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아마도. 아, 블랑세.”
내가 도망칠 거라는 걸 블랑세가 알고 있었다고 하면, 후에 에카르트가 블랑세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지 모른다. 그러니 단단히 당부했다.
“내가 도망치는 거, 너는 모르는 거야. 네 안전이 중요하다는 거 알지?”
“시엘. 너는 이제 네 생각만 해도 되는데….”
“그래. 아, 줄 게 있어.”
나는 블랑세와 함께 귀빈실로 돌아가,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이전에 그녀가 작별 선물로 받고 싶다고 하던 팔찌였다.
엊그제 액세서리 부티크에 가서 에카르트와 함께 사 왔다. 에카르트가 “제 거는요?”라고 물어보기에 다른 디자인으로 하나를 더 샀지만.
“고마워, 시엘!”
블랑세는 상자를 열어 팔찌를 확인하고 싱긋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형태를 변형하는 마법도 걸어 줄래?”
어렵지는 않았다. 마정석의 형태도 그렇게 꽃잎 모양으로 바꿨으니 말이다.
‘마음에 안 드나?’
그런 의문이 들 때 블랑세가 은근하게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혹시 나중에 모양을 바꾸고 싶어질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네 마력이 담겨 있다니 너무 낭만적이잖아!”
“…음, 그래.”
떠나는데 이 정도 하나 못해 주랴. 팔찌에 간단히 마법을 걸어 블랑세에게 다시 내밀었다.
“좋아. 나도 시엘에게 줄 게 있어.”
블랑세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내게 긴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붉은 보석으로 제련한 목걸이가 보였다.
“지팡이…인가?”
“응. 원할 때 지팡이의 형태로 바꿀 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도 추가했어.”
뭐냐고 묻자 블랑세가 차분히 답했다.
“가끔 일부러 백마법사에게 사기 치는 놈들이 있는 거 알지? 치료가 잘못되거나 효과가 없다고 주장해서, 치료비를 되돌려 받거나 누명을 씌우는 수법.”
“아, 알지.”
성전에서부터 그런 사례를 들어 보고,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아 왔다. 나는 증명서도 있는 데다가 실습할 때 빼곤 에카르트만 치료했으니 그렇게 불미스러운 일과 엮인 적은 없었지만.
“응. 그럴 때 이 지팡이가 도움이 될 거야. 지팡이 끝에 특수한 영상석이 달려 있어서, 마법을 발동 중일 땐 술식을 기록하거든.”
백마법사가 술식을 올바로 사용한 게 증명되면 그 책임은 성전에서 진다. 기록이 남아 있다면 틀림없는 증거가 되었다.
그간은 굳이 필요 없던 기능이었지만, 앞으로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고마워, 블랑세. 내가 팔찌보다 더 좋은 선물을 줄걸.”
“무슨. 수도에서 유명한 부티크를 열 곳도 넘게 둘러보고 그중에서도 가장 비싼 거로 샀잖아? 크로덴 공작님이 계산하려고 하니까 네가 내 선물이라면서 막았고.”
“…그걸 어떻게 알아?”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지.”
농담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구체적인 목격담이었다. 덕분에 잠시 마음이 찡해지다가도 도망치자는 의지를 다시다잡았다.
“…그럼, 공작님을 잘 부탁할게. 블랑세 너도 꼭 행복하고.”
“고마워. 헤어지기 전에 한 번만 안아 줘.”
“그래.”
시엘리나가 블랑세를 안아 줄 때 표정을 보지 못했다.
마주 안긴 블랑세가 언뜻 쓸쓸해 보였다.
***
에카르트는 순식간에 출전 준비를 마쳤다.
나는 고용인들과 함께 그를 공작성 입구까지 배웅했다. 말끔한 전투용 제복을 입은 그가 평소처럼 내 손에 입을 맞췄다.
“정말 블랑세의 치료는 거부할 거예요? 만약 다치면 어떡하게요.”
“이걸 가져갑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내가 만들어 준 연고를 꺼냈다.
“저번에 효과가 별로 없다면서요?”
“상처 회복에는 좋았습니다.”
“으음.”
“걱정하실 일 없게 최대한 빨리 돌아오죠.”
돌아왔을 때 내가 없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떠나기를 최대한 미루듯이 내 손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블랑세가 연고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어봤다.
“그게 무슨 연고에요?”
존댓말인 거로 미뤄 보아 에카르트에게 던진 질문 같았지만, 그는 사소한 것조차 알려 주기 싫은지 무시했다. 연고는 금세 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둘을 정말 내버려 둬도 될까?’
신경 쓰여도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내 삶을 소유하려고 든 에카르트의 책임이 큰 것이다.
어차피 원작도 완전히 달라졌고 내 할 일도 다 했다 싶은 나는 둘을 이제 떠나보내기로 했다.
“블랑세. 안녕. 공작님도 안녕히 가시길.”
“또 보자, 시엘.”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손을 빼내자 스르륵 부드럽게 손이 풀려났다.
마차가 출발하고 그 뒤를 몇 명의 정예 기사들이 뒤따랐다. 떠난 자리를 오래 바라봤더니 헬라가 의아한 듯이 물어보았다.
“공녀님께선 안 들어가십니까?”
“아. 갈게요.”
나는 홀로 귀빈실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드레스룸을 열어 보니 전부 에카르트가 사 준 옷과 장신구가 가득했다. 전부 다 그가 고민하고 고른 것들이었다.
‘이걸 어떻게 가져가겠어.’
필요한 물건은 가면서 사자고 다짐하며, 백마법사 증명서만을 챙겼다.
내가 작은 가방만 쥐고 귀빈실을 나오자 빨랫감을 들고 가던 니나와 마주쳤다. 그녀가 내게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공녀님! 디저트 만들어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나갈 거라서요.”
“어디 가세요?”
“음. 좀 멀리….”
순수한 눈빛을 보니 거짓말하기가 무엇해서 말끝을 흐렸다.
“멀리요? 그럼 제가 같이 가 드려도 될까요?”
“아뇨. 괜찮아요.”
니나는 내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수도 근처를 산책하는 정도로 넘겨짚었다.
“그럼 해지기 전에 일찍 들어오세요!”
그녀가 신신당부한 후 빨랫감을 들고 멀어져 갔다. 도망치기로 결심한 후 자꾸 사람들을 속이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에카르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떠나려니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나를 붙잡겠지. 결국 이렇게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어.’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협탁에 종이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짧은 작별 편지를 썼다. 썼다가 구긴 종이가 협탁 위에 몇 장씩 쌓여 갔다.
간신히 편지를 남기고 작은 가방 하나를 챙겨 나왔다.
“공녀님?”
이번에는 복도를 순찰하던 헬라와 마주쳤다. 그녀는 내 가방을 보고 설마 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공작 저를 떠나실 겁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그저 짐작이었습니다.”
당황했지만 그녀가 알아차린 이상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원래 떠나려고 했는데 미뤘던 거였어요.”
“그러셨군요. 제가 감히 공녀님의 사정을 짐작할 순 없지만…. 아마, 동방으로 가신다는 편지를 제가 대신 전해 드렸을 때인가요?”
“맞아요.”
“정말 떠나기를 원하십니까?”
“…네.”
헬라가 망설이다가 검지로 안경을 들어 올렸다.
“그러시다면 마차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걸어서 가실 건 아니죠?”
“…보내 주시는 거예요?”
“일개 집사인 제가 공녀님을 붙잡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제 목숨을 살려 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오레이칼 왕국에서 뱃놀이를 할 때 부딪쳤던 일 말인가. 그런 추억을 떠올리니 또다시 마음 한쪽이 걸렸다.
헬라는 공작성 앞까지 내 가방을 들어줬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튼튼해 보이는 마차 한 대를 갖고 돌아왔다.
“제가 떠나도 에카르트가 헬라를 질책하진 않겠죠?”
“저를 해고하진 못할 겁니다. 저만큼 유능한 집사는 찾기 힘드니까요.”
헬라는 마부에게 나를 잘 모시라며 당부했다. 내가 선금으로 백 니케를 건네려 하자 마부가 사양했다.
“아닙니다! 값은 집사님께서 지불했습니다.”
어찌된 일인가 보니 헬라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멀리 가시려면 삯을 아껴야 합니다.”
“그런.”
“언제든 돌아오세요. 공작성 문은 공녀님께 항상 열려 있을 겁니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잠시 헬라를 바라보다가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에 간신히 한마디를 남겼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헬라.”
***
며칠 후 마차는 제국 남부의 검문소에 도착했다. 에카르트가 있을 북부와 최대한 멀어질 생각이었기에 줄곧 남부로 내려왔다.
나는 무릎 위에 작은 가방을 올리고 지퍼를 열었다. 당연하게도 그 안에 블랑세는 없었다. 창문 너머로 검문소 벽을 바라봐도 워프 마법진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자꾸 뭔가 빠뜨린 기분이야.’
그때 물건을 잔뜩 실은 짐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검문소 문지기와 마부의 대화가 들렸다.
“이 많은 짐은 다 무엇인가?”
“보름 후 크로덴 공작님의 생신을 맞아 왕국에서 보낸 겁니다.”
“허, 황태자 전하의 생신 때보다 많군.”
오레이칼 왕국으로 가기 위해 달력을 넘겨볼 때, 그 날짜엔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곧 에카르트의 생일이구나.
왠지 더더욱 그의 곁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니야. 난 할 만큼 했어. 신경 쓰지 말자.’
그사이 내가 탄 마차는 아무 일 없이 검문소를 통과했다. 나는 멀어지는 검문소를 창문 너머로 오래 바라보았다.
‘빙의한 때부터 원하던 대로 떠나고 있는데….’
심장 한쪽이 욱신거리고 답답한 기분이었다.
분명 에카르트의 저주를 해결하고 도망치면 더 이상 문제가 없을 줄 알았건만.
그가 멋대로 내 미래를 정하려 들지 않았다면. 적어도 집착하는 이유가 마법뿐만이 아니었다면.
계속 제국에 머무르는 선택을 했을까?
나는 의미 없는 자문자답을 그만뒀고, 마차는 윈터로드 제국을 완전히 벗어났다.
***
공작 저는 침략받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북부에서 돌아온 에카르트는 시엘리나를 찾아 공작 저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공작님.”
“대체 왜!”
그가 집어던진 테이블이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시엘리나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공작성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침대 밑이나 창고까지 찾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시엘리나는 없었다.
에카르트는 그녀가 남겼던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 저주 때문에 아플 일은 더 이상 없을 거예요. 대외적으로는 블랑세에게 치료를 부탁하시면 돼요. 제가 없어도 어디서든 항상 행복하시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에카르트가 편지를 쥐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 작자에게 자신을 떠넘기다니! 버려진 개를 잠시 맡았다가, 새로운 주인을 찾아 주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내가 당신 없이 어떻게 행복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