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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46화 (46/115)

#46화

“그렇게 영지를 아끼면서 도적 무리는 방치했구나.”

나는 둘을 비꼬며 서류를 덮고는 몽타주 단 한 장만 챙겼다. 너무 자료가 빈약하여 읽어 볼 만한 내용도 없었다.

그렇게 집무실에 둘을 내버려 두고 에카르트와 함께 나오자, 미리 기다리던 라멜이 아는 척을 했다.

세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크로덴 공작님. 제가 모실까요? 2층에 방이 비었는데.”

“내 일행이셔. 3층에 귀빈실이 있지?”

내가 말하는 귀빈실은 넓고 각방으로 되어 두 명이 묵기에 충분했다.

“거긴 수리 중이라서… 언니도 다른 방으로 가는 게 어때?”

라멜이 그간 했던 짓으로 봐서는 나를 수리 중인 마구간에 수납시켜도 납득할 텐데. 에카르트와 나를 갈라놓으려는 수작이 훤히 보였다.

“괜찮아. 나 아무 데서나 잘 자.”

“그래도.”

“내 집이기도 한데 굳이 네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지. 에카르트, 어서 와요.”

아니나 다를까. 3층의 귀빈실은 말끔한 것을 확인한 나는 보란 듯이 라멜에게 말했다.

“라멜. 수리 다 끝났나 보네. 아니면 화병의 꽃을 교체하는 대공사였다거나.”

“…너. 엄청 밝히고 다니는구나.”

“뭐래. 네가 그런 말해도 아무도 신경 안 써.”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차분히 말했다.

“그리고 연장자로서 충고하는데… 성공하려면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한단다.”

어디서 들었던 조언을 하자 그녀는 가르치려 들지 말라며 화를 냈다.

***

세라는 시엘리나에게 실라의 이야기를 전하려 했지만, 리셀과 공작이 연이어 끼어든 바람에 말할 기회가 없었다.

‘집무실에서 나오시면 실라의 상황을 그대로 말씀드려야겠어.’

그때 마침 실라가 빨래 바구니를 들고 지나갔다.

“실라, 실라!”

“세라?”

세라가 쪼르르 달려가 실라의 빨래 바구니를 나누어 들며 말했다.

“시엘리나 공녀님이 오셨어. 크로덴 공작님과 함께!”

“뭐? 정말?”

“응, 황명을 받고 오셨나 봐.”

황명이라니. 시엘리나의 성공담은 익히 들었다. 시엘리나가 온 것도 기쁜데 황실에서까지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마치 자신의 성공처럼 뿌듯해 가슴이 뛰는 실라였다.

“공녀님은 어떠셔? 요즘 바쁘실 텐데 전보다 여위지는 않으셨지?”

“어쩜. 완전 근사하고 생기도 넘치시던데! 네 안부도 물어보셨어.”

“내 얘기도 하셨다고?!”

“그렇다니까. 이건 내가 가져갈 테니 공녀님이 나오시면 직접 뵙는 게 어때?”

실라는 시엘리나가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뛸 듯이 행복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를 벗어나며 말했다.

“아냐. 나는… 나중에 뵙는 게 좋겠어. 너도 내 이야기는 하지 마.”

“아니. 왜?”

“…그냥,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있으니까. 아무튼 나는 공작성을 나갔다고 전해 줘. 최대한 눈에 안 띄게 하고 있을게.”

실라가 틈나는 대로 서재에서 여러 법 조항에 대해 알아본 결과, 아직 루솔릿 공작을 파면할 정도로 충분한 증거가 모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시엘리나는 황명을 받아 왔다. 괜히 자신이 끼어들어 중대사를 그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언제 다시 올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증거를 넘길 방법은 있겠지.’

“으휴!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이 답답아.”

“미안.”

“아무튼 실라.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세라는 만약 실라가 굳이 공작령이 좋아서 안 떠나는 거라면 다른 일자리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실라는 여전히 동방 의학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

루솔릿 공작령의 지원을 거절당했다고 해서 다른 영지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움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도적 떼 소탕을 도운 개발 공신이라며 추후 통행세 일부를 달라고 요구할 경우 일이 복잡해지고.

그러니 이왕이면 영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게 좋았다.

“시엘리나.”

“네?”

“제 기사단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당신도 몇 번 그놈들을 치료해 준 적 있으니 마땅히 도와야지요.”

“그래 봤자… 최근에는 한 명 같은데요.”

“기사단은 연대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작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모셔 오시길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크로덴 공작성으로 돌아가면 포션이라도 새로 만들어 드릴까요?”

“네. 제가 다 마실 겁니다.”

이런 욕심쟁이 같으니. 그래도 에카르트가 선뜻 나서 주어서 다행이었다. 가족보다 낫다는 경우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내게 워낙 잘해 주고 내가 가장 필요한 것처럼 그러니… 어쩌면 나 역시 당연히 마음을 주게 되었을지도. 게다가.

‘치료. 그 마력 치료가 문제야.’

자꾸 안 하던 상상까지 하게 만들고 말이다!

이클립스 기사단은 에카르트의 명을 받고, 평상복을 입은 채 루솔릿 공작령으로 와 주었다.

“공작님. 평야에서 사용할 막사를 가져왔습니다. 공작님과 공녀님께서 사용하실 최고급 막사 두 개, 기사단원 스무 명이 사용할 고급 막사 다섯 개입니다!”

마법 막사는 내부에 침실은 물론 화장실과 샤워실까지 갖춰졌다. 게다가 냉난방 시설에 벌레 퇴치 기능까지 있고 휴대하기 편해 웬만한 주택 가격보다 비쌌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기사에게 말했다.

“너희는 네 개 가져온 거다.”

“……?”

“네 개.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기사는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지만 상대는 에카르트였다. 항상 전장을 승리로 이끄는 주군의 명령이니 의심치 않고 바로 따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저의 실수로 네 개를 가져와 죄송합니다!”

“그래. 다시 명령을 전할 때까지 대기하도록.”

기사가 90도로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시엘리나, 시엘리나.”

에카르트는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아침부터 미소 띤 얼굴로 내 이름을 두 번이나 불렀다. 그러다가 문득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단이 공작령에 도착했습니다. 한데 말입니다. 평야에서 사용할 막사가 모자란다고 하는군요.”

“어머. 오는 길에 분실했대요?”

“아뇨. 올 때부터 잘못 챙겨 온 모양입니다.”

에카르트의 기사단이 그런 실수를 하고도 아직 살아 있는지 걱정이 들었다. 그 역시 한숨을 쉬고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어쩌지요? 물론 그놈들을 벌하고 막사 하나에 밀어 넣어도 됩니다.”

“아아, 아니에요! 벌하지 마세요.”

“그럼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저와 에카르트가 같은 막사를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역시 천재적이십니다.”

“천재적일 것까지는… 어차피 오레이칼 왕국의 호텔에서도 같은 방을 썼는데요.”

군대는 다른 성별이라도 같은 막사를 사용한다.

게다가 막사 안에 방이 나누어져 있고 방 안쪽마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따로 있으니 괜찮지 않으려나. 굳이 기사단까지 불편하게 할 필요는 없으리라.

“뭐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럼요. 정말 어쩔 수 없군요.”

에카르트의 입꼬리가 왠지 씰룩했지만 조명이 어둑해서 잘못 본 것이라 믿었다.

기사단은 외곽에서 여러 정보를 모아 왔다.

루솔릿 일가가 중심 구역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니 외곽 역시 방치당한 건 당연했다.

“조사 결과 도둑질이 일상인 나머지, 치안 기사에게 신고해도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본인들이 겪어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래도 실마리는 잡을 수 있었다.

벨라 영애가 식재료 유통 과정을 감독하며 평야 지대를 지나다가 도적단을 만났다. 그녀는 도적 떼의 몽타주를 남겼다.

“시엘리나. 13구역 마을에서 도난 사건이 자주 발생한다는데,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도적 떼의 몽타주와 일치합니다.”

“그래요?”

나는 에카르트가 취합해 온 정보를 들었다.

“그리고 실력이 좋은 도적들은 도적단으로 영입한다는군요.”

“스카우트?”

“그런 모양입니다.”

“그럼 도적단을 만나려면 미끼를 던져야겠네요.”

일부러 귀중품을 드러내서 미끼가 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 평야의 도적 떼가 아닌 다른 좀도둑이 물고기를 물지도 모른다.

“제가 도둑인 척해야겠어요.”

“시엘리나 님이 말입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에카르트. 물건 훔쳐봤어요?”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내놓으라고 하면 될 것을 무엇하러 훔칩니까.”

경제관념과 도덕심이 증발했음에도 당당한 그를 보자 나는 뒷목을 잡고 설교했다.

“아니죠, 아니죠.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거예요!”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상대방이 원하는 게 뭔지에 따라 다르겠죠.”

“그렇군요. 그럼 시엘리나 님은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네? 치료는 이미 해 드리고 있잖아요. 그리고 공작님은 제게 의식주를 정말 호화롭게 제공해 주고요. 우리 사이는… 깔끔하죠.”

에카르트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무튼. 작전이라고 해도 에카르트에게 나쁜 짓 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마력을 이용하면 좀 더 자연스럽게 남의 물건을 가져갈 수 있을 테고요.”

“그럼 저와 연습합시다.”

“에카르트와?”

“기사단 놈들 말고 저와 호흡을 맞춰 보는 게 더 나으실 겁니다. 자, 가져가 보십시오.”

에카르트가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작은 금화 자루를 넣으며 말했다.

“그럼 서로 스쳐 지나가는 척하며 제가….”

나는 흘긋 보면서 그의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주머니 대신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너무 빨리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히익! 죄송해요.”

벌렁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허벅지 안쪽을 훑었던 감각을 잊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에카르트가 진지하게 다시 말했다.

“아뇨. 다시 해 보십시오.”

“네?”

“…또 해 봐야 성공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원! 결국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제법 자연스럽게 주머니를 빼내게 되었다.

작전을 구상한 뒤 곧바로 공작가의 기사들이 도적 떼가 포진하고 있는 외곽으로 떠나려 할 때.

리타와 라멜은 시엘리나를 호출했다. 그러자 에카르트 역시 덤으로 왔다.

“누님, 아무래도 혼자 보내려니 걱정되는군요.”

그들은 생색을 내면서 기사단을 지원한답시고 심복을 보내 내부 분열을 조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에카르트와 이야기를 마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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