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47화 (47/115)

#47화

“아. 걱정하지 마. 이클립스 기사단이 돕기로 했어.”

“다른 영지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더니 결국… 공작님과 거래하셨나요?”

“거래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도 없지.”

에카르트는 리타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대신 답했다.

“이렇게 간단한 지원을 거절하거나, 대가를 요구할 만큼 궁색한 놈은 아니라서.”

졸지에 제 동생이 궁색한 놈이 되어 무시받자 라멜이 화가 났다.

“공작님. 제가 결례를 범했다고 해서 제 동생까지 감정적으로 대하시면 안 되죠!”

라멜이 리타를 변호했듯 나도 에카르트의 편을 들었다.

“감정적이라니. 지금 너 혼자 발끈해 놓고는.”

“언니는 가족 편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

만약 가족들이 시엘리나를 사랑했다면. 나는 적어도 여기에 남아 제국을 떠나기 전까지 화목한 가정을 연기하는 노력이라도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상한 음식을 먹이려 하고 구두를 밟으며 인사를 강요시켰다.

그로도 모자라 결혼까지 강제로 시키려 하고 누명도 씌웠다.

집을 나온 후에도 라멜은 나를 무시하며 에카르트와의 사이를 보란 듯이 갈라놓으려 했다.

더불어 지금까지 내내 리타는 일부러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섰다. 나는 라멜과 리타에게 아무 정도 안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가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 있어?”

지금 이곳에는 나의 편을 들어줄 가족은 없었다. 이전 생에서나, 지금 생에서나.

“없겠지. 그래. 생각이야 자유라지만 너희가 한 짓 좀 되짚어 봐. 계속 그렇게 살다간 벌 받는다. 그게 빠른 시일이 되길 바랄게.”

직접적으로 말해 주니 두 남매는 차마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가뿐히 무시하곤 에카르트의 손을 잡아끌고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갔다.

“시엘리나. 저들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

“굳이 떠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제가 도울 일이 없는지 궁금해서요.”

“괜찮아요. 저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거든요.”

나를 걱정하는 그의 모습. 문득 에카르트에게 의지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

우리는 평복을 입고 13구역에 도착했다.

중심가와 달리 낮인데도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길거리에는 말의 분변이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땅도 부분부분 질퍽질퍽해서 걷는 것조차 꺼려졌다.

에카르트는 기사 한 명과 일행인 척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력의 힘을 이용해 작전대로 그의 주머니에서 금화 자루를 둥실 빼냈다.

“도둑이야!”

미리 작전에 협조하기로 한 기사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휙 뒤돌아봤는데 연기일 뿐인데도 에카르트는 기사를 살벌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재빠르게 외진 곳으로 달려 나가면서 에카르트를 힘겹게 따돌린 척했다.

그러자 그 순간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에카르트나 기사의 것이 아니다. 담벼락 위를 올려다보니 누군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이, 신참. 솜씨는 잘 봤지만 여긴 내 구역이야.”

“네 구역이라고?”

그는 담벼락 아래로 팔짝 뛰어내리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그래. 도둑질하고 싶다면 우리에게 허락받고 하도록.”

“우리?”

“들어 봤겠지. 우리는 평야의 도적단이다.”

얼굴을 보니 벨라 영애의 마차를 털었던 놈의 몽타주와 일치한다. 내가 여유로운 척 금화 자루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렇다면 네 무리에 들어가게 해 줘. 나도 도둑질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호오.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그래.”

“얼굴 먼저 보여 봐.”

내가 로브를 벗어 얼굴을 보이자 그가 바짝 다가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전엔 목걸이를 훔쳤다더니. 그때보다 더 실력이 늘었나 보네?”

…내가 누명을 쓴 걸 외곽의 도둑까지 아는가? 시엘리나의 기억에도 희미했기에 나 역시 이 사람을 간신히 알아보았다.

그를 알아본 순간 시엘리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이름은 키토.

시엘리나가 라멜의 함정에 빠져 비탈을 굴렀을 때, 키토는 풀밭에 엎어져 엉망이 된 시엘리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라멜 공녀님처럼 얌전하면 얼마나 좋아요? 쯧.”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해고당한 것도 시엘리나의 탓으로 전가하고 있었다.

“이봐, 공녀. 네가 쫓겨나고 난 짤렸어!”

“내가 하지도 않은 짓 때문에 나를 원망하고 도둑질이나 하고 있었어?”

“이게! 아직도 네가 공녀인 줄 알아.”

여전히 강약약강인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날 때릴 듯이 손을 힘껏 쳐들었다.

“맞아. 나 공녀 때려치웠어. 이제는 백마법사지. 그리고 이건 정당방위야.”

나는 마법 공격으로 그의 손목을 우두둑 뒤로 꺾어 버렸다. 때마침 에카르트가 등장해서 로브를 내리고는 키토에게 말했다.

“건방진 새끼가. 어디서 언성을 높여.”

“…크로덴 공작?”

키토는 겁에 질려 그대로 한 손으로라도 벽을 짚고 뛰어올라 도주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카르트가 더 빨랐다. 에카르트가 키토보다 더 높이 뛰어올라 그대로 그를 발로 걷어차 떨어뜨렸다.

“아, 아악!”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는지 키토가 무릎을 쥐고 고통스럽게 소리 질러 댔다.

“시끄러워. 사과 안 해?”

“죄, 죄송합니다.”

“진심이 안 담겼잖아.”

“정말 죄송합니다! 가, 감히 백마법사 님을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너 따위가 알아봐 줄 필요 없어.”

내가 키토를 갈구자 작전에 협조해 준 기사가 다가와 키토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잠시 생각하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내가 목걸이를 훔쳤다는 말. 에카르트가 들었나?’

혹시라도 그에게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루솔릿 공작가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에카르트는 아니었다.

“저, 안 그랬어요.”

“네.”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왠지 에카르트라면 내가 정말 그런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품어 줄 것 같았다.

“시엘리나. 한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됩니다.”

에카르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나를 위해 가능한 뭐든 할 것은 알았다. 공작 가문끼리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난 일이에요.”

“그렇습니까.”

“…….”

“마음에 담고 계신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에카르트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마을에 남은 잔당을 찾기 위해 키토를 심문하기로 했다.

내가 조용히 주변에 방음 마법을 시전하자 기사가 재갈을 풀어 주었다. 나는 키토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동료들. 어디 있어?”

“모른다.”

키토가 앙칼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데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건만 키토의 손가락 하나가 뒤로 꺾였다.

“아악!”

한 개.

“악!”

두 개.

“끄윽.”

마치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리듯 간단했다.

“다음은 네 목을 꺾겠다.”

에카르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들을 약탈한 이 도적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었으니까.

‘잠깐. 그러면 에카르트는?’

순간 그 역시 다른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르다. 전생에야 저주에 휘말렸고. 지금 행사하는 폭력은 정보를 알아내야 하므로 정당하다.

폭력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다니. 나는 어느새 그를 변호하게 되었구나.

나는 에카르트에게 최소한의 선을 다시 상기시키기로 했다.

세상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개인적인 바람이었다.

그가 단순한 악인으로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에카르트.”

“네.”

키토를 둘러싼 무시무시한 포스가 잠잠해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신을 해치려는 게 아닌 이상 가급적 목숨은 붙여 두기.”

“…….”

에카르트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순순한 태도로 답했다.

“그러죠.”

“저놈은 제가 맡을게요. 저는 갚아 줄 게 좀 있거든요.”

“그렇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나의 뜻대로 따라 줄 때면 내가 고삐를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 자격 같은 건 없더라도 에카르트를 파멸로 향하는 길만은 막을 것이다.

나는 쓰러져서 추하게 우는 남자에게 말했다.

“네 동료들 어딨어? 다 알고 왔으니까 빨리 불어.”

“이, 이 동네에 아직….”

더 이상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키토는 넋이 나간 것처럼 정보를 술술 불었다.

에카르트와 기사단은 잔당을 더 찾아냈고, 우리는 여관에서 임시로 작전 회의를 했다. 기사단은 알아낸 정보를 전했다.

“요새 구조와 무기를 알아냈습니다.”

“증언끼리 일치하는지 확인했나?”

“그렇습니다.”

에카르트의 말에 기사가 고개를 숙이고는 마저 보고를 이어서 했다.

“놈들의 증언에 따르면 떠돌이 무기상에서 구입한 마도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쌍망원경 역할을 하는 장비로 추정됩니다.”

“그럼 놈들이 쓰는 마도구를 무효화시켜야겠어요.”

나는 에카르트와 기사를 번갈아 보고 말했다.

말하자면 마력의 파장을 교란시켜 우리의 존재를 일찍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킹하는 것이다.

“준비가 되면 빨리 치는 게 좋겠어요. 도주하기 전에 발본색원하죠. 잔당이 이틀 후 요새로 복귀하기로 했다면 그전에 도착해야 해요.”

“시엘리나. 지금 당장도 가능합니다.”

지금은 저녁이다. 에카르트는 어두컴컴한 와중에 진행하는 임무가 당연하더라도, 나는 그를 신경 쓰고 있었다.

“동이 트면 가요. 도적 떼는 지금도 망을 보고 있을 테니까. 우리 쪽에서 지리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는 없으니 시야라도 제대로 확보해야죠.”

“네. 좋습니다.”

“이 계획에 더 보완할 내용이 있을까요?”

에카르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뇨. 한데….”

“말씀하세요.”

“당신이 저를 걱정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런 감정까지는 부정할 수 없었기에 나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같이 가요.”

“괜찮습니까? 제가 가서 전부 쓸고 와도 됩니다.”

“말했지만 당신 혼자 보낼 순 없어요. 이 임무를 맡은 건 저예요. 게다가 포로가 있을지도 모르고 마도구도 무효화시켜야 하니까.”

여러 이유를 덧붙이긴 했지만 무엇보다 에카르트가 다치면 안 되니까. 내 성력으로 그를 낫게 할 수 있어도 다치는 건 애초에 아프다.

작은 가시에 찔리기만 해도 따가운데 하물며 화살에 맞거나 칼에 베이거나 마수에게 물리면 그 고통은 얼마나 심하겠는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