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50화 (50/115)

#50화

나는 번뜩 눈을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두 개의 얼굴이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 어떻게 된 거야?”

“다섯 시간쯤 기절하셨습니다.”

“마력을 많이 소모해서 그래. 아직 휴식이 필요해.”

에카르트는 턱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고, 블랑세는 내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 줬다. 나는 열도 없었고, 수건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머리까지 축축해졌지만. 그래도 정성만은 갸륵했다.

“에카르트. 저주는 괜찮아요?”

“네. 사라졌을 겁니다.”

“겁니다?”

“쓰러진 후부터 줄곧 당신만 보고 있었거든요. 계속 당신의 상태가 신경 쓰여서….”

“…저주를 먼저 확인해 봐야죠. 표식을 보여 주세요.”

그가 셔츠 안쪽을 벌려 가슴을 드러냈다. 평소 칼날 모양으로 있던 표식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었다.

“정말 없네요! 완전히 사라졌어요.”

에카르트에게서 더 이상 불길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원작처럼 저주가 그를 집어삼킬 일은 없을 것이다.

몇 세기 동안 풀지 못한 저주를 풀어냈는데, 기억나지 않는 꿈 때문인지 여전히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몸이 가벼운 적은 처음입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전부 시엘리나 덕이지요. 표식이 있던 자리, 만져 보셔도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치료 목적으로 확인하는 거였다. 나는 꾹꾹 손으로 저주가 있던 자리를 눌러 봤다.

“아무 이상…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에카르트가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더니 이마에 손을 올렸다.

“당신은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시엘리나. 정말 괜찮습니까?”

“그럼요.”

“그렇다면 지금 보여 드리도록 하죠.”

“네?”

그가 잠시 문밖을 나가더니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져오도록.”

헬라가 곧 상자를 가득 실은 수레를 갖고 들어왔다. 그녀가 상자 하나를 열어 보여 주자 휘황찬란한 보석이 가득 차 있었다.

“이, 이게 뭔가요?”

“사례입니다. 다른 상자에는 블루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금을 채웠으니 하나씩 열어 보시지요. 물론 일부에 불과합니다.”

“일부라고요?”

“수레 50개가 들어가는 창고 다섯 개도 이따 보러 갑시다. 휴양지와 별장 문서도 지역마다 하나씩 준비하겠습니다.”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정신을 잃는 척하고 싶을 만큼 부담스러웠다.

한데, 에카르트는 저주가 풀린 지금 내가 떠난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할까.

***

나는 보름간 작은 노트에 그의 몸 상태를 기록했다. 떠나기 전에 후유증이 남지는 않았는지 검사하는 것이다.

오늘은 연무장에서 그가 마검을 사용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에카르트는 수련용 허수아비를 단숨에 베어 냈다. 검붉은 검기를 내뿜는 마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쑥대밭이 되었다.

‘마검의 능력은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면서도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아.’

에카르트는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곧 몇 가지 훈련을 마친 그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물어보았다.

“시엘리나. 이제 마력 지압은 안 합니까?”

“네. 안 해도 돼요. 보다시피 제 마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최상의 상태라서.”

나는 노트를 그에게 내밀어 그간의 기록을 보여 줬다. 에카르트는 그 연구 일지를 받고 나를 빤히 보았다.

“안 해도 된다….”

내 말을 의미심장하게 되풀이한 그는, 페이지를 넘겨보다가 짧게 신음을 냈다.

“아.”

베였는지 굵은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에카르트! 괜찮아요?”

“네. 마수에게 팔을 물렸을 때만큼 욱신거리는군요.”

‘그렇게 아프다니. 혹시 부작용인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내게 별다른 고통이 전해지진 않은 거로 보아 저주에 대한 건 아니었다.

서둘러 피를 멈추고 살을 아물게 하는 마법진을 걸었다. 에카르트의 손끝에 내 마력이 감돌았다.

“이제 괜찮아요?”

“네.”

그는 제 손가락을 빤히 보다가 자신의 입술 끝에 대 보았다. 그리고 혀끝으로 핥았다. 나는 당황해서 입을 멍하니 벌리다 물어보았다.

“…왜 그러세요?”

“당신의 마력이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요. 진작 먹어 볼 것을 그랬습니다.”

“그, 그걸 왜 먹어요!”

엉뚱한 행동에 나는 말을 더듬었다. 에카르트가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시엘리나. 앞으로는 제 전속 마법사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네? 저는 이미 당신을 전부 치료해 줬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해야지요. 저는 이미 당신의 마법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런….”

붉은 눈동자가 나를 세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뼈까지 씹어 삼켜질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저주를 치유했으니 처음 만났던 그날의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마법을 요구하고 집착하고 있다.

‘떠나지 않으면 내 미래는 에카르트에 의해 좌우될 거야.’

그를 볼 때 가끔 묘한 감정이 드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원할 때마다 치료하고 계속 그를 관찰하는 게 내 여생이라면, 싫었다.

‘그것도 단지 내 백마법을 원한다는 이유로.’

내 이전 생은 줄곧 뭔가에 묶여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바로 돈이었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돈 때문에 할 수 없었고, 일을 그만두고 싶어도 돈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에게 묶이는 것인가.

“에카르트. 미래 일은 모르잖아요. 뭐, 가정이 생길 수도 있고….”

“가정요? 다른 가족이 필요합니까?”

그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살벌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도 제가 먼 곳을 여행하거나-”

“저와 함께 갑시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뭘 하겠단 말입니까?”

생각보다 더한 그의 반응에 숨이 막혔다. 그러나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번 생은 자유롭게 살고 싶었고, 내가 원하면 일도 그만하길 바랐지만…. 에카르트와 함께라면 그러지 못하겠지.

내 삶은 그와 합의할 수 없는 문제 같았다. 아니, 애초에 그럴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그의 상냥한 모습을 보고 기대를 품어 보기도 했지만.

‘아닌 건 아니야.’

훈련용 허수아비가 전부 쓰러진 훈련장. 내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에카르트. 저는 자유로운 삶이 좋아요.”

“자유라.”

그가 한참의 침묵 끝에 짧은 단어를 곱씹듯 중얼거렸다.

그때 발목에 편지를 매달은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눈동자가 황금색인 비둘기는 오직 황실에서만 기르는 품종이었고 편지 끈 역시 금색으로 반짝였다.

에카르트는 그 비둘기가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무시했다.

“편지 안 읽어 봐도 돼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황실에서 온 것 같은데. 어서 먼저 봐요.”

“…하.”

빨간 눈이 전서구를 통구이로 만들 정도로 이글거렸다. 그는 전서구의 발목에서 편지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가엾은 비둘기는 에카르트에게서 위협을 느꼈는지 슬쩍 내 어깨 위에 앉았다.

에카르트는 편지를 읽자마자 쫙쫙 찢어 버렸다. 갈기갈기 찢겨 풀밭 위로 떨어진 황실 인장을 보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황태자를 죽일까.”

“네-에?”

하마터면 그의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한숨을 쉰 에카르트가 편지 조각을 지르밟으며 말했다.

“북부 출전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

얼마 쉬지도 못하고 다시 북부로 가야 하는 에카르트의 신세가, 순간 내 처지를 잊을 만큼 안쓰러웠다.

마검의 저주가 치유되어도 그는 앞으로도 계속 북부를 지킬 터.

북부로 몰려오는 수백, 수천 마리의 마수를 상대하면서 말이다.

“…….”

안타까웠지만 지금 적어도 내겐 기회였다. 그가 공작성을 떠난 사이 도망칠 기회 말이다.

“당신과 느긋한 시간을 방해하다니 황태자는 죽어도 쌉니다.”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죄송합니다. 한데 시엘리나.”

“네?”

내 이름이 불리니 불안했다. 이렇게 출정 명령을 받았을 때 함께 있다면 아니나 다를까.

“같이 북부로 갑시다.”

예상 가능했던 요구.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시, 싫어요. 좀 쉬고 싶어요.”

“쉬고 싶다고요?”

“대회도 참석했고. 얼마 전에 쓰러지기도 했고. 조금 피곤해서 아직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자 그가 인상을 풀고 내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나는 거짓말이 들킬까 봐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습니까. 나 때문에….”

에카르트가 내 뺨을 쓰다듬자 호흡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공작성에서 편히 쉬고 계십시오. 헬라에게 당신을 주인처럼 모시라고 당부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다시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제 얘기 끝난 거야?”

그 말과 함께 나무 뒤에서 블랑세가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사선의 끈이 달린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디서.”

블랑세를 본 에카르트는 마검을 소환할 기세였다. 블랑세는 우리 둘을 당황시키는 말을 했다.

“북부는 제가 같이 갈게요.”

“뭐?”

“응?”

나는 그녀와 이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대외적으로는 전담 백마법사가 필요할 거야. 그의 몸에 대한 비밀은 다른 백마법사는 모르겠지. 그 역할은 내게 맡겨 줘.”

“그, 그럼 좋긴 한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이제 원하는 삶을 살면 좋겠어. 우리 둘에게 집착당하느라 고생했잖아.”

대신 에카르트의 곁에 남겠다고 했지. 내 의도를 알아차린 걸까? 블랑세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백마법사가 필요한데 공작님의 저주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는걸요. 제가 가장 믿을 만할 거예요.”

“하.”

블랑세의 말에 에카르트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게 약속하듯 말했다.

“그럼, 저 인간에게 치료받을 일 없게 다치지도 않을 겁니다. 마수 놈들도 전부 분지르고 최대한 빨리 오지요.”

“…….”

“출전 준비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안 내키는 눈빛으로 걸음을 옮긴 사이. 블랑세는 내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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