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파도처럼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힘이 요동쳤다.
그가 빌론을 지나쳐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방어벽은 어느새 부서졌고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드디어 찾았군요.”
“…그동안 저를 찾으셨어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분명히 나는 에카르트의 저주를 사라지게 했다. 그러니 그가 이성을 잃고 흑막이 될 여지는 사라졌는데.
‘어째서인지 더 위험해진 기분이 들어.’
커다란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머리카락을 스치며 목선에 닿았다. 흠칫 놀라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기 계신지 설명하십시오.”
“설명…요?”
“납득해야 할 이유일 겁니다.”
에카르트의 손은 그대로 팔을 스치고 내려가 내 손을 쥐었다. 그는 내 손등을 들어 올리더니 입술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이 닿았던 것도 잠시.
평소와 다르게 따가움이 느껴졌다.
“아!”
에카르트가 이를 세워 캐물은 것이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부러 벌을 주는 기분에, 나는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을 멀어진 후에도 그는 여전히 내 손을 쥐고 있었다.
“왜 이러세요.”
“당신이야말로 왜 그랬습니까?”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힘을 줘서 손을 빼낸 다음 양손으로 지팡이를 꽉 쥐고 말했다.
“제 의무는… 다 하고 떠났잖아요.”
“당신의 의무요?”
“공작님을 치료하는 거요.”
“하.”
에카르트가 피식 웃더니 순식간에 웃음을 거뒀다.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싸늘한 표정이었다. 숨을 쉬는 것도 버거울 만큼 두려웠다.
“고, 공작님이 제게 부담을 주셨잖아요.”
“부담이라. 북부에 출정할 때 당신에게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거 말고-”
“한데 당신은 그걸 기회라고 생각하고 달아났습니까?”
에카르트는 나와 평생 함께하길 원하는데, 그렇게 한번 내 뜻을 존중했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만의 백마법사가 아니에요!”
“…….”
순간 그는 상처받은 것처럼 쓸쓸한 눈빛이 되었다.
***
‘그런 의무적인 사이라고 생각하다니.’
에카르트는 시엘리나가 순간 미울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사람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어떠한 사람이든, 모두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남을 복종시키는 게 더 익숙했다. 명령 한마디면 모두가 자신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시엘리나에겐 어째서인지 같은 방식을 쓸 수 없었다.
자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녀는 자신이 떠났을 때를 기회 삼아 달아났다. 곁에 있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는 에카르트였다. 애초에 그의 머릿속에 그녀를 보내 준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났더니 자제력을 잃을 것만 같았다. 외딴곳에 그녀를 가두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다.
“제국으로 돌아갑시다. 당신이 있을 곳은 그곳입니다.”
에카르트는 저 하얀 손목을 붙잡아 끌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러자 시엘리나가 항의했다.
“멋대로 정하지 마세요. 저는 아직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뭡니까?”
“수인을 치료할 거예요.”
“저를 도왔듯이?”
“그래요. 당신이라면 백마법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잖아요.”
하지만 에카르트는 그 뜻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나는 정말로 환자였을 뿐인가.’
저 수인과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는 생각이 들자 에카르트는 온몸의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시엘리나는 그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저주를 막았는데 어째서 마검의 저주보다 더 강한 힘이 느껴진단 말인가.
분명히 원작을 비틀고 폭주할 일말의 가능성까지 제거했는데도, 더 큰 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엘리나.”
결국 에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시엘리나와 함께하면 그만이었다.
“당신이 저를 다 치료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백마법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히 저주는 사라졌는데.
“저는 아팠습니다.”
“…아팠다고요?”
“지금 겨우 나아졌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은 아니었어요. 저주받았을 때보다 더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괴로워서 잠조차 잘 수 없었죠.”
“그, 그런. 그럴 리가요.”
“아니. 그랬습니다.”
에카르트의 말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그 원인이 백마법 때문은 아니었을 뿐.
이런 이야기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녀가 흔들리고 결국 가책 때문이라도 자신의 곁에 남아 준다면.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든 사용하리라.
“내가 당신을 치료하는 게 아니었는데.”
시엘리나가 중얼거렸다.
그의 집착이 자신을 향하게 되었다는 후회만은 아니었다. 모두에게 나은 방법을 찾아보려 했건만. 결국 저 때문에 더 아팠다니 괴로웠다.
“멋대로 떠나서 미안해요. 다시. 다시 원인을 찾아볼게요.”
그 대답에 에카르트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침울한 목소리를 들으니 헤어졌던 그때만큼 괴로웠다. 혼란스러웠다. 원하는 답을 얻어도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시엘리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일단 이 아이의 동생을 찾아 줄게요. 일반인은 건드리진 않았겠죠?”
“아마…도요.”
“아마도?”
“어쨌든 같이 갑시다. 당신이 또 도망치면 어떡합니까.”
“안 도망쳐요.”
“네, 달아나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망가져 있을지 모르죠.”
에카르트는 제 마음과 달리 다시 못된 말을 했다.
시엘리나는 더 이상 일을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아팠다고 하니 가책이 생겼다. 그런 마음의 빚이 있었기에 일단 그의 요구에 최대한 맞춰 줄 생각이었다.
“일단 헬라에게 이곳을 청소해 달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헬라요?”
“공작님!”
마찬가지로 피를 뒤집어쓴 헬라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다.
“공녀님,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헬라는 시엘리나를 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그 후 쓰러진 기사들을 성큼성큼 건너 에카르트에게 보고했다.
“남은 병력을 전부 무장해제시켰습니다.”
“공녀가 찾는 놈이 있다더군. 호위하고 올 테니 저놈은 가둬.”
에카르트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빌론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딴 새끼가 공녀의 마력을 받았다니 전부 피를 뽑아 버릴까 합니다만.”
“그러지 말아요.”
“제 앞에서 저 새끼의 안위를 신경 쓰는 겁니까?”
“에카르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셨잖습니까.”
“목숨은 살려 둬요. 당신이 저 때문에 살생하는 걸 바라지 않아요.”
시엘리나의 간곡한 부탁에 에카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러지요.”
헬라는 빌론이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될 모습이 선했다. 에카르트는 시엘리나가 제지하자 그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결국엔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일단 저놈의 동생을 찾으러 가시죠.”
시엘리나는 피곤함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평소처럼 시엘리나의 옆에 찰싹 붙으려고 했으나, 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미안한데. 뒤에서 따라올래요?”
***
샤사는 한동안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걸었다. 그의 꼬리는 아래로 말려 있었다.
시엘리나는 저를 배려한답시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아까 빌론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면 이제는 에카르트에게 죽을 것 같았다.
충분히 저 위협적인 남자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당장 목에 칼끝이 겨눠진 것처럼 살기가 느껴졌다.
“인간아.”
샤사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시엘리나를 불렀다.
“왜.”
“아무래도 까만 머리 인간이 너와 내 사이를 오해한 것 같다. 풀어야 할 것 같은데.”
“나와 샤사의 사이를?”
시엘리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여태 침착했으면서 이렇게 순진한 눈빛을 할 수도 있구나.’
샤사는 그게 신기했다. 그가 부끄러운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설명했다.
“그, 그래. 내, 내가 네게 사심을 가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샤사의 얼굴은 빨개졌고 자기도 모르게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그러자 시엘리나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아아, 그게 아니라. 내가 샤를을 치료해 줘서 그래.”
“…뭐? 내 동생의 이름이 왜 나와.”
샤사는 꼬리를 흔들다가 멈췄다.
시엘리나가 뒤를 흘긋 보고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백마법을 써 주는 걸 싫어하거든.”
뭔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 샤사가 멍하니 입을 벌리자, 시엘리나가 입 안쪽을 보며 말했다.
“너 뾰족니 있구나.”
샤사는 하마터면 “너는 눈치가 없구나.”라고 대꾸할 뻔했다.
백마법 하나 아니, 백마법사 때문에 질투에 미친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가 봐도 저 남자는 시엘리나를 좋아했다.
***
“오빠!”
샤사와 샤를은 만나자마자 와락 포옹을 나눴다.
“샤를, 무사해서 다행이야.”
“바께 무서워서 숨어써.”
“잘했어.”
둘 다 어려 보이는 건 똑같은데 함께 있으면 샤사가 의젓해진다.
샤사는 빌론 공왕이 내게 누명을 씌우려다가, 지금은 감금당했다는 이야기를 짧게 전했다.
“그, 그럼 이제 어떠캐요?”
나는 “그러게.”라고 답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에카르트를 바라봤다. 귀여운 수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부터 나를 빤히 보던 그였다.
그가 무얼 걱정하냐는 듯 태연히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과 저는 함께 있는 겁니다.”
샤를이 걱정하는 건 우리 사이가 아닌데, 또 자기 생각만 하고 있다.
“일단 샤를을 만났으니 밖으로 나갈까요?”
“네. 저도 챙길 게 있습니다.”
“챙길 거?”
“만나자마자 드리려 했는데 당신을 먼저 보고 싶은 바람에 마음이 급해 빈손이었습니다. 가져오는 데에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같이 갈까요.”
에카르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곳은 타국이었다. 게다가 나와 떨어지고서 줄곧 아팠다는데 혼자 보내려니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같이요? 정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