 원래 거주하던 산맥 일부를 돌려드리고 재건을 돕겠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또한 그간 무임금으로 일한 수인에게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일해 주신다면 충분한 보수를 드리고요.”

“…….”

“또한 빌론은 무기한의 노역에 처할 예정입니다만, 달리 원하는 처벌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영주민들과 논의하겠습니다.”

“전부 공작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터무니없이 합병을 진행한 수인 민족을 독립시키고, 관련된 법 몇 가지를 개정했다. 공국의 부패를 척결하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윽고 타르 공국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영지 업무를 보좌관에게 완전히 위임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수장인 국가를 떠나려니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그래도 내가 함께할 사람은 에카르트니까.’

보좌관 델과 새로운 신하들뿐만 아니라, 샤사 가족도 나를 배웅해 주었다.

“공왕께 그걸 드리렴.”

족장이 샤사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샤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가와 내게 뭔가 내밀었다. 하얀색, 금색, 붉은색 세 줄이 엮인 끈이었다.

“흠흠. 받아, 인간.”

“뭔데?”

“보상을 주겠다고 했잖아.”

잊고 있었는데 정말 보상이 있었을 줄이야. 끈을 받자 각각의 색에서 신비로운 힘이 느껴졌다. 샤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마수가 가득하던 지대에서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느냐?”

“은둔술에 뛰어나서?”

“아니. 우리는 숨어 지내지 않았다.”

“그럼 귀여워서 그런가 보네.”

그러자 대화를 가만히 듣던 에카르트가 구둣발로 지그시 땅을 짓이겼다. 헬라는 손수건을 꺼내 제 이마에 맺힌 땀을 꾹꾹 눌렀고.

“물론 그것도 있겠지… 가 아니라! 수호신의 힘 덕분이다.”

“수호신의 힘?”

“응. 그 힘은 수인족을 마수로부터 보호했지. 우리의 염원을 통해 이 끈에 그 힘을 담았다. 끈을 갖고 있으면 마수는 네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그런 능력이 있다니. 정말 내가 가져도 돼?”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수백 년 전에 어떤 모험가에게도 선물로 줬다고 하더군. 부디 좋은 쪽으로 사용해 다오. 게다가.”

샤사는 우쭐거리며 덧붙였다.

“수호신의 힘을 불러낸다면 풍랑과 안개도 물리치고, 날씨도 맑게 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안개… 수호신의 힘은 어떻게 받는데?”

“그건 수호신 님의 뜻에 달렸지.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강한 전사를 좋아하신대.”

더 알려진 건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힘을 연구하면 북부의 마수를 상대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고마워, 샤사. 이 끈은 지팡이에 묶어서 간직해야겠다.”

“뭘.”

에카르트는 뒤에서 헛기침하며 일부러 관심을 끌었다. 아까부터 계속 못마땅한 티를 내는 그를 보니 반발심이 생겼다.

나는 샤사에게 일부러 더 상냥하게 덧붙였다.

“백마법이 필요하거든 또 연락해. 나도 수인족의 힘에 대해 더 연구할 게 있고.”

“정말?”

“당연하지.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시엘리나. 이제 갑시다.”

에카르트의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가 슬쩍 내 손에 깍지를 끼더니 마차가 있는 쪽으로 잡아당겼다.

나는 마지막으로 타르 공국을 돌볼 보좌관에게 당부했다.

“그럼 영지 사정은 일주일마다 전달해 주세요. 늦어도 다음 연간 회의 때 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공왕님.”

공왕님이라는 호칭에 슬슬 적응이 되어 갔다.

나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델은 내게 격식 있게 예를 갖췄다.

나는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에카르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샤를은 샤사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다음에 또 봐요, 시엘리나 공왕님.”

엄밀히 말하자면 타르 공왕이지만 나는 굳이 칭호를 수정하지 않았다.

나는 남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건강히 잘 지내라고 당부했다. 평화롭게 잠시 지내려던 공국을 뒤집어엎고 제국으로 가다니.

‘평화와 한 걸음 멀어졌구나.’

그래도 조금 번거로울지언정 상황을 더 낫게 바로잡는 게 옳은 일이니까.

***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동안 에카르트는 내 안색을 살폈다.

“날씨가 흐리네요.”

나는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가는 데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시엘리나, 혹시 공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아뇨. 저주가 그렇다니 방법을 찾을 때까지 책임져야죠.”

“그럼 제가 다 나으면 또 떠날 겁니까?”

“찾아낸다면서요.”

그의 짙은 눈썹이 내려갔다.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면 눈썹이 올라가거나 인상을 찌푸리던 그였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처연한 표정일까.

“…제가 싫습니까?”

“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원작에서 누구의 의견도 묻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던 그였으니까.

‘내게 집착하기는 해도 블랑세처럼 감금하지 않았지.’

그녀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몰살했으면서.

지금의 그는 나와 가까운 블랑세는 살려 두었다. 그랬기에 나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가끔 그에게 설렜고, 그의 사연이 안타까웠고, 집착이 버거웠다.

“그런 게 아니면 뭡니까.”

“제 의견이 중요한가요?”

“중요합니다.”

“그럼 공작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저는 그저… 당신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묘했다. 블랑세에게 <곁에 두고 싶다.>고 했는데. 내게는 “곁에 있고 싶다.”라고 말하다니.

“백마법 때문에요?”

“처음엔 그랬지만, 이제는 백마법이 아니라도 없어서 안 될 존재입니다. 당신은… 소중해요.”

소중하다. 블랑세에게 그렇게 말한 적 없었다. 아니. 그는 무엇 하나 소중한 게 없었다.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저주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았겠지.

처음 듣는 말들과 난처해하는 태도가 전부 낯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감정을 쏟아 냈다. 꽉 잠긴 수도꼭지가 터져 나오듯 그가 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멋대로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이 전부 과거가 된다고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만큼 너무 아팠습니다.”

“미안해요. 그렇게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린 나이부터 저주에 시달렸고 내가 떠난 후에도 계속 불안했던 남자. 그를 향한 연민과 가책이 뒤섞여서 마음이 아렸다.

문득 그를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엘리나. 당신이 어떻게 해야 저를 버리지 않을 겁니까? 제가 해 드린 것들이 부족합니까?”

“부족하긴요. 너무 많죠. 그저, 당신이 제 미래를 정하려고 했으니까. 그게 부담스러웠을 뿐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제 곁에 계속 남아 주실 겁니까?”

그것 또한 미래를 재촉받는 일이지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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