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무늬는 없었지만… 반죽 안에 열쇠가 들어 있었다. 투박한 재질로 봐서는 사본 같았다.
‘이게 서재 열쇠인가?’
별다른 마법이나 주술이 걸리지 않았는지 확인한 후 주머니에 넣었다.
물론 함정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하녀와 시스 자작이 짜고서 나를 제물로 바치려 했다면 일부러 정보도 충분히 알려 주지 않았겠지.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느라 니나가 돌아온 것도 잊었다.
“공녀님. 티를 가져왔어요!”
“…….”
“공녀님?”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을 테니 일단 서재에 가 볼 생각이었다. 물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내 편을 데리고 말이다.
“아, 고마워요. 잘 마셨어요.”
나는 달콤한 티를 몇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니나가 볼을 부풀리고서 말했다.
“공녀님. 저… 뭔가 섭섭해요.”
“…네?”
“자작성 크레이프는 두 번이나 주문하시고! 제가 한 크레이프보다 더 마음에 드셨어요?”
“설마요. 니나가 한 게 더 맛있죠.”
“그쵸!”
니나가 언제 토라졌냐는 듯이 다시 환한 미소를 보였다.
“여기서 먹은 게 더 맛있다고 하시거든, 제가 최고라고 할 때까지 대접하려 했어요. 우후후.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만 번이든요….”
어째서 점점 주인도 모자라 하녀까지 집착하게 되었을까?
하긴. 니나는 원래 이상했다는 사실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
옆방을 노크하니 가운 차림의 에카르트가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즉각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다행히 창문의 커튼은 쳐져 있었다.
“시엘리나. 제가 있는 곳으로 먼저 와 주시다니. 아까의 부상이 신경 쓰였습니까?”
“아직도 부상이라고 굳게 주장하시네요.”
“중상이라고 할까요?”
“백 걸음쯤 떨어진 거리에서 봐도 중상은 절대 아니었어요.”
그의 몸에 흘긋 눈길이 갔다.
탄탄한 가슴, 매끈한 피부, 수련과 운동으로 다져진 멋진 근육.
사실 오는 길에 아까처럼 악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작전 하나를 생각했는데… 이래서는 원래 작전을 개시하기 망설여졌다.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할까? 아냐. 그것도 이상해!’
이건 다 계산된 행동일 뿐이라고 머릿속으로 경건하게 제국가를 제창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좋은 체향에 또 기분이 묘해졌다.
“음. 그래도 상처가 나았는지 볼까요?”
“네.”
“앉아 보세요.”
내가 소파에 앉자 그 역시 옆에 얌전히 앉았다.
나는 그의 부상을 확인하는 대신… 그대로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식탁의 찻잔을 일부러 쳐서 쓰러뜨렸다.
찻잔이 빙글빙글 돌며 작은 목소리가 묻힐 만큼 소음을 냈다.
“…시엘리나?”
“반응하지 말고 들어요. 하녀가 도움을 요청했어요. 저택에 악마가 있대요.”
내가 속삭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래서 9시에 서재로 가 볼 생각이에요. 제가 먼저 들어가고 문을 열어 둘 테니, 상황을 봐서 와 주세요.”
빙글빙글 돌던 찻잔이 이내 멈추고 방 안은 조용해졌다.
갑작스러운 포옹이 당황스러웠는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나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네. 저도 당신 좋아합니다.”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알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이렇게 능청스러운 연기가 바로 나올 줄은 몰랐기에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슨 일이든 걱정 마시길.”
에카르트는 내 계획이 실패해도 또 다른 대책이 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닿았던 바람에 내 머리카락 끝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느덧 서서히 노을이 지고 하녀가 예고한 시간이 다가왔다.
‘하녀가 여태 악마를 본 적은 없다고 했지.’
동화 마법을 쓰거나 특별한 힘을 발휘하면 모습을 숨길 수 있다. 그래도 모습을 드러내게 할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는 귀빈실에 있던 와인 한 병을 집어 들고 하녀가 말한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며 마력으로 만든 발판을 따로 만들어 밟았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2층 복도 끝에 검은색 문이 있었다. 문은 마력이 잘 통하지 않는 특별한 나무로 만들어졌다.
나는 손잡이에 열쇠를 밀어 넣은 후 문을 열어젖혔다.
마치 물이 차오른 장소처럼 책과 책상과 의자가 떠올라 있었고 붉은색 마법진이 바닥에 넓게 그려져 있었다.
의자에 묶여서 몸부림치는 하녀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자작이 보였다.
“뭐하는 짓이야!”
“고, 공녀?!”
나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마법을 감지했다. 그쪽을 향해 와인 병을 던지고 마법으로 작은 충격을 발생시켜 병을 깨뜨렸다.
와인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허공에 묻어 악마의 실루엣이 대강 드러났다. 악마는 박쥐처럼 커다란 날개에 뾰족한 뿔을 갖고 있었다.
‘정말 악마였어?’
몸통은 털북숭이라서 산양을 닮았는데 다리는 사람처럼 생겼다. 날개가 파닥일 때마다 붉은색 와인 방울이 떨어졌다.
“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듯한 괴상한 비명과 함께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아까 교역로를 지날 때의 그 역겨운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괴생명체가 창문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결계로 막자 그것은 방향을 바꾸어 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에카르트가 강하게 문을 닫아 버렸다.
“꽥!”
이름 모를 악마는 문에 얼굴을 부딪치고 비실거리며 툭 떨어졌다.
“에카르트. 저놈 잡아요!”
“알겠습니다.”
에카르트는 주먹으로 악마를 가격했다. 경쾌한 파공음과 함께 와인 방울이 사방으로 튀며 순간 형상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물리적 충격을 받고 동화 마법이 완전히 해제되었다. 악마의 제대로 된 모습이 보였다.
눈동자는 붉은색이었는데 눈은 하나였으며 털 아래 까만색 피부가 매끈했다.
에카르트가 악마를 닭처럼 잡아들고 악마보다 더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이놈입니까?”
“그런가 봐요.”
“놔!”
악마는 에카르트의 팔을 깨물려고 했지만 에카르트가 악마의 턱을 움켜쥐었다.
“이빨 다 뽑아서 목걸이로 만들고 네 목에 걸어 졸라 버리기 전에 얌전히 있어.”
“딸꾹.”
나는 하녀를 묶은 밧줄을 풀어 주며 시스 자작을 추궁했다.
“자작.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 그… 이건 위법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마법 연구였을 뿐.”
“황태자 전하께도 똑같이 말씀드리면 되겠네요. 저런 잡귀로 사람들의 눈을 속여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다고.”
“부, 부당한 이득이라뇨!”
“교역로도 악마의 장난 아니던가요? 같은 힘이 느껴지던데.”
“……!”
자작은 차마 부정하지도 못하고 벌벌 떨다가 하녀에게 호통 쳤다.
“어, 어떻게… 네년이 말했구나!”
“히, 히익! 전 몰랐어요!”
나는 하녀가 묶여 있던 밧줄을 마법으로 띄워 자작의 양손을 포박했다. 그는 뒤로 젖혀져 머리를 땅에 박고 기절했다.
“가, 감사합니다. 저는 어떻게 할까요?”
하녀가 울먹이다가 내게 말했다.
“나중에 증언이 필요할 거예요. 지금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좀 쉬고 계세요.”
하녀는 덜덜 떨며 자작의 옆에 주저앉았다. 에카르트는 이 엉망인 상황 속에서도 오직 내게만 집중했다.
“시엘리나. 역시 당신은 대단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완벽하군요.”
“네? 갑작스러웠던 일인 걸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저는 처음부터 아주 마음에 드는 작전이었으니 덜 겸손하셔도 됩니다. 당신 덕분에 악마도 잡아 봤는데, 어디 한번 만져 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내가 호기심 삼아 만져 보자 성력에 반응했는지 악마가 고통스럽게 발발 떨었다.
“이익, 만지지 마!”
에카르트 역시 뭔가 불쾌한 듯 악마를 내 손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만 만지는 게 낫겠습니다. 당신이 인간 대신 악마를 만지면 참을 수 있나 궁금했는데… 이것도 기분이 안 좋군요.”
가끔 에카르트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를 때가 있었다.
한편 악마는 하나뿐인 눈동자를 이리저리 깜빡이며 에카르트를 관찰하고 겁에 질렸다.
“…대악마님?”
“입 다물어!”
나는 악마에게 꿀밤을 먹였다. 그렇지 않아도 에카르트가 악마의 환생이니 뭐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듣는데 상처받게!
악마가 나를 보며 날개를 바르르 떨더니 두려워했다.
“네게서 엄청난 힘이 느껴진다. 너, 범상치 않은 인간. 초록 길의 결계까지 알아봤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악마가 얼굴을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네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 이 세계의 인간 주제에!”
“…….”
내가 다른 세계에서 빙의했기에 계약자가 아니라도 악마를 알아볼 수 있었나? 하지만 악마는 그것까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이놈의 박쥐가 뭐라는 겁니까?”
“그러게요. 어쨌든 생각보다 일이 커졌으니 황태자 전하께도 보고해야 할 것 같아요.”
“네. 다비온 놈도 잠을 퍼질러 자고 있지 않다면 금세 도착하겠지요.”
그는 악마를 쥐고는 우아하게 소파에 앉았다.
우리는 황실 지원군이 도착하길 기다리며 악마를 심문하기로 했다.
“네 정체가 뭔지 말해 봐.”
“악마 중의 악마, 소악마 님이시다!”
“누구든 악마를 불러낼 수 있어? 아무나 불러냈다가는 제국에 혼란이 올 텐데.”
“아무나가 아냐! 자작가는 수백 년간 직접 제물을 바쳤어. 그 정성이 통하여 나를 불러냈지.”
“고용인들의 목숨을 뺏어서?”
“아냐! 목숨은 안 뺏었어. 내 모습을 보고 평범한 인간들은 다들 기억을 잃었단 말이야. 돈 좀 얹어 주고 내보냈다고!”
내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악마는 다급하게 정보를 털어놓았다.
“물론 내가 저 인간의 소환에 응할 수 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어. 그 당시에 이 세계의 흐름이 불안정했기 때문이야! 나 같은 중급 악마도 넘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고.”
“더 자세히 말해 봐.”
“이 세계의 흐름은 세 번 어긋났어.”
“세 번?”
“시간의 법칙이 한 번. 공간의 법칙이 두 번. 정확한 시기는 알아낼 수 없지만… 내가 이 세계에 온 건 3년하고도 89일 전. 마지막 혼란을 틈타 소환됐지.”
머릿속으로 오늘 날짜로부터 89일을 빼 보았다.
‘내가 시엘리나의 몸에 빙의한 날이잖아?’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정보를 더 캐냈다.
“흐름이 세 번 바뀌면 어떻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