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곁에 있어야죠.”
“먼저 말해 주셔서 좋군요.”
그러자 그가 마치 내게 보호받기를 원했다는 듯이 웃었다. 웃는 얼굴에 뭐라고 쏘아붙일 수도 없었고.
그런데 내가 떠난다고 하니 샤를은 겁을 먹었다.
“어, 어디 가요? 저도 가면 안 대요?”
수인족 남매는 나와 같이 있고 싶어 했다.
다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와중에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이라곤 나뿐이겠지. 비록 에카르트가 곁에 있더라도 말이다.
“이 아이들도 데려가도 될까요?”
내 물음에 에카르트는 둘을 마뜩잖게 보다가 말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저것들도 따라와도 됩니다.”
샤사와 샤를은 둘이 남는 대신 나를 따라오기를 선택했다.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에카르트에게 말했다.
“음. 잠시 귀 좀 빌려 주실래요?”
그가 몸을 숙여 주자 내가 귓속말로 말했다.
“…어린아이잖아요. 혹시 잔인한 광경을 보기라도 하면.”
“이미 인간들은 헬라가 적당히 치웠을 겁니다.”
우리는 샤를의 방을 나왔다. 에카르트의 말대로 시체와 조우하는 일은 없었다.
에카르트는 내 손을 잡고 왕궁 서고로 들어왔다.
왕궁 곳곳은 이미 그의 기사들이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헬라도 청소를 마친 것처럼 손을 탁탁 털고 있었다.
기사들이 한 명씩 보고를 올렸다.
“세금 사용 내역을 조작한 비밀문서를 찾았습니다.”
“산맥에 사는 블랙 드래곤에게 흑마법 주술을 사용한 기록도 있습니다. 사악해진 드래곤이 수인족을 공격했고, 빌론은 수인을 구한 영웅인 것처럼 행세했죠.”
“…역시, 그 새끼가!”
샤사는 으르렁거렸다.
나 역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오레이칼 왕국에서 죽였던 드래곤은….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샤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더 괴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거야. 흑마법에서 풀려도 기억이 떠오를 때면 괴로웠겠지.”
“…그래도 유감이야. 미안.”
마냥 어린애 같은데 이런 말을 하는구나. 에카르트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멋쩍게 토닥였다.
“제 기운을 나눠 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괜찮아요.”
사양한 “괜찮다.”라고 곧이곧대로 알아들었는지 그는 아예 내 어깨를 감싸 버렸다. 그리고 마치 마력을 주입하듯이 꾹 힘을 싣고 명령했다.
“그 내용. 공국 주민들에게 전부 공개해.”
“존명.”
에카르트는 명령을 내린 후 중앙의 유리 상자에 손을 뻗었다.
유리 상자에는 왕관이 놓여 있었고 결계가 걸려 있었다. 물론 결계는 그의 강력한 기운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그가 왕관을 꺼내서 내게 말했다.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고… 공, 공왕의 왕관을!”
샤사는 이미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공국의 보배이자 군주의 상징이야. 즉위식 때마다 사용했다고 들었는데.”
“그래?”
나는 그 왕관을 보고 그저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에카르트가 다가와 왕관을 들고 내 머리에 가늠하며 말했다.
“재회 선물로 이 왕관과 타르 공국을 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왕관과 타르 공국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에카르트가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그런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공국 상황이 개판이어서 오는 길에 겸사겸사 정벌을 마쳤지요. 당신이 늘 겸사겸사 치료했듯이 말입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황실도 당신이 홀로 쳐들어온 걸 아나요?”
“알 게 뭡니까?”
나는 순간 그의 등짝을 때릴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황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가 공국을 정벌한 이상 국제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황후의 견제를 더 심하게 받을까 봐 우려스러웠다.
“타르 공국은 동맹국도 없이 자급자족한 지 오래입니다. 제국과 교역하지도 않았으니 황실이 간섭할 이유는 없습니다. 뭐라고 하면 취미생활이라고 해 두죠.”
“정복이 취미라고요?”
“그렇다기보다는 당신에게 선물을 드리는 게 취미입니다.”
“다른 취미를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시엘리나. 관리는 제 보좌관에게 맡겨도 되니 공물만 받으십시오. 저도 당신을 이 공국에서 살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다가 생각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애초에 에카르트가 아니었다면, 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빌론을 제압하더라도 그다음엔 공국을 어떻게 할지 혼란스러웠을 테고.
차라리 이 권한을 좋은 쪽으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부당하게 노예가 된 수인족을 해방해 주세요.”
샤사와 샤를은 얼굴이 환해지더니 꼬리를 탁탁 흔들며 크게 소리 질렀다.
“인간!”
“뱅마법사님!”
샤사와 샤를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뽀송뽀송한 강아지 냄새가 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샤를을 쓱쓱 쓰다듬었다.
“떨어져.”
에카르트가 싸늘하게 말하자 샤를이 눈을 내리깔았다. 저런 어린 여자아이도 그의 눈에는 그저 내 백마법을 가져간 적수처럼 보이는 건가.
그런 그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오는 나였다.
“노예 문서를 찾아보고 나머지 수인족과도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이렇게 제가 명령만 하면 다 알아서 해 주나요?”
“네. 당신은 그래도 됩니다.”
에카르트에게 그 정도는 처리하기 힘든 일 같지 않았다. 물론 한꺼번에 여러 변화를 겪은 나는 아직 머리가 지끈지끈했기에 일단 그가 하자는 대로 하자 싶었다.
“괜찮으십니까?”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계속 두근거리네요.”
에카르트 때문에 놀랐던 건 다 가라앉았을 텐데. 그가 내 안색을 살폈다. 순간 얼굴이 가까워져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쉬고 계시지요. 열이 나는 것 같으니 차가운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놀란 건 충분히 가라앉았는데 왜 아직도 심장이 뛰는지 의문이었다.
***
에카르트가 합류한 기사들에게 뭔가 명령하는 동안. 나는 의자에 앉아서 헬라와 이야기를 나눴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공녀님.”
“에카르트가 화가 많이 났나요?”
“이성을 잃으시긴 했지요.”
“…평소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데. 그래도 다행히 헬라가 잘리지는 않았군요.”
“하하. 네. 물론 제 손목이 잘릴 뻔했답니다.”
“손목이요?”
농담인가, 진담인가. 틈나면 마검을 드는 게 습관이긴 해도. 설마 내 도주를 묵인했다고 벌하려 했다면….
“제가 분명 헬라를 아끼라고 했는데.”
헬라는 내가 더 묻기 전에 서둘러 상황을 무마했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 둘 다 무사하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으로도 족합니다,”
그때 에카르트가 이쪽을 바라봤다. 헬라는 주인의 이야기를 한 게 신경 쓰였는지, 괜히 분주히 주변을 순찰하는 척했다.
헬라가 빌론과 관련된 세력을 척결하는 사이. 나는 감금당한 빌론과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다. 에카르트와 헬라의 안내를 받으며 감옥으로 찾아갔다.
빌론은 망자라는 착각이 들었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사지는 죄다 부러졌고 아직도 피가 새어 나왔으며, 눈은 충혈된 데다 움푹 패여 녹색 머리카락을 통해 간신히 정체를 알아봤다.
“세상에.”
잔인한 모습에 내가 잠시 말을 잃자 에카르트가 제안했다.
“보기 거북하시지요? 자루를 씌웁시다.”
“아, 아니에요.”
빌론은 우리가 찾아오자 겁에 질려 감옥 구석으로 이동했다. 에카르트는 그런 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새로운 공왕께 예를 갖추도록.”
“공왕? 다, 당신이… 말입니까?”
빌론은 에카르트의 눈치를 보며 굽실거렸다. 빌론의 가지런하던 이 몇 개는 고문의 흔적인지 빠져 있었다.
“나다.”
내가 차갑게 말하자 그는 격분했다.
“감히 어디서 굴렀는지도 모르는 여자가 타르 공국의-!”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헬라가 달칵 열쇠를 따고 감옥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주먹으로 쳤기 때문이다.
빌론의 몇 개 남지 않은 치아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갔다.
그녀가 폭력을 쓴 모습은 처음 봤기에 흠칫했다. 아니. 차라리 그녀가 나서길 다행이었다. 에카르트는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비틀 기세였으니까.
“컥, 커흑. 죄, 죄송합니다!”
헬라는 빌론을 내 앞에 무릎 꿇렸다. 이런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나는 제지할 만큼의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른 게 있다면 자수해.”
“없습니다! 없어요. 신하들에게 물어봐도 없다고요.”
겁에 질린 빌론은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더 이상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직접 알아봐야 하는 부분도 있으니, 나는 그를 추궁하는 일은 헬라에게 맡기기로 했다.
공왕의 업무는 배워 본 적 없었기에 에카르트와 헬라가 많이 도와주었다. 일단 타르 공국의 근현대사와 공국 사정을 먼저 파악했다.
“빌론이 여러 조작을 한 전적이 있다 보니 전염병이 돌았다는 사실도 의심스러웠는데. 그것까지 조작한 정황은 보이지 않네요.”
“고문한 결과 그래 보이더군요.”
거기서 더 상태가 심각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별로 마주하기도 싫었다.
“그런데 에카르트. 선왕의 초상화를 보셨나요?”
“네.”
“왠지 블랑세가 떠오르지 않아요? 살아 있다면 죽었다던 공주와 나이도 얼추 비슷한데.”
물론 그녀의 생일은 신전에서 임의로 정했지만 말이다.
“허.”
그러자 그의 태도가 삐딱해지더니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시작했다.
“사랑하면 아무거나 봐도 사랑하는 상대가 연상되지요. 진흙이 묻은 돼지를 보셔도 그 작자와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비유가 왜 그래요. 블랑세가 얼마나 예쁜데!”
“그 인간이요? 심지어 사랑한다는 말도 부정하지 않으시는군요.”
“왜 또 화가 나셨어요?”
“당신에게 그 작자가 달라붙어 있으면 아름다운 꽃에 날벌레가 앉은 것 같아서 매우 불쾌합니다.”
그는 더 이상 욕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을 아꼈다. 그러더니 슬쩍 가까이 다가와 내 의자 등받이 부분을 잡고 말했다.
“그보다 보좌관을 생각해 봤습니다만. 델이라고, 제국 북부에서 일했던 여자가 있습니다. 지금은 제국 남부에서 지내는 중이니 근처 지리는 물론 타르 공국의 정세도 알 겁니다.”
“아, 북부에 있을 때 멀리서 잠깐 뵌 적 있어요! 휴직 중이셨어요?”
“네. 육아휴직 기간이었습니다.”
“육아…휴직이요?”
언제부터인가 안 보이기에 짤리거나 다른 변고가 생긴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