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52화 (52/115)

#52화

고작 이런 편지 한 장으로 관계가 정리된다니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닥치는 대로 그녀의 흔적을 찾느라 손톱이 부러졌고 눈동자는 실핏줄이 서 있었다. 호흡은 거칠었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했다.

지금 당장 시엘리나가 하지 말라는 짓을 모조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헬라는 그런 에카르트를 차마 저지하지 못했다. 그의 분노가 피부로 생생히 느껴져서 눈보라에 집어삼켜지는 것 같았다.

‘공녀님을 붙잡아야 했는데.’

명령은 없어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알았다. 크로덴 공작가에 충성을 바친 몸.

하지만 시엘리나의 간절한 부탁은 들어주고 싶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진실임이 느껴졌기에.

어느새 마검 끝이 헬라의 목에 닿아 있었다.

“공녀는 어디로 갔지?”

분노로 얼어붙은 목소리가 들렸다. 헬라는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으나 손끝은 떨렸다.

“공녀님께서는.”

“똑바로 말해. 주제넘은 짓을 두 번이나 봐주진 않아.”

살면서 평생 잊지 못할 경고였다.

***

한 달 후. 나는 제국과 제법 떨어진 타르 공국에 도착했다.

타르 공국은 윈터로드 제국의 북부와 한참 떨어진 동남방의 약소국이었다. 수백 년 전 윈터로드 제국으로부터 분리된 후 자급자족을 했다고 한다.

공국은 제국에 비해 한산했고 제국의 봄처럼 제법 따뜻한 날씨였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제국보다 밝고 가벼워 보였고 나무도 더 무성했다.

제국을 벗어나며 헬라가 소개해 준 마부와는 헤어진 지 오래였다.

지도를 펼쳐 지나온 거리를 재 보니, 오레이칼 왕국을 포함해 세 개의 국가를 지나왔다. 외진 길이나 도적 떼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 이동하다 보니 생각보다 속도가 더뎌졌다.

‘이동 마법진에 필요한 재료도 아무 데서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 잠시 이곳에 머물다 가자.’

그동안 밤낮없이 대부분의 시간을 마차나 배에서 보냈더니 피로가 쌓였다. 지금은 어딘가에서 푹 쉬면서 피로를 회복하고 싶었다.

타르 공국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앞쪽은 중심가와 왕궁, 뒤쪽엔 3지구를 비롯한 외곽과 커다란 산맥이 위치했다. 산맥은 제국 북부 산맥와 달리 푸릇푸릇하고 분홍이나 노란 여러 꽃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외지인이 묵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 중심가로 이동했다. 광장 상가에서는 여러 과일을 판매하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한 남자의 동상과 석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빌론 타르. 공국의 왕이자 소드 마스터였다.

공국을 발전시켰다는 업적뿐만 아니라, 수인족이 살던 산맥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악한 드래곤을 처치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수인족을 영지민으로 받아 줬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수인이 사는 곳은 처음 와 보는데. 게다가 드래곤이라….’

내가 마법 대회에서 죽였던 블랙 드래곤이 생각났다.

타르 공국에서 왔다던 그 드래곤. 사악한 마물이라도 죽음 앞에선, 감정을 가진 눈빛이었지.

그때 근처에 있던 주민들이 지나가며 흥미로운 정보를 흘렸다.

“게시판에 공고 봤어?”

“아직 부상이 낫지 않으셨나 보군. 뭐, 그래도 소드 마스터시니 걱정은 없다만.”

나는 옆에 있던 게시판으로 가서 공고를 읽어 보았다. 여러 홍보지가 붙어 있었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공왕의 인장이 찍힌 종이였다.

‘보름간 왕궁에서 일할 백마법사를 모집한다고….’

보통 공왕의 몸 상태는 신변을 위해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을 텐데. 소드 마스터니 능력을 과신하는 건가?

‘마차 삯을 벌 겸 해 보자.’

어차피 앞으로 에카르트 외에 다른 환자도 진찰해 봐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결심한 나는 왕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

화려한 사원과 비슷하게 생긴 왕궁 철문은 두 명의 기사가 성을 지키고 서 있었다.

안쪽에 있던 수수한 복장의 소년 한 명이 다가왔다. 적갈색 머리카락 위로 뾰족한 귀가 돋아나 있었고, 걸을 때마다 뒤에 꼬리가 살랑거렸다. 연갈색 눈동자는 조금 뾰족해 보였다.

‘수인족이구나!’

마법과 마수가 있는 세계였지만 저렇게 귀여운 종족은 만난 적 없었다. 보기만 하는 거로도 피로가 풀릴 정도로 귀여웠다.

수인족을 영지민으로 받아 줬다더니 왕궁에서 일하고 있는 걸까?

“누구?”

나를 발견한 수인은 다가와서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나는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마법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왔습니다. 이름은 리나에요. 공왕님을 뵐 수 있을까요?”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일단 가명을 사용했다.

소년은 기다리라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가 곧 누군가를 데리고 돌아왔다. 녹색 머리에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고전적인 귀족 옷차림의 남자였다.

“어서 오게, 리나 양! 나는 빌론 타르일세.”

“타르 공왕님을 뵙습니다.”

빌론은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멀리서 왔나?”

“네. 윈터로드 제국에서 왔습니다.”

어차피 거쳐 가는 곳이니 구체적인 신분을 밝힐 필요는 없겠지. 또한 제국에서 왔다고 한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신분을 확인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접견실로 안내하지.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서 나누세.”

수인 소년이 내 가방을 받아 줬다.

나는 빌론을 따라 초상화가 걸린 복도를 지났다.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걸렸다. 빌론의 초상화 이전에 선대 공왕 부부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있었다.

초록색 머리의 빌론과 달리 부부는 모두 은발에 파란색 눈동자였다. 내 시선이 그쪽에 미치자 의아함을 눈치챈 듯 빌론이 설명했다.

“나는 공작가의 태생이 아니었네. 선대 공왕 부부는 오래전 전염병으로 인해 서거했지.”

“그랬군요.”

알려지지 않은 병은 술식을 새로 만들어 내야 하는 데다가, 전염병은 마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백마법사까지 감염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공왕님께서는….”

“선대 공왕님의 보좌관이었네. 초상화에는 없지만 아기 공주님이 계셨는데, 그분 또한 전염병으로 생을 달리했지. 나 홀로 어느덧 20년간 공국을 이끌어 가고 있군.”

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공국이었다니.

나는 초상화 속의 얼굴을 한 번 더 흘긋 보았다. 하얀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동자를 보니 왠지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무채색 계열의 깔끔한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앉게. 샤사, 차를 내오거라.”

저 수인족 소년의 이름이 샤사였구나. 샤사는 익숙한 듯이 곧바로 차를 준비해 줬다.

빌론은 소매를 걷어 자신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몇 달 전 블랙 드래곤과 전투에서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는데, 요즘 들어 다시 아프기 시작했네.”

“제가 보겠습니다.”

소매를 걷자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돌출된 흉터가 보였다.

“발톱에 베이신 건가요?”

“잘 알아보는군.”

상당히 깊게 찔린 듯했는데 치료하고도 후유증이 남은 듯했다.

“목과 어깨도 불편함을 느끼진 않으시나요?”

“그렇다만.”

“발톱의 독 같은 경우는 몇 달 뒤에 증세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선 회복 마법진을 사용해 볼 테니, 아까보다 통증이 나아졌는지 말씀해 주세요.”

백마법의 빛이 그에게 맴돌았다. 가장 보편적인 회복 마법이었다.

“흐음. 괜찮군. 한결 나아졌어.”

“다행입니다.”

“합격일세! 자네를 고용하도록 하지.”

‘이렇게 빨리 결정한다고?’

순간 의아했으나 바로 실력이 드러났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문제가 생기거든 그때 백마법사 증명서를 공개하면 되겠지.

증명서는 실력을 검증하는 용도 외에도 다른 기능이 있다.

검증 자체가 신전에서 확인하는 것이기에 올바른 술식을 사용했음에도 의료 사고가 났을 경우 분쟁에 관한 책임은 백마법사 혼자가 아닌 성전에서 함께 진다.

그리고 블랑세에게서 받은 목걸이에 안전장치가 하나 더 있기도 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보수 절반은 선불로, 절반은 후불로 지급하지. 머물 곳은 정했는가?”

“아뇨. 호텔을 찾아보던 중이었습니다.”

“왕궁에 빈방을 마련하겠네. 숙식 제공이 된다면 더 편하지 않겠는가.”

이전 세계에서 숙식 제공 조건이란 야근을 의미하겠지만, 나는 외지인이었으니 왕궁이 더 안전하고 좋을 것 같았다. 돈을 아끼기에도 좋고 말이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왕궁에 머물며 빌론을 진찰하게 되었다.

***

일은 어렵지 않았고 생활은 기대한 만큼 평화로웠다.

블랑세 때문에 놀라거나 에카르트 때문에 불안한 날도 없었다. 빌론은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정도 나를 호출했다.

“고맙네, 리나 양. 전에는 통증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할 정도였는데, 치료를 받고 불편함이 많이 사라졌어.”

“더 나아지실 겁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다음 진료 때까지 푹 쉬게.”

그는 평소처럼 느긋하게 차를 마셨고, 나는 인사를 마친 후 집무실을 나왔다. 수인 소년 샤사가 빈 트레이를 끌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

내가 말을 걸자 낯을 가리는 성격인지 그의 꼬리가 쭈뼛 섰다.

‘…뭐. 굳이 친해질 이유는 없으니까.’

복도를 걷는 동안 누구도 내게 인사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샤사뿐만 아니라 다른 하인들과도 서로 데면데면했다. 헬라나 니나에게 익숙해져서 낯설 뿐.

귀족이 머무는 공간엔 어쩌면 이런 분위기가 당연할 것이다.

‘또 비교하고 있네.’

그렇게 제국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면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다니 우스웠다.

괜히 떠오르던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복도에서 하녀장과 소녀를 만났다. 며칠간 머물며 높은 직급은 안면을 외워 뒀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녀장은 잔머리를 한 가닥도 빠져나오지 않게 묶은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제 키의 절반쯤 오는 소녀 한 명을 야단치고 있었다. 소녀의 적갈색 머리 위로 뾰족한 귀가 축 처졌다.

“창틀 닦는 거 하나 제대로 못 해? 먼지가 묻어 있었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