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게다가 주머니도 빳빳하게 펴 놓았는데 구겨져 있고 말이다. 혹시나 해서 가방의 돈을 확인했지만 돈은 그대로였다.
다소 찜찜한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기분 탓인가 싶었으나 그다음 날 역시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마침 침구를 정리해 주던 하녀가 들어왔기에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제 드레스룸도 정리하셨나요?”
“네? 아뇨. 백마법사님께서 드레스룸은 혼자 정리한다고 하셨잖아요.”
하녀는 언짢은 표정으로 답하고 쌩하니 나가 보았다.
‘그럼 누가 들어온 거지?’
내게 귀중품이라고 해 봤자 백마법사 증명서뿐인데. 있다는 것도 안 밝혔을뿐더러 항상 품에 들고 다닌다.
‘딱히 사라진 건 없는데.’
지팡이에 영상석이 있기는 하지만, 술식을 기록하는 용도로 쓸 수 있을 뿐이다.
일단 차선책으로 내 방에 결계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술식을 해제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잠금장치 같은 거였다.
***
그 후 결계 덕분인지, 내가 외출을 삼가고 귀빈실에 머물렀기 때문인지,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나는 오늘도 빌론의 진료를 진행했다. 치료를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나자 그의 상처는 거의 다 아물어 갔다. 치료를 마친 후 우리는 가벼운 사담을 주고받았다.
“손잡이가 없는 찻잔을 쓸 땐, 이렇게 넓은 찻잔 받침에 차를 따라 식혀 먹는다네.”
빌론이 찻잔 받침을 보여 주며 말했다.
“처음 알게 된 문화네요.”
“타르 공국에서는 전통적인 문화일세.”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내 안부를 물어봤다.
“요즘 며칠간 마을에 가지 않는 것 같더군.”
그야 귀빈실의 결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작동하지 않으니 말이다. 범인도 찾지 못했는데 방심할 수야 없었다.
“아…. 요즘에는 독서를 하느라요.”
내가 적당히 웃음으로 얼버무리자 빌론이 인자하게 말했다.
“혹여 고민이라도 있는가?”
“네?”
“고민이 있다면 뭐든 털어놓게. 그대는 나를 치료하는 귀한 손님이니 어떤 일이든 같이 해결하지.”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왔다고 한들, 잃어버린 물건도 없을뿐더러. 결계를 설치한 그 후로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범인을 찾으려면 왕궁이 소란스러워질 게 뻔한 데다 나는 외지인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며칠 후면 왕궁을 떠날 테니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고민은 없어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온 후. 나는 묵고 있던 귀빈실로 곧장 향했다.
그런데 누군가 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바로 수인 소년 샤사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잘못을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 앞뒤 상황도 묻지 않고 따졌다.
“너야?”
“힉. 뭐가?”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왔어.”
“모, 모르겠는데.”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걸 보니 거짓말 같았다. 전에 샤사가 내게 돈이 있냐고 물어봤던 일이 생각났다. 그러다 보니 의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내 돈 가져가려고 했어?”
“아, 아니야!”
그는 잠시 연갈색 눈동자를 굴리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을 번복했다.
“맞아. 돈 때문이다, 왜!”
“뭐가 그렇게 당당해.”
“그래서 고발할 거야?”
고발이라니. 연약해 보이던 샤사의 여동생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에 일단 사정을 들어 보고 싶었다.
나는 주변에 근처에 기사나 하녀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 조용히 속삭였다.
“일단 사정을 먼저 설명해 봐.”
“…….”
“샤사. 어서.”
내 태도가 조금 누그러지자 그는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건강이 안 좋은데, 며칠 전에는 다리를 다쳤어. 자꾸 혼나는 바람에….”
“내 돈을 훔쳐서 치료비로 보태려 했어?”
“…응.”
샤사가 잠시 침묵 끝에 고개를 푹 숙이고 답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망설인 게 무색할 정도로 간단한 일 같았다. 나는 딱 내가 도울 수 있는 만큼만 돕기로 했다.
“하아. 다신 이딴 짓 하지 마. 네 동생, 어디 있어?”
“봐주게?”
“그래.”
“…그럼, 따라와!”
소년은 적갈색 꼬리를 붕붕 흔들다가, 이내 작게 헛기침을 하며 태연한 척했다.
나는 샤사와 함께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는 내 발걸음 소리가 들릴 텐데도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그가 안내하는 곳은 호위 기사가 한 명도 안 보이는 낯설고 외딴 복도였다. 횃불이 드문드문하게 놓여 있어서 빛을 밝혔다.
“그나저나. 그런 사정이 있으면 진작 말하지. 왜 이제야 털어놓은 거야?”
“이런 부탁을 한 게 주인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왜 안 되는데?”
내 질문에 샤사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투덜거렸다.
“우린 노예라고. 너는 주인의 고용인이잖아. 주인 몰래 네게 부탁을 했다가 처벌받으면….”
“노예였다니. 시민권을 받은 게 아니야? 공왕이 블랙 드래곤도 처치한 후에….”
“시민권? 하!”
빌론이 수인족을 받아들였다고 알려졌을 뿐, 그 위치가 노예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샤사는 그러다 문득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블랙 드래곤은 그전부터 깨어나 있었다고.”
“뭐?”
자세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그가 까칠하게 반응했다.
“됐어. 그런 얘기는 알아서 뭐 하게.”
“…그래도.”
“어차피 떠날 텐데.”
하긴. 내게 수인족을 해방시킬 권한도 없는데 괜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꿔 보았다.
“음. 네 동생 말이야, 다른 곳에서 진료받은 적 있어?”
“전에 어렵사리 약을 구했어. 잠깐 나아지기는 하던데.”
샤사가 점점 으슥한 장소로 들어가기에 점점 이 길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창고 같은 장소 앞에서 멈춰 섰다.
문을 여니 침대와 작은 서랍, 의자 하나가 전부인 방이 나왔다. 창문도 없이 작은 양초 하나가 방을 밝혀서 어두컴컴했다. 전에 만났던 소녀가 침대에 누워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샤를, 괜찮아? 백마법사를 데려왔어.”
샤사가 침대 위에 가볍게 걸터앉자 샤를이 몸을 일으켰다. 적갈색 머리카락에 연갈색 눈동자인 소년 소녀가 붙어 있으니 누가 봐도 남매 같았다.
소녀가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쭈뼛쭈뼛 의자를 권했다.
“아, 안년하세요. 안즈세요!”
침대 옆의 작은 의자는 다리가 하나 빠져 있었다. 앉고 나니 불편했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말을 걸었다.
“안녕. 이름이 샤를이었구나.”
“네. 뱅마법사님은….”
“리나.”
“헉. 이름도 예뻐요!”
샤를은 얼굴을 붉히며 이불로 꽁꽁 몸을 감쌌다. 어린아이를 귀여워한 적은 별로 없었지만, 이상하게 샤사와 샤를은 귀여웠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짓고 물어보았다.
“고마워. 어디가 아픈지 말해 줄래?”
“아아. 얼마 전에 넘어졌는데 아직도 다리가….”
“한번 볼까.”
방이 너무 어두워서 나는 목걸이를 지팡이로 바꿨다.
아직 제대로 된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샤사와 샤를이 신기한지 입을 벌리고 덧니를 드러냈다. 마법으로 불빛을 밝혔을 땐 감탄했다.
“오.”
“우와.”
나는 이불을 걷어 낸 후 샤를의 가느다란 발목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러자 샤를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가벼운 염증 같았다. 적절한 마법진을 그려 곧바로 치료를 마쳤다. 샤를은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놀랐다.
“이제 안 아파요. 싱기해요!”
그러다가 샤를은 콜록콜록 기침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안색이 나빠 보였기에 아픈 데가 발목뿐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불편한 곳이 있다면 이참에 치료하자. 내상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치료 마법이 있긴 하지만, 정확한 진단을 위해 어디가 아픈지 말해 주면 도움이 될 거야.”
“사실… 목이 간질거리고 따금따끔해요.”
“언제부터?”
“3넌은 되었어요.”
그것만으로는 정확히 진단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샤사에게도 같은 증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샤사. 너는 그런 적 없었어?”
“응. 샤를만.”
전염성이 있는 질환도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면 선천적으로 약한 걸까.
“그래도 약을 먹고는 괜차나요.”
“약이라…. 보여 줄래?”
샤를은 서랍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말라비틀어진 풀이 있었다. 풀 냄새를 잠깐 맡은 거로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거, 누가 처방했어?”
“전에 오빠가 3지구에서 사써요.”
“치안 기사에게서 말이야.”
이전에 베이커리 주인이 3지구에서 폭동이 자주 일어난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었기에, 치안 기사가 약재까지 속여 파는지.
“이건 고블린의 숲에서 자라는 풀이야. 증상이 일시적으로 완화된 것처럼 보여도, 나중엔 더 심해지니까 먹으면 안 돼.”
“그 새끼가 사기를 쳤어!”
“네에?”
샤사와 샤를이 동시에 말했다. 샤사가 벌떡 일어나 씩씩거리다가, 내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했다. 동생을 걱정하는 그는 눈망울이 울먹울먹해졌다.
“몸에 많이 안 좋은 건 아니지? 석 달 정도만 먹었어.”
“…잘 치료받으면 일상생활 하는 데에는 무리 없을 거야. 늪지 초롱 풀을 구해서 달여 먹어.”
“그건 또 어디서… 아니야. 도움이 되면 어디서든 구해 봐야지. 고마워.”
샤사가 내게서 손을 황급히 떼더니 아무 일도 없던 척 침대에 걸터앉았다.
원래 빌론과 계약이 끝나면 곧바로 공국을 떠나려 했는데. 샤를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당분간 근처에 머물면서 샤를을 진찰할까? 도와줄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
빌론이 완전히 낫는다면 성에 백마법사가 필요할지도 의문이었고. 온다고 해도 나처럼 이 꼬마들을 도울지는 미지수였다.
‘어려운 일도 아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해 주자.’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쉬고 있어. 이만 가 볼게.”
“벌써요?”
“체력이 약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회복하면 오히려 몸이 못 버텨. 좀 쉬어. 내일 다시 올게.”
“가, 감사함니다.”
나는 일어나 샤를의 방을 나섰다. 그런데 샤사가 따라 나와 다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인간. 내일 꼭 올 거지? 저녁에 만나자.”
“그래.”
“앞으로 샤를이 나을 때까지 치료해 줘! 보상은 충분히 줄 테니까.”
“어린애 코 묻은 돈은 안 받아.”
“코 안 묻었거든! 그리고 나, 열다섯 살이야.”
“어리네.”
“안 어려!”
샤사는 고양이 하악질 같은 소리를 내더니, 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먼저 빠르게 걸어갔다.
‘…그런데 돈 때문에 내 드레스룸까지 뒤졌으면서. 무슨 보상을 준다는 거지?’
뒤늦게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
슬슬 귀빈실로 향하는데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장미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