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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42화 (42/115)

#42화

예상과 다른 그의 반응에 시스 자작은 어물쩍 넘어갈 수 없었다.

결투는 자작성 연무장에서 진검으로 치러졌다.

수련 시간이 아니었는지 연무장은 한산했고, 구석에 앉아 검을 손질하던 기사 한 명과 내가 심판을 보게 되었다. 자작이 슬쩍 지팡이를 꺼내어 들며 말했다.

“저는 지팡이를 사용하겠습니다. 공작님께서는… 마검을 사용하실 건 아니지요?”

“마검을 쓰기엔 연무장이 좁군.”

“그럼 제가 검을 준비하겠습니다요!”

자작이 내밀은 건 우습게도 초심자가 연습용으로 사용할 법한 목검이었다.

저 인간이 비겁한 건 하루 이틀도 아니었지만… 본인은 고급 마법 지팡이를 쥐고 에카르트에게는 목검을 주겠다니. 그러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덧붙였다.

“제가 선단 공포증이 있어서요.”

“아아. 오늘 공포증 하나가 더 추가되겠군.”

에카르트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며 목검을 받아들였다.

나는 자작의 마법이 에카르트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승부고 나발이고 튀어 나갈 생각이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주문을 시전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터. 아마 에카르트는 그전에 자작을 제압할 것이다.

경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내 추측과 달리 자작의 마법이 빠르게 발동했고. 에카르트는….

‘목검으로 저 상급 마법을 막았어?’

마검의 지배자라면 검의 종류가 어떻든 가능한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커다란 방패를 밀어붙이듯 에카르트가 마법 파장을 밀고 가 단숨에 자작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목검 끝을 반질반질한 목에 가져다 댔다.

“소문의 반은 사실이었으니 몸통 절반만 베어 내겠다.”

에카르트라면 목검으로도 정말 사람을 벨 수 있을 것이다.

“허. 허허…. 사, 살려 주십시오!”

“체리베리 과수원을 소유한 영주를 살려 준다면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지?”

그러자 자작이 당연하다는 듯이 굽신거렸다.

“그, 그럼요. 과수원 3구역을 드리겠습니다! 수확량이 좋은 땅 중 하나입니다.”

“아니. 수확량이 높았던 것도 올해까지였을 터. 오랜 기간 농작물을 재배하여 산성화도 진행되지 않았는가.”

“그, 그렇다면….”

“과수원 7구역부터 10구역까지. 시엘리나 공녀의 명의로.”

뜬금없이 내 이름이 나온 바람에 당황했다.

하지만 주겠다는 사람 말릴 수도 없고 자작의 앞에서 옥신각신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얌전히 있었다.

울먹이며 알겠다고 답하는 자작을 내버려 두고, 나는 검을 내려놓은 승자에게 속삭였다.

“정말 제게 주시려고요?”

“물론입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럼… 딱 이거만 받을게요.”

나는 손가락으로 한 개를 들어 올렸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니 하나쯤은 받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백 개. 알겠습니다.”

“아뇨. 한 개!”

“알겠습니다. 어차피 나중에는 다 당신 것이 되겠지만요.”

그건 또 무슨 의미람. 그러고 보니 아까 헛소문의 절반은 사실이었다는 말은 또 뭐고….

에카르트는 언제 흉흉하게 협박했냐는 듯이 내게 손을 보여 주며 말했다.

“그나저나 시엘리나. 목검을 쥐었더니 가시에 찔린 것 같습니다. 따가워서 어쩌지요?”

“아아, 네. 한번 볼까요.”

당연히 가시 같은 게 박혔을 리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꼼꼼히 보다가 말했다.

“그저 가볍게 쓸린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성력을 나눠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작의 마법이 에카르트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고 강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목검 상태가 불량해서 가시에 찔렸다며 성력을 요구하기까지.

엄살을 부리는 에카르트를 두고 나는 장난스레 자작을 향해 엄하게 말했다.

“자작. 성에 백마법사가 있나요? 자작에게 받은 검을 사용하다 다쳤으니 그쪽이 치료를 도와야 할 것 같은데.”

“어, 없습니다!”

또 뭔가를 갈취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정말 없는 듯했다. 자작처럼 부유한 귀족은 보통 영지에 상주하는 백마법사를 둘 텐데… 없다니 의아했다.

“시엘리나. 저 손가락이 붓는 것 같습니다.”

“아, 네네.”

나는 일단 엄살쟁이를 치료해 주기로 했다. 지팡이를 꺼내 간단한 회복 마법진을 그렸다. 성력이 모이고 그가 싱글벙글 미소 지었다.

“괜찮아졌죠?”

“그럼요. 아주 좋습니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시스 자작은 지치지도 않고 다시 슬금슬금 영업 시동을 걸었다.

“공작님. 무례를 사과하고자 체리베리 디저트라도 대접하겠습니다.”

“우리. 아니, 내 백마법사의 뜻대로 하지.”

에카르트가 이상한 소유격 표현을 쓰며 내 의견을 구했다.

어차피 지금 돌아가기에 시간도 애매할뿐더러 여기서 머물며 교역로의 마법에 대한 단서를 찾을지도 모르니 나는 수락했다.

“좋아요.”

“알겠습니다. 어서 안내하도록.”

마치 하인에게 명령하듯 에카르트가 자작에게 말했다.

돌아가려는데 연무장 입구에 서 있던 누군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리본 머리끈을 한 하녀였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금세 시선을 회피했지만… 아까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 같다.

***

시스 자작이 앞서 걸으며 저택을 안내했다.

저택은 복도 기둥마다 목조나 금속 대리석으로 조각한 산양 동상이 놓여 있었다.

내가 알기로 시스 자작가의 상징은 하얀 토끼였다. 그새 상징이 바뀌었을 리는 없을 터. 주변을 둘러보자 에카르트가 슬쩍 말했다.

“시엘리나. 이곳이 마음에 들면 말씀하십시오. 애써 여기까지 왔는데 성 한 채는 기념품으로 가져가야지요.”

“괜찮아요.”

과수원까지 받았으면 됐지 왜 더 규모가 커졌담.

연회장의 긴 테이블 옆에 임시 무대가 마련되었다.

체리베리 디저트가 준비되는 동안 무대에서 음유 시인들이 연극을 했다.

체리베리를 찬양하고 간접 광고하는 연극을 보자니 세뇌당할 것 같았다. 게다가 멜로디와 가사가 중독성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따라 부를 뻔했다.

“체리베리로 반죽한 크레이프 케이크를 준비했습니다.”

아까 리본 머리의 하녀가 내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달콤한 시럽을 뿌린 크레이프 케이크는 새콤달콤해 보여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크레이프 한 겹을 포크로 돌돌 말았는데 아래에 하얀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무늬라고 생각했지만… 글자 같았다.

‘도….’

긴가민가하며 한 겹씩 더 걷어 내자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와…주세요?’

일단 크레이프를 조심스레 먹었다. 별다른 독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하녀를 흘긋 보며 말했다.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만들었어요.”

하녀는 손을 들고 마치 알아봐 주길 원했다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핑계를 댔다.

“혹시 하나 더 있을까요?”

“만드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릴 거예요. 이따 가져다 드릴까요?”

“그럼, 부탁할게요.”

자작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또 체리베리의 신선함을 어필했다.

***

나와 에카르트는 귀빈실 각방으로 들어가 잠시 쉬었다.

곧 아까 신호를 주고받은 하녀가 새로운 크레이프 케이크를 갖고 들어왔다.

“저, 실례합니다.”

그녀가 케이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막상 도와달라는 건 저쪽인데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 긴가민가할 때. 하녀가 니나의 눈치를 살폈다.

지레짐작이지만 누군가 있을 때 말하긴 곤란한 내용인가.

물론 자작성의 하녀를 전부 신뢰할 순 없었다. 그러나 나는 교역로에 대한 단서를 찾는 중이었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거든 나 하나쯤 지킬 능력이 되었다.

물론 에카르트 역시 그럴 능력이 충분하였기에 그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하녀의 뜻대로 해주기로 했다.

“니나. 크레이프와 같이 마실 차를 타 줄래요? 가방에 티가 있을 거예요.”

“네!”

니나가 씩씩하게 짐을 찾으러 들어갔다. 하지만 하녀는 이번에는 불안하게 창문을 살펴봤다.

“햇빛이 아직 강하네요. 커튼을 칠까요?”

“아아, 네. 제가 하겠습니다!”

하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커튼을 닫고는, 그제야 앞치마 주머니에서 펜과 메모장을 꺼냈다. 그러다 뭔가를 써서 내게 보여 줬다.

- 그 눈이 창문을 통해 모든 것을 보고 있어요.

내가 떨떠름하게 종이를 바라보자 하녀가 떨리는 손으로 마저 글을 적었다.

- …악마예요.

‘악마?’

그녀는 메모장 한 장을 살살 넘기고서 다음 페이지에 글을 적었다.

- 저도 그것의 존재는 잘 몰라요. 직접 본 적도 없고요.

나는 펜과 메모장을 넘겨받고 필담을 나눴다.

-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됐죠?

- 자작성은 종종 말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일어나요.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나무가 흔들린다거나. 의자가 떠다닌다거나. 그 모두 악마의 소행이라는 이야기가 돌죠.

- 악마에게 그 외에 무슨 능력이 있나요?

- 모르겠어요. 왜 여기 있는지도!

궁금한 게 아직 많은데 하녀가 답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악마라. 교역로의 마법과 연결 고리가 있을지 몰라.’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하녀가 간곡하게 두 손으로 메모장을 내밀고는 말했다.

- 공녀님께서 백마법사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까 성력을 쓰신 것도 봤고요. 제발 그 악마를 퇴치해 주세요!

- 저는 백마법사이지, 퇴마사가 아니에요.

- 성수 뿌리고 기도문 읊고… 아닌가요?

도움은 치밀하게 요청하면서 이렇게 이해도가 없었을 줄이야.

악마 같은 놈들은 봤지만 아직까지는 진짜 악마는 보지 못했던 나였다. 성력이 있을 뿐 기도문이나 신의 교리는 귀족으로서 그저 기본적인 수준만 알았다.

그러니 역시 이건 전문적인 사제를 부르는 게 낫겠다.

- 신전에 도움을 요청할게요.

- 안 돼요, 안 돼요. 9시가 되면 자작님이 저를 제물로 바칠 거예요! 집사가 미리 귀띔해 주었어요.

시스 자작이 단순히 입만 털어 대는 못난 놈인 줄 알았는데 사람까지 바쳤단 말인가.

정말 악마인지는 몰라도 어떤 마법은 발동하는 데에 재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게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9시까지는 세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황실이나 신전에 연락을 취하더라도 자작성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무리겠지.

- 제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 2층 서재요. 검은색 나무 문이에요.

- 늦지 않게 찾아갈게요.

- 꼭 와 주셔야 해요!

하녀가 신신당부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으로 나갔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하녀가 가져온 케이크를 다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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