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48화 (48/115)

#48화

마수에게 당한 상처가 아무렇지 않다고 표현할 정도라니. 그만큼 저주가 강력했기에 그런 고통쯤은 두렵지 않은 거라면 마음이 더 안 좋았다.

“시엘리나. 당신의 일을 도우려고 왔는데 또 당신이 저를 도와주시는군요.”

“제가 언제 도왔다고요. 물론 치료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오히려 크로덴 가문의 기사단이나 고용인들도 제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잖아요?”

나는 그에게 겸사겸사 주변인들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로 했다.

“그런가요?”

“네에. 생각해 보면 주변에 감사하고 살아야 해요. 고용인들이 식사도 맛있게 마련해 주고, 좋은 방에서 편하고 안전하게 쉴 수 있게 해 주시니까.”

나는 마치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이전처럼 주제 넘는 설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공작성에 머물고 오레이칼 왕국에 다녀온 새 우리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나의 가르침을 들은 그가 히죽 웃었다.

“그 정도로 공작성을 마음에 들어 하시니 기쁩니다.”

“아, 네?”

의도와 다른 반응이었다. 내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는데도 에카르트는 뿌듯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물론 저놈들도 제가 고용해 줘서 감사하겠지요. 제가 좋은 놈이란 걸 일깨워 주셔서 고맙군요. 하늘에 계신 부모님께서도 기뻐할 겁니다.”

어떻게 자신을 칭찬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지! 여러모로 대단했다. 게다가 진심인지 자랑스럽게 부모님까지 언급하고 말이다.

“에카르트. 좋은 상사는 부하에게 잘해 줘야 해요.”

“네. 안 죽이고 살려 두고 있습니다.”

“하하. 그건 당연한 거고요.”

기사들은 나와 에카르트의 대화를 못 들은 척 다 듣고 있었다.

***

“그… 마검의 힘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에 쓰세요.”

시엘리나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싫다면 어쩔 겁니까?’

에카르트는 날카롭게 대꾸하려다 한편으로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쓴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잘했어요!”

그러자 시엘리나가 어색하게 칭찬했다.

마치 개에게 앉으라는 명령을 시도하고 성공한 주인 같기도 했다. 에카르트에게는 황태자조차 명령을 내리길 조심스러워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도리어 짓궂게 물어보았다.

“흐음. 제가 생각해 볼까요?”

“아, 아니에요!”

당당했다가 발을 빼는 모습이 마냥 거슬리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빼지 못하게 붙잡고 싶어졌을 뿐.

점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교를 늘어놓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나를 위해서 하는 말 같군.’

부모가 자신을 진심으로 가르치던 그때가 생각났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해서.

***

외곽을 지나 이틀을 줄곧 달렸다.

중간중간 물을 길어 오는 마법을 써서 식수를 해결하고 생활은 마법 막사 안에서 해결했다.

그러다 드디어 언덕 위에 흙과 돌로 세워진 회색의 요새를 발견했다.

“요새에는 시간차를 두고 도착하는 거예요. 에카르트와 제가 먼저 진입할 테니 전면전이 시작되면 따라와 포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잔당을 처리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이클립스 기사단이 깍듯하게 답했다.

기사단을 중간 지점에 남겨 둔 후. 나와 에카르트는 먼저 평지를 달리며 요새를 향해 다가갔다.

요새는 단순한 구조였다. 복잡하게 짓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겠지.

‘그래도 도적 떼의 소굴이 저렇게 버젓이 보이는데 여태 방치했다니.’

루솔릿 공작가의 행태에 허탈감이 들다 못해 기가 찼다. 용서치 않으리라. 나는 고삐를 꽉 쥐고 말이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곧장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

망루에 선 도적들이 쌍 망원경처럼 생긴 마도구로 요새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멀리 있는 자갈까지도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흑백으로 변했다.

“에잇, 이거 원! 비싸게 샀다더니.”

마도구를 몇 번 건드리다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말을 타고 달려오는 누군가 보였다.

“뭐야? 누가 오고 있는데. 두 명이야.”

시엘리나와 에카르트를 보며 망루의 도적들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명? 귀족이라면 호위라도 여럿 데려왔겠지.”

“그런데 허리춤에 저 검. 쓸 만해 보이지 않아?”

에카르트가 모습을 최대한 숨겼고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은 마검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북부를 지배하는 전장귀가 여기까지 올 거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소드 마스터의 검일지도.”

“그럼 내가 갖지. 하하!”

“나머지 하나는 흐음. 여자인가?”

“얼마 전에 잡은 그 여자 포로 있잖아. 혼자서 적적하지 않게 같은 감옥에 넣어 주자고.”

“좋아. 불화살을 쏴!”

어느새 망루에 온 두목의 명령에 모두가 화살을 들어 겨눴다.

***

이곳은 루솔릿 공작가가 방치한 땅.

적당히 인근 마을을 약탈하고 상인들의 물건을 뺏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도적들은 다른 영지와 분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는 거물들은 알아서 건들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말 두 필만 갖고 온 상황.

나는 공격 조짐이 보이자마자 결계를 만들었다. 이윽고 불화살을 쏘아 우리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화살 낭비를 하는군. 어차피 우리 목적은 요새를 함락시키는 건데.’

나는 커다란 반원의 결계를 만들어 내 불화살을 튕겨 냈다. 점점 성문과 가까워지며 나는 더욱 집중했다.

“계, 계속 공격해!”

마법사의 등장에 놀란 도적 떼가 다시 불화살을 쏠 준비를 했다.

그러자 에카르트는 눈대중으로 성벽을 쭉 파악한 후 말했다.

“시엘리나. 제가 먼저 들어가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에카르트가 달리는 말에서 내린 후 몇 걸음 달리더니 마력을 이용해 높이 도약했다.

그는 돌출된 벽을 아슬아슬하게 밟고서 한 번 더 뛰어올라 보루 위에 착지했다.

“괴, 괴물이다!”

나는 저런 몹쓸 말을 한 도적은 가중처벌하기로 했다.

순식간에 올라간 에카르트는 보루의 병사를 마치 파도처럼 쓸어버렸고 곧 돌로 된 요새의 문도 단숨에 격파했다.

나는 편하게 정문으로 들어온 후 마력 결계를 방패처럼 휘둘렀다.

“마, 마법사인가!”

그리고 주변의 도적들을 마력으로 때려 마구 기절시켰다.

그때 요새 뒤쪽의 후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자 에카르트가 2미터도 넘어 보이는 무너진 성벽 잔해를 집어 들더니 후문으로 집어던졌다.

굉음과 함께 정확히 문 앞으로 떨어져 막아 버렸다.

“에카르트! 다치진 않았어요?”

“인대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성력 마사지가 필요할 것 같군요.”

“아니. 마사지는 괜찮아요.”

나는 그에게 간단한 회복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그가 이제 조금 낫다고 능청스레 미소 지었다.

그때 주둔지 안에서 도적 하나가 어떤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이, 인질이다! 무기를 내려놔!”

밤색 머리카락에 검은색 눈동자의 젊은 여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자 에카르트는 나를 흘긋 돌아보며 말했다.

“시엘리나. 괜찮겠습니까?”

“네.”

“그럼.”

그 말과 동시에 두목의 팔이 이리저리 꺾이더니 칼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에카르트가 만들어 낸 무형의 기운이 키가 2미터는 되는 거구의 장정을 인형처럼 갖고 놀았다.

‘왠지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원작에서 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이렇게 포스를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건… 저주의 속삭임을 듣고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능력에 놀라면서도 일단 여자를 부축했다.

“괜찮나요?”

“네. 네에. 살려 주세요. 저는 상인일 뿐이에요!”

만약 같은 패거리였다면 어쩔 수 없이 응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겁에 질려서 다리에 힘이 풀린 데다, 마력이나 특별한 내공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여자까지 한편은 아닌 듯했다.

“구해 드리러 왔어요. 요새 안에 다른 민간인도 있나요?”

“아, 아뇨. 저밖에는….”

에카르트가 마치 고삐 풀린 맹수처럼 도적 떼를 소탕하는 사이 이윽고 기사단이 도착했다.

나는 그중 하나에게 여자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고, 나머지 기사단과 함께 도망치려는 잔챙이를 잡아들였다.

한동안 피가 튀기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물론 일방적으로 도적들이 밀리고 있었기에 전투라기보다는 정의 구현에 가까웠다.

나는 도적 떼를 치료할 가치를 못 느끼고 그들이 남들에게 했던 짓만큼 고통을 느끼게 두기로 했다.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포로로 잡혀 있던 여자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어.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유진. 동방의 약재를 파는 상인입니다.”

“나는 시엘리나 루솔릿. 황실의 명을 받고 도적 떼를 소탕하러 왔어요.”

“시엘리나 루솔릿… 루솔릿 가문의 분이신가요? 나중에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괜찮아요. 한데 이쪽 길에 도적단이 있는 걸 모르셨는지.”

“후에엥. 저는 막 장사를 시작해서… 다른 상인들이 이쪽 길이 빠르다며 추천해 줬어요.”

아무리 경쟁자라고 해도 이렇게 어려 보이는 여자를 도적 떼가 있는 길로 내몰았단 말인가. 오지랖을 떨 처지는 아니었지만 상단은 인맥이 중요할 텐데 말이다.

여러모로 그녀의 앞날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면 꼭 그 상단에 복수할 거예요….”

그래.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약탈한 물건을 모아 둔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기사가 안쪽의 창고로 안내했다. 잡다한 보석과 비싼 옷 등이 쌓여 있었다.

“약탈한 물건을 루솔릿 공작령에 되팔았다고? 분실 신고를 했다면 금세 잡아들였을 텐데.”

그쪽을 지키던 도적들은 입을 꾹 다물고 답하지 않았다.

“신고하지 못하도록 피해자를 협박했구나.”

내가 그들이 맞기 전에 말하자 도적들은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건을 팔아 얻은 이익은 도로 도적단에 바쳤소.”

“그…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었소. 서로를 감시하게 되어 있지.”

“좀도둑 주제에 악질이군.”

유진이 도적들에게 뺏긴 물건도 금세 찾았다.

“내 보따리!”

그녀는 마치 커다란 도토리를 끌어안은 다람쥐처럼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