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바로 블랑세였다. 그녀는 에카르트가 떠나서 그런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공작님은 토벌하러 가셨어.”
“후후. 그럼 이제 우리 둘만 남는 거야?”
며칠 만에 만나서 그런지 블랑세가 몹시 들떠 보였기에, 나는 루솔릿 공작령을 간다는 이야기는 잠시 미뤘다.
우리는 크로덴 공작성을 우리 집처럼 쓰며 함께 식사했다.
“그래서 자작령에서 악마를 봤다고?”
“응. 못생겼어.”
“굉장해. 사제들이 악령에 씐 사람을 구해 줬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나도 네 활약을 봐야 했는데!”
나는 불쑥 의문이 들었다. 블랑세가 나를 감시하다시피 하면서도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질 때면 대체 어디에 있는지 말이다.
“이번엔 어디 갔었는데?”
“아이. 어디 있든 내 마음은 늘 너와 함께하잖아.”
“또 그렇게 얼버무리지.”
나는 싱싱한 샐러드를 찍으며 슬슬 블랑세가 싫어할 말을 전하기로 했다.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 명을 받았어.”
“…황태자 전하의 명?”
예상과 달리 블랑세는 뭔가 떨떠름하게 눈을 깜빡였다.
“응. 루솔릿 공작령에 다녀와야 해.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아, 그래. 잘 다녀와.”
‘잘 다녀오라고?’
블랑세가 평소처럼 같이 간다고 하지 않으니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왜 이번엔 같이 간다는 말을 안 하는지 물어보기도 무엇하고 말이다.
어딘가 힘이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티스푼으로 찻잔을 저었다. 달칵. 이따금 찻잔과 컵이 부딪치는 소리가 평소보다 많이 들렸다.
방으로 돌아와서 옷가지를 챙기는데, 블랑세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원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끔은 더 이해할 수 없어.’
기뻐했다가, 집착했다가, 불안해했다가… 때로는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공녀님, 공녀님.”
언제나처럼 활발한 목소리로 니나가 말을 걸어왔다.
“제가 공작님이 가신 동안 할 일을 생각해 봤어요!”
“할 일요?”
“네. 우후훗. 연구도 쉬엄쉬엄하셔야죠. 휴양부터 관광까지 완벽한 코스로 수도를 즐기시기. 어떠세요?”
“아. 미안하지만… 루솔릿 공작령으로 가야 해요.”
“네에?! 왜요?”
니나는 마치 내게 해고 통보를 받은 것처럼 눈이 동그래졌다.
“서, 설마 본가로 다시 돌아가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니고.”
“하아. 다행이다!”
왜 니나가 다행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짐가방을 들려고 할 때 그녀가 잽싸게 가방을 가로챘다.
“공녀님. 이번에도 저 데리고 가실 거죠?”
“음… 본가니까 혼자 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필요한 건 황태자 전하가 지원한다셨고.”
“네에? 호, 혼자 가신다니. 그럴 리가요!”
니나는 격하게 부정하며 가방을 끌어안더니.
“왜요? 왜요? 왜요?”
질문 거듭하기.
“정말 정말 하녀는 필요 없으세요?”
재확인 단계를 거쳐 결국엔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네. 혼자 잘 쉬다가… 아니. 임무를 잘 마치고 올게요!”
내가 극구 혼자 가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에카르트가 잠시 북부 토벌 건을 검토하는 사이 다비온이 내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 공녀. 도적 소탕 건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마법사들을 대가 없이 지원할 테니 가족과 좋은 시간 보내고 푹 쉬다 오세요.
자비로운 황태자 전하께서 내게 휴가를 하사하신 것이다. 물론 가족과 좋은 시간 보낼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황금 같은 기회! 나는 히죽 웃다가 곧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니나. 공작령에서 기념품이라도 사 올게요.”
“저 잊으시면 안 돼요. 흑흑….”
“어휴. 일주일 안에는 올 텐데 그사이에 잊을 리가요.”
“그럼 일주일 넘으면 잊으실 건가요! 네?!”
치맛자락이 쭉쭉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위기감을 느낀 나는 아니라고 몇 번이나 달래며 슬금슬금 준비된 마차로 향했다.
북부에서 열심히 마수를 소탕하고 있을 에카르트가, 황태자의 특명이란 말을 듣고 묘한 반응을 보이던 블랑세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이젠 너무 좋은 이들이지만 그래도 둘에게 벗어나 잠시라도 쉬고 오자고 생각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마차에 오르려던 그때. 마차 문이 먼저 열리더니 익숙한 분께서 손을 내밀었다.
“시엘리나.”
“…헉.”
분명 출전 요청을 받아서 북부로 떠났을 텐데!
내가 놀라서 뒤로 자빠지려고 하자 그가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기더니 제 옆에 앉혔다. 그 부드러운 손길, 무시무시한 눈빛, 시원한 체향.
그리고 날 부를 때 힘을 실은 목소리.
전부 유령이 아니라 내가 아는 에카르트 크로덴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다시피 자리에 앉자 에카르트가 천장을 가볍게 두드려 마차를 출발시켰다.
“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오셨어요?”
“그놈을 데리고 갔습니다. 워프 마법진을 쓰도록요.”
“그놈이라니 설마 황태자 전하요?”
물귀신 작전인가!
“물론입니다. 마수를 소탕하자마자 다시 마법진을 발동시켜 수도로 왔지요. 당분간은 기사단에게 맡겨도 됩니다.”
3년 전부터 기사단의 실력은 눈에 띄게 상승했다.
그런데 마수 출몰이 줄어들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에카르트 없이도 요즘은 어느 정도 방어할 군사력이 되었다니.
“그것참… 정말 기사단도 대단하네요. 비결이 뭘까요?”
“대단한 건 없고. 그저 하면 됩니다.”
“네?”
“열심히 굴려 줬지요. 그놈들을 잘 키워 아예 북부를 떠넘기는 게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에카르트는 흐뭇하게 미소 짓더니 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시엘리나. 한데 그놈들의 수장은 더 대단하겠지요?”
설마 칭찬이 듣고 싶은 건가. 자고로 맹수도 칭찬하면 사육사와 교감할 줄 알지 않는가.
“네.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만 했겠습니까. 여기 다쳤단 말입니다.”
“왜 백마법사에게 치료받지 않으시고.”
“다른 놈의 성력은 거부감이 들더군요. 당신 말고는 전부 돌팔이입니다.”
물론 더 잘 맞는 게 있지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연구는 들은 적 없었다.
“그런데… 저와 루솔릿 공작령으로 가시려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황태자 그놈도 생각하니 뻔뻔하군요. 이렇게 가녀린 당신께 혼자 임무를 맡기려고 하다뇨.”
아니라고. 그분은 나를 휴가 보내 주는 거라고!
“하하… 안 피곤하세요?”
“당신이 옆에 있으니 오히려 기운이 충전되는 것 같습니다. 어서 제 어깨에 기대시지요.”
에카르트는 반질반질한 얼굴로 능청스럽게 말했다.
***
결국 우리는 함께 루솔릿 공작성에 왔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당을 쓸던 하녀 한 명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공녀님?!”
이름이 세라였던가. 아마도 실라와 제법 가깝던 하녀로 기억했다.
“오랜만이네, 세라. 이쪽은 크로덴 공작님.”
세라는 에카르트에게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가움과 신기함이 교차한 눈빛이었지만 함부로 사정을 질문해서는 안 된다는 예의 때문인지 묻지 못했다.
“공녀님, 다시 와 주셔서 기뻐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루솔릿 공작이 아무 귀띔도 안 한 모양이었다. 에카르트가 온다고 들었다면 두 팔 벌려 마중 나왔을 텐데 말이다.
“루솔릿 공작님을 뵈어야 하는데. 어디 계셔?”
“앗. 아마 침실에 계실 거예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세라를 따라가며 나는 그녀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음. 그나저나 잘 지냈어?”
“네. 아가씨가 보고 싶었지만요.”
“하하.”
에카르트가 위기감을 느꼈는지 내 손을 슬쩍 잡았다.
“실라는 어때? 계속 여기서 일하고 있니?”
“…어. 그것이.”
“응? 이게 누구야!”
세라가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리셀 공작 부인이 등장했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에카르트를 보고는 눈이 커다래졌다.
“어머, 어머. 웬 일이래!”
“안녕하세요.”
나는 리셀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기에 적당히 인사했다.
“그래. 무슨 일로 왔니?”
“황태자 전하께서 지시한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리타가 아니라 네게 맡겼다고?”
“네.”
순간 리셀은 샐쭉하더니 다시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얘. 공을 인정받으면 포상금을 준다고 하지 않으시든?”
“이미 다 탕진했어요.”
“얘가. 얄밉게 굴기는.”
리셀은 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듯했다. 그러면서도 흔치 않은 미남은 최대한 눈에 오래 담아 두기 위해 빤히 응시했다.
“불쾌하군.”
“미, 미안해라! 그치만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에카르트의 싸늘한 반응에 리셀은 겁을 먹고 반대편 복도로 걸어갔다.
다시 실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그때. 이번엔 루솔릿 공작이 리타와 함께 허둥지둥 나왔다.
“크로덴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루솔릿 공작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의를 차리며 우리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나는 집무실에서 그간 평야에 대한 기록을 훑어보았다.
도적단이 있다는 신고를 받았으나 무시. 피해자의 진술이 있어도 경찰 역할을 하는 치안 기사조차 파견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도적단의 몽타주는 없나요?”
“애초에 그쪽으로 안 다니면 되지 않느냐. 일이 하도 많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네. 기사단 갑옷에도 녹이 슬 정도로 정말 바쁘셨나 봐요.”
나는 아까 문을 지키던 기사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솔릿 공작은 의욕 없이 설렁설렁 대응했다.
분명 일부러 안 나서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의 영달과는 상관없으니 적당히 평민들 털고 만족하라고… 본인의 안위만 챙기면 되는 건가.
작위를 떠나서 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가 되어서는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럼 공작성의 기사라도 지원해 주세요.”
“누님은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지 않나요?”
그때 시종일관 입을 닫고 있던 리타가 끼어들더니 그 단순한 지원조차 거절했다.
“기사들이 돌아다니면 영주민들도 겁을 먹겠죠. 다 영지를 생각한 결정이니 이해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