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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44화 (44/115)

#44화

우주가 폭발하거나 멸망할까 봐 걱정했는데 악마는 정말 슬프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초월적인 힘이 개입하지 못해.”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안 좋지! 더 이상 자극적인 일이 없어지잖아. 세계가 혼란스럽고 파괴되고 무너져야 살맛이 나지!”

“장난해? 너 같은 놈들이나 살맛 안 나겠지!”

나는 악마에게 꿀밤을 먹이자 악마는 바르르 떨며 씩씩거렸다.

“우우. 퇴마당할 것 같아.”

“시엘리나. 이 불결한 짐승을 계속 만지지는 마십시오. 제가 때리겠습니다.”

에카르트가 주먹으로 악마를 납작 복숭아처럼 만들었다. 악마는 베개 솜이 올라오듯 천천히 펴지며 연신 너무하다고 외쳤다.

나는 겸사겸사 에카르트의 상식을 일깨웠다.

“에카르트. 세상이 혼란에 빠지거나 파괴되면 안 되겠죠?”

“물론입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가 이 당연한 말을 부정하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악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나 여기 말고 다른 세계로 갈래! 차라리 빨리 퇴치시켜 줘.”

“네 계약자는 어떻게 하고?”

“일단 시켜 준다고 해 줘! 해 달라니까!”

악마는 물건을 사 달라고 드러누워 떼쓰는 어린애처럼 고주파 음을 냈다. 나는 한 번 더 꿀밤을 먹이고 말했다.

“조용히 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너 말고 다른 악마는 없어?”

“그야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내 친구들은 못 봤어.”

“퇴치는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내 이름을 부르고 사라지라고 명령해. 나는… 제롬. 악마의 이름을 알면 명령할 수 있거든.”

“제롬. 일단 황실에 보고하고 네 처분을 결정하겠어.”

“힝.”

악마가 어디서 왔든 시스 자작은 제국의 귀족이었으니 제국법에 따라 처분해야 했다. 악마에 대한 법령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

다비온은 시엘리나와 에카르트의 보고를 받고 조사단을 이끌고 왔다. 나와 에카르트는 악마를 심문한 내용을 공유했다.

시스 자작이 교역로 사업을 따내기 위해 악마와 계약하여 지형을 바꿨노라고.

악마를 퇴치한 후 드러난 교역로의 실체는 가관이었다. 조사관들과 다비온이 조사한 결과 강물은 수십 년은 걸쳐 정화해야 할 정도로 썩었고 길은 거칠고 험했다.

나와 에카르트는 여러 고위 신하들과 함께 황실로 모였다. 자작령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황제와 신료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있던 일을 말하면 될 뿐인데도 떨렸다.

“시엘리나. 회의장에서 주무셔도 됩니다. 상황은 제가 대신 보고하지요.”

“어떻게 황족이 계신데 그래요?”

“당신이 충분한 숙면을 취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뭐라고 하는 놈들은 회의에서 영구히 추방합시다.”

나는 그게 말이 되는지 따져 묻지 않았다.

대신. 이상하고도 뜬금없지만 에카르트에게 2세가 생긴다면… 아주 강하고도 제멋대로 자랄 거라는 상상을 했다.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네?”

“미소 지으셔서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회의장에 들어섰다.

문과 가장 멀리 떨어진 중앙 의자 양옆으로 긴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고 테이블은 전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특별 좌석이 마련되어 마치 비읍 자를 거꾸로 한 형태였다.

내가 보고를 위한 특별 좌석에 에카르트와 함께 앉았다.

작위가 높고 가문의 역사가 오래된 순으로 착석하므로 원래 왼쪽 첫 번째가 에카르트의 자리였다. 하지만 이번 보고를 위해 나와 가까운 자리에 앉은 것이다.

“하, 하하. 시엘리나. 무도회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오른쪽 세 번째에 앉은 루솔릿 공작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아, 네. 공작령에는 별일 없죠?”

“그럼! 시간 날 때 언제든 들르렴.”

내가 정색하니 시엘리나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이윽고 황후와 황태자가 입장하고 모두 기립했다. 나와 에카르트 역시 뒤돌아 인사를 했다. 황후는 중앙에, 황태자는 오른쪽 첫 번째 의자로 향했다.

“앉으세요.”

황후의 말에 모두가 착석했고 나는 보고서를 한 번 더 눈으로 빠르게 읽었다.

“공녀. 어제의 일을 보고하시길.”

“네. 시엘리나 루솔릿 공녀입니다. 자작성에서 있던 일을 전부 말씀드립니다.”

크로덴 공작과 함께 자작성으로 가는 길에 이상 기류를 알아차린 것.

신변 보호를 위해 구체적인 신상을 밝힐 수 없지만, 하녀의 구조 요청을 받고 서재에 가 악마를 제압한 이야기까지 마쳤다.

중간중간 가까운 귀족들과 눈을 마주치며 집중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어. 공녀께서 미지의 존재를 제압했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성력이 많아서 그런 걸까요?”

“공작께서는 따님을 아주 잘 키우셨습니다그려.”

나의 노고를 칭찬하는 이야기가 잠시 이어진 후. 황후가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도록 했다.

“악마는 황실에서 연구 중이며 시스 자작은 근신하고 있어요. 한데 악마의 힘이 사라지며 더 이상 초록의 길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지.”

“허어. 하루아침에 교역로가 사라져 버렸으니….”

“당분간이야 다른 길로 돌아가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큰 타격을 미치겠지.”

임시로 된 길을 이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길은 길목도 좁고 영지 역시 폐쇄적인 분위기인 데다 상인들이 머물 만한 시설도 마땅치 않았다. 다비온이 이미 어느 정도는 정해진 것처럼 말했다.

“루솔릿 공작령 평야 지대를 교역로로 개발하죠.”

당연히 나도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는 해 두었다.

“넵?”

그러나 루솔릿 공작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놀란 듯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민망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하하. 그, 공작령 길이 좋긴 하지만 평야에 도적 떼가 남아 있는데….”

“소탕하면 될 것을. 영주가 되어 그깟 오합지졸 도적단을 처리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아렌다 황후는 마치 칼로 무를 자르듯 단칼에 말했다.

“무, 물론입니다.”

“게다가 시엘리나 공녀가 있지 않은가?”

아렌다는 나를 끌어들이더니 뜬금없는 요구를 했다.

“악마를 퇴치한 것도 시엘리나 공녀지. 이참에 공녀가 도적 소탕까지 맡아 주었으면 해요.”

‘대체 뭐라는 거야?’

나는 에카르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데다가 군사 작전은 맡아 본 적도 없는데… 뜬금없는 명령조차 받들 정도로 충성심을 보일지 시험하는 건가?

“지금-”

에카르트가 싸늘하게 반응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섰다.

“황후 폐하의 명 받들겠습니다. 다만 사업 진행은 온전히 아버지께서 처리하도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현재 백마법사로서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본업이자 에카르트의 치료에 집중하고 싶다는 핑계를 에둘러 표현했다. 더불어 실질적인 진행은 루솔릿 공작에게 떠넘기고 말이다!

“공녀의 뜻을 이해합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황후가 아니라 다비온이 순순히 승낙해 주었다.

“그럼 이 안건은 닷새 후 공표하겠습니다. 그전까지는 회의 내용을 발설할 것을 일절 금하며, 각 영지마다 상인들을 안내할 치안 기사를 지원 바랍니다.”

“가문의 명예를 돕고 힘껏 돕겠습니다.”

“제국을 위해 무슨 일이든 기쁘게 하겠습니다.”

귀족들이 열심히 아부하며 충성심을 보임으로써 회의는 끝났다.

회의가 끝난 후. 황후와 귀족들은 돌아가고 에카르트는 다비온을 회의장에 남겼다.

“황태자 전하. 할 말이 있는데.”

이상한 높임말로 시작한 말은 패륜으로 끝났다.

“네 어머니가 과로하여 노망이 났는지 걱정되는군. 고귀한 공왕께서 그 흉악한 도적 떼를 처리하란 거냐?”

“에카르트. 저 할 수 있어요!”

그래도 마검의 지배자는 싱긋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착한 시엘리나, 이놈들 말에 다 따라 줄 필요 없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 겁니다. 부려 먹히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 건 덤이지요.”

이놈들이란 틀림없이 황태자와 황후를 말하는 것이리라. 맞는 말 같지만 나는 그가 더 황실을 모욕하기 전에 하하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일단… 공작령으로 가서 조사해 보죠.”

“네. 당신 본가를 드디어 가 보는군요.”

“제 본가요?”

“함께 가는 거 아닙니까?”

에카르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나를 졸졸 따라오려는 습관은 알지만, 마검의 지배자면서 도적 떼를 소탕하는 잡무를 한다니!

“미안하지만 에카르트.”

다비온은 정말 이런 말을 하긴 싫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공녀님은 내가 지원할게.”

“네놈이?”

“응. 북부 출전을 요청하는 편지가 쌓여 있어. 너는 북부에 다녀와야 해.”

그러자 에카르트는 다비온을 당장 해치워야 할 마수처럼 흉흉하게 바라봤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부에 출전하는 그의 처지가 좀 안타까웠다.

“시엘리나.”

이제 나의 이름인데 에카르트가 부를 때면 가끔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가 내게 보여 주는 태도가 낯설지도 모른다.

“그전에 당신 성력은 전부 받아 가겠습니다.”

물론 이런 집착은 낯설지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카르트는 그 답으로는 모자란지 나를 꽁꽁 묶어 두고 싶은 눈빛으로 말했다.

“혹시라도 잠시 안 본 사이에 다른 놈을 치료한다면… 아니.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요?”

“하하, 그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르죠.”

협박을 듣고도 순순히 따라 주지 않으니 그가 입꼬리만 올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서 돌아와야겠군요.”

“천천히 오세요.”

“토벌 신기록을 보실 겁니다.”

왠지 에카르트가 분리불안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나는 무리하지 말라고 재차 당부했다.

***

성력 집착남은 나를 크로덴 공작성까지 데려다주고 북부로 떠났다.

내가 특별히 제작한 회복 포션과 성력을 담은 연고를 잔뜩 챙겨서 말이다.

나는 귀빈실에 들렀다가 필요한 짐을 챙겨 루솔릿 공작령으로 떠나기로 했다. 준비라고 해 봤자 옷 몇 벌을 챙기는 일일 뿐이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별의 꽃은 연구실에서 이중, 삼중의 마법진으로 잠가 보관했다.

“시에-엘!”

물론 그전에 내게는 인사를 나눠야 할 집착녀 한 명이 더 남아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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