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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49화 (49/115)

#49화

도적들이 훔쳐 갔던 보따리를 찾은 유진은 그 안을 확인한 다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약재가 다 그대로 있어요.”

“다행이네요.”

“완전 다행이죠. 제가 한 해 동안 얼마나 열심히 기른 아이들인데….”

마음을 추스른 것으로 보이는 유진은 내게 주섬주섬 재료 몇 가지를 넘겨줬다. 인삼이나 말린 송로버섯 등이었다.

“이거, 달여서 드시면 피로 회복에 좋아요!”

“이거, 남성 미용에도 좋고요.”

성전에서 동방 재료 몇 가지도 약재로 배웠는데 시중에서 파는 재료보다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유진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상인이 아니라 의사 수준으로 박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재를 잘 아시네요.”

“아. 동방 의술은 어머니께 배웠거든요. 제가 상인이 되는 걸 반대하셨지만… 언젠가 꼭 성공한 상단주가 되겠어요!”

유진이 결연하게 가방끈을 꽉 쥐고 외쳤다.

유진은 사양했지만 여자 기사 한 명을 호위로 붙여 인근 성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함께 보냈다.

그 후 잔당 처리를 마치고 에카르트와 함께 루솔릿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보고서와 계획서 작성은 며칠 안으로 빠르게 끝났다.

황실에 보고할 보고서는 챙기고 계획서는 대략적인 틀만 잡고, 수정은 공작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땅을 개간하고 역참을 세우는 계획서에요. 공작령 꼴이 엉망이던데요.”

“…….”

루솔릿 공작은 보고서를 받아 들고 몇 장 넘겼다.

대략적인 내용을 훑어본 그는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결국 짧게만 말했다.

“수고했다. 참고하마.”

나는 에카르트의 치료를 마저 하기 위해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곳은 크로덴 공작성이다.

***

루솔릿 공작이 확인한 시엘리나의 보고서는 완벽했다. 정말 그녀가 작성한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를 공작가의 가신으로 두었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후회? 아냐. 후회할 만큼 그 애에게 그다지 몹쓸 짓을 하지도 않았지.’

앓을 정도로 때리거나 죽이려고 한 적도 없었다. 시엘리나가 라멜과 리타를 괴롭혔고 도둑질을 했다기에 그저 아비로서 교육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시엘리나가 예민하고 마음이 약했기에 자신의 깊은 뜻을 몰라주고 집을 나간 것이다!

‘이 보고서도 크로덴 공작이 도와줘서 작성했겠지. 그 애의 실력이 아니야.’

그는 마음 한편으로 드는 미안함을 애써 부정했다.

그저 모든 것을 시엘리나의 탓을 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자신의 판단이 틀려서는 안 되었다. 좋은 가장으로 남아야 하니까 말이다.

***

리타 역시 시엘리나가 작성한 보고서를 들여다봤다.

에카르트와 단둘이 도적들의 마도구를 무력화하고, 선제공격을 펼친 후 이클립스 기사단을 이용해 잔당을 포획했다. 마을에 남아 있는 도적 떼까지 소탕했음은 물론이다.

최소한의 전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만들었다.

“하.”

솔직히 적당히 망친다면 자신이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흠잡을 데가 없을 줄이야.

‘이렇다고 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주제에.’

계획서 역시 깔끔하게 잘 구상했다. 주변의 지리와 공작성 재원을 고려해 현실성 있으면서도 효율적이었다.

라멜은 리타가 내려놓은 보고서를 흘긋흘긋 보다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리타. 저거… 다 네가 처리했다고 이름만 바꾸면 어때?”

“황실에도 사본을 전달했을 겁니다.”

리타는 가만히 보고서를 다시 읽어 보다가 한 가지 의심이 들었다.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그 굼뜨고 멍청한 성격도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필체까지 말이다.

이전에는 어딘가 둥글둥글했는데 지금은 간신히 또박또박 눌러쓴 모양이었다.

“…….”

하지만 그 해충에게 캐묻는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겠지.

리타는 이 건은 잠시 보류하고 다시 마법 연구에 매진하기로 했다.

‘악마를 불러내는 방법이라.’

자작가는 수백 년간 제물을 바쳤지만 리타는 자신 정도는 10년 안으로 단축하리라고 믿었다.

‘아니. 그런 소악마로는 해충을 상대할 수 없어!’

리타는 답답한 나머지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악마를 불러내서라도 강해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

여러 일을 마치고 크로덴 공작성에 돌아온 나는 다시 본업에 충실하기로 했다.

별의 꽃잎은 무사히 보관되고 있었다. 더 이상 연구를 미룰 수 없었다.

‘별의 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해.’

나는 헬라가 가져온 마정석을 다른 풀 몇 개와 섞어 작은 솥에 녹인 다음, 술식을 만들고 그 위에 별의 꽃잎을 띄웠다.

그러자 마정석이 꽃잎과 합쳐지며 별의 꽃송이 모양으로 굳어졌다.

“이 마정석은 별의 꽃잎이 가진 힘을 증폭시킬 거예요.”

“그렇군요. 아름답습니다.”

에카르트는 꽃이 아니라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곧 블랑세가 마치 창문을 열고 제 집처럼 들어왔다. 에카르트는 출입 허락을 해 주고서도 그녀가 오자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시엘, 줄기를 가져왔어.”

그녀는 가느다란 고목 줄기를 보여 주었다.

원작에서 묘사된 생김새와 비슷하고 특별하고 성스러운 힘이 느껴졌다.

“여기에 축복하면 될까?”

“응.”

곧 블랑세가 축복을 마치자 줄기 위로 반투명한 문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고마워, 블랑세.”

“시엘에게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

“그러게.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 몰랐는데.”

나는 가지를 건네받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슥 들어서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블랑세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뭐, 뭐야! 내가 강아지도 아니고. 다른 재료는 안 필요해?”

“괜찮아. 나머지는 헬라 님이 준비했어.”

그러자 에카르트가 들었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 내게 머리를 내밀었다. 헬라가 해 준 일인데도 제 공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 것인가?

나는 그의 뻔뻔함을 외면한 채 지팡이를 쥐었다.

“우선 고대 수호목의 줄기로 새로운 줄기를 만들 거예요.”

내가 몇 가지 술식을 외우자 갈색의 줄기는 초록색 줄기로 변했고, 마정석으로 만들어 낸 꽃과 이어졌다.

“재료만 있으면 참 쉽죠?”

“시엘은 정말 위대한 마법사야.”

“공녀는 세기에 기록되어야 마땅합니다.”

둘의 칭찬을 들은 나는 멋쩍게 미소 짓고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이제 뿌리 부분을 만들게요.”

나는 지도를 펼치고 각지에서 수확한 씨앗을 올렸다.

원작에서 리타가 알아낸 방법에 몇 가지를 보완한 것이다. 줄기를 쥐고 다시 술식을 읊으니 씨앗이 동시에 줄기 아래로 모여 하나로 합쳐졌다.

그 형체는 곧 뿌리가 생겨 뻗어 나갔다.

“마법 같아!”

“…마법인데.”

“그렇지만 시엘의 마법은 내 마법보다 더 마법 같은걸.”

마침내 수호목의 줄기, 여러 지대의 씨앗과 보석, 마정석과 별의 꽃잎으로 만든 꽃 한 송이가 탄생했다. 꽃은 내 마력의 힘으로 인해 공중에 둥둥 떠올랐다.

“제 마력으로 피운 꽃이에요. 공작님이 저주의 영향을 받으면 제게도 전달되죠. 이상이 생기거든 곧바로 내게도 곧바로 반응이 올 거예요.”

내가 어디에 있든 그와 얼마나 멀리 떨어졌든 말이다.

“그럼 당신도 아픈 거 아닙니까?”

“걱정 마세요. 성공해서 당신을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테니까요.”

나는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초조하게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시도하지 않은 방법이라서 꺼려지는 건가.

“공녀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당신까지 이 저주를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괜찮아요. 저는 에카르트, 당신을 치료하려는 거예요.”

내가 에카르트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러자 그가 무의식으로인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지금 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손을 주시겠어요?”

나는 마법으로 만들어 낸 꽃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먼저 꽃을 통해 그의 힘을 확장해야 했다. 내 마력을 주입하는 건 그다음. 나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주문을 읊었다. 꽃이 빛과 함께 잘게 부서져 그의 손 위로 스며들었다.

“…아.”

동시에 심장을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내는 고통이 전해졌다. 저주의 고통을 나도 함께 느끼게 된 것이다. 미리 성력으로 치료를 한 상태인데.

평상시에도 이 정도의 아픔이 있고 그것이 익숙했던 걸까.

“시엘리나?”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에카르트가 걱정했다.

“괜찮아요. 바로 다음 단계로 가죠. 지금은 능력이 늘어나도 미미하게 느껴지겠지만, 이제 평소보다 더 많은 마력을 주입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이제 벗으면 됩니까?”

에카르트가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다 대자 블랑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가 주먹을 쥐고 그를 때리려고 했다.

“아까도 멋대로 쓰다듬더니. 시엘에게 무슨 치료를 요구한 거예요!”

“오해야!”

블랑세를 진정시키는 사이 에카르트가 셔츠를 완전히 벗었다. 복근까지 보여 줄 필요는 없었는데 탄탄한 식스팩이 드러났다. 순간 그가 탈의한 목적을 잊을 뻔할 만큼 근사했다.

나는 치료에 집중하기 위해 내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 후 최대한 집중력을 끌어 올려 손끝에 힘을 모아… 저주의 표식 위에 손을 올렸다.

내 마력이 저주의 흔적에 스며들어 갔다.

흔적은 점차 옅어졌고 전처럼 내 마력을 반사하지도 않았다. 마력이 천천히 그의 몸 안으로 흡수되며 표식이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좋아. 이대로 계속하면 되겠어.’

저주의 칼날 무늬가 이전보다 더 밝아져서 그의 피부색과 거의 비슷해질 때쯤. 순간 어지러워지며 순식간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아….”

“시엘리나!”

나는 정신을 잃고 누군가의 품에 쓰러졌다.

***

사각사각, 작은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벌레가 잎을 갉아 먹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의 힘을 사용하면서. 감히 고통을 거부하다니.”

동시에 어떤 속삭임이 시작됐다.

한 음절마다 목소리가 전부 달랐다. 소년, 소녀, 나이가 많은 사람. 마치 여러 명이 한 글자씩 말하는 것 같았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오직 어둠뿐.

수백 마리 벌레가 모여들듯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이… 이대로 끝이… 아니야! 그것…들이 존재하는 이상…. 나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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