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죄, 죄송해요.”
검정색 치마와 하얀 에이프런을 보아하니 성에서 일하는 하녀 같았다. 체구가 상당히 작아서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였다.
“귀가 네 개나 달렸는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곧 짜악- 손찌검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혼내는 거로 모자라 체벌까지 하다니. 나는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흠흠!”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위치는 아니라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하녀장은 한 번 더 손을 치켜올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혀를 차고는 손을 내렸다.
“쯧. 쉬운 일 시켜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하녀장은 씩씩거리더니 나를 빠르게 지나쳐 걸어갔다.
나는 쓰러진 소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네에.”
소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가까이서 보니 치켜 올라간 눈매는 물론, 귀 모양과 머리색도 샤사와 똑같았다.
‘쌍둥이인가? 이대로 지나가기도 무엇하고.’
나는 품을 뒤적여 초콜릿 하나를 꺼내서 줬다. 귀빈실에 남은 디저트를 챙긴 거였다.
“가, 감사함니다.”
소녀는 급하게 초콜릿 포장지를 뜯더니 숨도 안 쉬고 먹었다. 많아 봤자 예닐곱 살쯤. 유치가 빠져서 그런지 발음이 새어 나왔다.
먹는 데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나는 슬쩍 체력이 회복되는 마법을 걸어 주었다.
“……?”
소녀가 내 마법을 눈치챘는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기분이 나아지는 마법이 걸려 있어.”
“이 초코리세요?”
“응.”
그런 마법은 없지만 멋대로 치료한 일이 혹시 문제가 될까 봐 대충 둘러댔다. 문득 블랑세가 내 입에 멋대로 초콜릿을 쑤셔 넣던 게 생각났다.
“드실래요?”
소녀가 내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초콜릿을 내밀었다.
“왜?”
“뱅마법사님도 피료해 보여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조그만 게 뭘 아나 싶어서 나는 피식 웃어넘겼다. 그리고 소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 보니, 수인족을 영주민으로 받아 줬다는데….’
나는 왕궁 너머로 보이는 산맥을 바라봤다. 업적으로 기록될 정도면 인원이 꽤 많았을 텐데, 마을과 왕궁을 돌아다니며 본 수인이라곤 샤사와 소녀 둘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빌론을 진찰하는 동안 그 의문을 풀기로 했다.
이전에 빌론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말을 했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긴 어렵지만, 적당히 돌려 이야기하면 무슨 단서라도 나오겠지.
“공왕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든 물어보게.”
“수인들은 어디서 지내나요? 타르 공국에서 처음 만난 종족이라 궁금한데, 성에서는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요.”
“아.”
그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부분 외곽에서 농경지를 개간하거나 광부로 일하고 있네.”
“산맥과 외곽에서요? …안전한가요?”
타르 공국까지 바래다준 마부에게 듣기론, 산맥에서 출몰한 마수가 외곽까지 내려온다던데. 내가 걱정스레 묻자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아. 수인들은 마수의 공격을 받지 않아.”
“네?”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 보군. 하긴, 그 존재도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말이야.”
빌론의 말에 따르면 산맥에 거주하던 수인족은 여우 종류라고 한다.
그들은 수십 년간 자급자족하며 인간과 교류하지 않았다. 그런데 산맥에 잠들었던 고대 드래곤이 시간이 흘러 깨어났다.
“다행히 타르 공국의 군사는 평소에도 드래곤의 움직임을 경계하여, 수인족의 피해가 커지기 전에 해결했네. 그렇게 드래곤을 처치하는 것을 계기로 수인족도 영지에서 살게 되었지.”
“그렇…군요.”
“수인족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대대로 전해지는 모양이야. 게다가 청각과 후각이 뛰어나, 갱도를 뚫고 보석을 캐는 일도 믿고 맡길 수 있지. 그들은 공국에 꼭 필요한 존재일세.”
그런 것치고는 어제는 대우가 안 좋아 보이던데…. 일단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과 교류하고 싶은가?”
“하하, 글쎄요.”
“경계심이 많아서 마음을 얻기는 어려울 걸세.”
빌론은 걷었던 소매를 내리고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보다, 적적하면 광장에 나들이를 가는 게 어떤가? 베이커리가 사흘 전 새로 생겼다는데, 그대 같은 젊은 사람에게 인기가 많다고 들었네.”
그는 입구에서 마차로 10분 정도면 도착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런 외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기에 일단 알겠다고 답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예의를 차린 후 후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귀빈실로 향하는 복도.
누군가 계속 나를 따라오는 듯했다. 사뿐사뿐한 발걸음이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샤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저기, 인간아.”
“…나?”
“그래. 여기 인간은 너뿐이다!”
샤사는 얕보이지 않으려는 듯이 팔짱을 꼈다. 그래 봤자 목욕하기 싫어하는 아기 고양이 같았다.
“귀엽네.”
“뭐?!”
비스듬하게 곤두선 꼬리를 빤히 봤더니 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무래도 실례였던 모양이다. 나는 꼬리에서 시선을 돌린 후 그가 내게 그랬듯 반말로 물어봤다.
“내게 볼일이 있어?”
“응. 어제 내 동생을 도와줬다고 들었어!”
“갈색 머리에 귀가 뾰족한 그 여자애?”
“맞아!”
샤사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자 털이 복실복실한 강아지 냄새가 났다.
금색에 가까운 연갈색 눈동자는 동공이 세로로 길었다. 내가 감사 인사는 넣어 두라고 말하려고 할 때, 소년이 뾰족한 덧니를 빛내며 냉큼 말했다.
“인간. 너, 돈 좀 있냐?”
“…돈?”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손가락을 들고 그의 이마를 꾹 밀어냈다. 그러자 샤사가 껑충 뛰더니, 하악질 소리를 내고는 떨어졌다.
“뭐, 뭐야!”
“조그만 게 어디서 돈을 뜯으려고 그래.”
“달라고 하는 거 아니거든!”
샤사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혹시 보수는 얼마나 받아?”라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건 왜?”
“그래도 역시 꽤 받기는 하겠지?”
그는 자문자답하더니 뭔가를 계산하듯 손가락을 더하고 빼 보았다. 그러다가 침울하게 한숨을 쉬었고 꼬리도 힘없이 내려갔다.
“야, 꼬마야.”
내가 부르자 샤사의 꼬리가 눈썹과 함께 쭉 올라갔다.
“꼬마라니.”
“꼬꼬마.”
“내가 누군지 알고!”
“그야 모르지. 그럼 넌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반말했는데?”
“힉.”
그가 겁을 먹었는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악녀의 얼굴을 잘 활용하면 제법 무서운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비록 에카르트와 블랑세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본론이나 말해.”
그러자 소년은 우물쭈물하며 두 손을 모으더니 아까보다 공손해졌다.
“…인간. 혹시 말이야, 치유하는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어?”
“치유 마법?”
“응. 너 백마법사니까 알고 있잖아.”
“흐음.”
나는 아주 정석적인 답변을 했다.
“그건 며칠만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냐. 간단한 술식조차 몇 달은 공부해야 하지.”
“그, 그래?”
“게다가 충분한 마력과 지팡이도 필요하고. 뭐, 환자가 특별한 체질이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샤사가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어깨가 축 늘어졌다.
“넌 이상 없어 보이는데. 아픈 사람이 따로 있어?”
“그런 건 아니고!”
서툴게 잡아떼는 모습을 보니 맞는 모양이다. 물론 짚이는 게 조금은 있었다. 어제 그 소녀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 왜?”
“…….”
혹시 그녀의 치료를 부탁하려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샤사는 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신경 쓰였지만 사정을 캐묻기엔 무엇하냐 싶기도 했다.
나와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사정도 모르고 깊게 개입한다면…. 발목이 묶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주요 인물들과 관계를 정리하고, 제국을 떠나면서까지 찾은 자유인데 말이다.
“먼저 가 볼게.”
나는 결국 먼저 선을 그었다.
“버, 벌써?”
“무슨 사정인지도 안 알려 주면서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그래, 그건 그렇지.”
납득하면서도 실망했는지 샤사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
마차를 타고 공작이 추천한 베이커리로 가는 길. 창문 너머로 조용한 거리를 보며, 나는 샤사와 나눈 대화가 신경 쓰였다.
‘뭐, 도움이 필요하면 먼저 털어놓겠지.’
마차는 베이커리 앞에서 멈춰 섰다.
베이커리는 여러 바게트와 식빵은 물론, 타르트와 케이크 종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제국보다 소박했지만 아기자기해서 귀여웠다. 게다가 아열대 과일도 아낌없이 많이 넣었고 말이다.
나는 가장 인기 있어 보이는 조각 케이크를 선택했다. 내 근처에 손님도 같은 종류를 골라 계산대로 가져가자, 베이커리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싹싹하게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8타르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손님이 계산을 마치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공국에서 사용하는 1타르짜리 동전 여덟 개를 내밀었다.
“2타르가 모자라군. 10타르요.”
“방금 앞에 있던 손님에겐 8타르를 받지 않으셨나요?”
“그분은 단골손님이라.”
“개업한지 사흘인데 단골손님…이 벌써요?”
“…쳇.”
주인은 변명하는 대신 나를 훑어보았다.
“그쪽은 여행자요?”
“아닙니다.”
“아니긴! 미안해서 충고 하나 해 주는데, 3지구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쪽이야말로 외지인을 상대로 덤터기나 씌우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주인은 빵을 종이봉투에 넣으며 덧붙였다.
“치안이 나쁘거든. 하루걸러 폭동이 일어난다오.”
“폭동요?”
“그래. 우리 같은 사람도 똑같이 세금을 내는데 뭐가 그리 불만인지!”
주인은 내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생각에 잠겼다.
‘…나중에 3지구를 지나는 대신, 그냥 다른 왕국을 경유해서 갈까.’
문득 회의감이 찾아왔다. 주요 인물들을 벗어나고 제국을 멀리 떠나 놓고서, 겨우 하는 고민이 이런 거라니.
‘이것이 내가 생각하던 자유인가?’
잠시 멍하니 계산대에 서 있었다. 그러다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다음 손님 계산해야 하니까 가 보시오!”
“아, 네….”
나는 포장된 케이크를 받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다.
***
케이크는 생각했던 것만큼 달지 않았다.
결국 다 먹지 않은 채 테이블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옷걸이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