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야….”
에카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결투 승리 보상으로 겸사겸사 체리베리 과수원 정도는 받아 오려 합니다.”
“과수원을?”
“네. 모쪼록 걱정 마십시오. 이참에 그놈 목을 베고 마검 날이 반질반질하단 것을 보여 줘야지요. 그놈은 명예롭게 죽을 겁니다.”
과수원도 받아 내고 죽이기까지! 정말 깔끔한 일 처리지만 그래도 살생은 막아야 했다. 적어도 내가 가면 브레이크를 걸 수 있으리라.
‘게다가 자작이 내 경고를 무시한 대가는 직접 치르게 해야지.’
“에카르트. 그럼 같이 갈까요?”
연구에 방해가 될 만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매우 좋습니다.”
그는 우아하게 웃고는 마치 지금부터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듯이 다가와 팔짱을 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그리고 셔츠 아래로 느껴지는 탄탄한 팔뚝. 슬그머니 팔을 풀려고 했는데 에카르트가 놓아주지를 않았다.
“공녀님. 이번에도 제가 모실게요!”
자작령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후 니나는 믿음직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쳤다.
“저… 공녀님의 전담 하녀가 돼서 너무너무 기뻐요.”
그런 말은 아직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콧노래를 부르며 내 옷과 멀미약을 챙기는 니나에게 찬물을 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긴 그녀가 없다면 자작성의 하녀들에게 시중을 받아야 하겠지. 나는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니나. 원래 크로덴 공작님이 소문에 직접 대응하나요?”
“음. 보통 기사단을 보내실 거예요.”
“그럼 왜 이번엔 직접 가시죠?”
그러자 니나는 짐을 챙기다 말고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단지 추측일 뿐이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공녀님이 관련되어서가 아닐까요?”
“제가 소문과 관련됐다고요?”
“어?!”
니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다 자신의 입을 막았다.
“공작님을 도발했다고만 들었는데. 제가 모르는 내용이 있는 건가요?”
“어어, 전…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말해 주세요.”
내가 니나를 보채자 생략된 소문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최대한 순화된 내용을 바탕으로 추측해 보자면.
에카르트가 나한테 빠져 사느라 검술을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 같다.
“그럼 저와 그렇게 얽혔기 때문에 두 배로 화가 난 걸까요?”
“아니죠, 아니죠!”
니나는 완전히 틀렸다는 듯이 두 팔을 교차시켜 엑스 자 모양을 만들었다.
“공녀님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잖아요!”
“제 명예?”
“크로덴 공작님도 마검의 지배자이기 전에 기사! 기사도에 따라 아끼는 여인을 위해 직접 응징하러 가시는 거예요. 우후훗!”
“…글쎄요.”
에카르트가 나를 아끼긴 하는 것 같다만, 흠…. 너무 멀리 나갔다.
아무래도 니나는 음유 시인들에게 사랑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은 모양이었다.
다음 날. 나와 에카르트는 호화로운 공작가 마차에 탑승했다.
시스 자작령까지 마차로 이동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다비온이 와서 마차 창문을 두드렸다.
“이런. 벌레 들어오면 안 되는데.”
에카르트가 능청스럽게 말하며 창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내가 창문 손잡이를 잡으려 하자 그는 그제야 직접 열었다.
다비온은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고는 말했다.
“그럼 워프 마법은 자작령과 가장 가까운 검문소로 발동하면 되겠지?”
귀족 간의 싸움에 황실은 개입 안 하는 게 원칙이라고 들었건만. 가까운 친구가 불렀다고 해서 또 황실에서 공작성까지 와서 도와주려나 보다.
“그래.”
에카르트는 마부에게 명령하듯 거만하게 말했다.
다비온이 마법을 발동하기 전 내게 걱정 어린 목소리로 당부했다.
“공녀. 부디 귀족 간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 주세요.”
“허허.”
내가 그저 웃자 다비온은 그건 역시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좀 더 쉬운 요구로 변경했다.
“살인은 절대 안 됩니다.”
“그건 당연히 명심할게요. 어떻게든 시스 자작이 살아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걱정 말라는 의미로 힘차게 말했는데 황태자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그렇게 다비온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시스 자작령으로 향했다.
곧 이동 마법이 발동하며 마차가 빛났다. 마차는 잔디가 잘 깎인 드넓은 초원을 천천히 달렸다. 나는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가 초록의 길이군요.”
“자작 놈에게 여기도 내놓으라고 할까요?”
“아뇨. 무슨 말을 못 하겠네요.”
자작성 초입은 교역로와 겹친다. 소규모부터 대규모의 상단이 짐마차에 여러 물건을 싣고 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었다.
이 인근에는 루솔릿 공작령과 벨라 영지가 있고, 교역로를 쭉 따라가면 인근의 여러 왕국으로 이어진다.
‘원래는 루솔릿 공작령을 교역로로 만들려고 했다던데.’
한때는 황실의 막대한 후원을 받는 교역로 사업을 두고 두 영지가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루솔릿 공작령 평지와 숲 지대에 당시 도적 떼가 출몰했다.
도적 떼야 어떻게든 소탕하면 된다지만, 당시 루솔릿 공작은 언제 걸릴지 모르는 교역로 개발보다는 당장 빠른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공작령은 도적 떼도 방치하고 투자도 실패했다. 반면 시스 자작령은 제국의 여러 중심이 되는 교역로 중 하나를 소유하게 되었다.
‘뭐. 가문을 나온 나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느긋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자작령에 온 후부터 가벼운 두통이 있고 속이 울렁거렸다. 멀미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출발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증상은 더 심해졌고 나는 에카르트에게 말했다.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을까요?”
“어디 안 좋으십니까?”
에카르트가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그 정도는 아니고. 바람을 쐬면 나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자작 놈이 살아 있을 시간이 조금 더 늘었군요.”
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직접 바깥에 나와 보니 불쾌한 느낌은 역할 정도로 더 심해졌다.
초록의 길은 마수나 도적들의 습격도 없는 데다가 옆으로 언제든 목을 축일 수 있는 강이 흘렀다.
그런데 강물에서 비린내가 심하게 났다. 의아함을 느낀 나는 둑길을 내려가 강물을 자세히 바라봤다.
맑은데도 악취가 느껴지고 물고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나는 허리를 숙여 주변의 자갈을 주워 들었다. 만약 환상 마법이라면… 물리적인 충격이 크게 느껴질 경우 반응하겠지 싶어 자갈에 마력을 입혀 멀리 던졌다.
물수제비가 물을 튕기며 힘차게 나아갔다. 강은 고요하기만 했고… 옆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역시 내 백마법사입니다. 못하는 게 없군요.”
“에카르트도 해 볼래요? 물수제비라는 놀이인데.”
“그러지요. 재밌어 보이는군요.”
에카르트는 주변의 바위를 마치 곰 인형을 안듯이 주워 들었다.
바위는 중력을 무시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포물선을 그리며 물길 저편까지 날아갔다. 무시무시한 괴력이었다.
“세상에.”
“시엘리나. 이렇게 되면 물수제비 한 번으로 치는 겁니까?”
“그, 글쎄요. 어쨌든 잘하셨어요.”
내가 하하 얼버무리고는 강을 관찰했다. 별다른 변화가 없으니 환상 마법이 아닐지라도, 의심을 걷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마력이 많은 만큼 주변의 마법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오레이칼 왕국에서 리타의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막아 낸 것도 그 덕분이었다. 분명히 이상을 느낀 이유가 있으리라.
시원한 바람이 불며 둑길의 풀이 흔들렸다.
‘잠깐.’
뭔가 깨달은 나는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읊었다.
“…….”
에카르트 역시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확인을 마친 내가 주변을 흘긋 돌아보고는 말했다.
“가요.”
다시 마차에 타자 그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네. 아까 풀잎 주변을 진공 상태로 만들었어요. 결계로 막혀서 바람이 통과하지 못하는데도 풀이 흔들렸죠.”
“이미 다른 마법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아마도요. 다른 지역도 더 조사를 해 봐야 알 것 같지만….”
지형 변화 마법을 이 정도로 감쪽같이 해낼 수 있다고? 그만한 실력을 가진 이가 누굴까?
“에카르트도 이상한 점을 느끼셨나요?”
“얼핏 위화감은 들었습니다만. 당신만큼 예리하지는 않았습니다.”
“황실 마법사들도 몰랐을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누군가의 소행이라도 수십 년간 그들 모두를 매수하기엔 어려웠을 테니까요.”
“하긴. 황실 마법사들 역시 알아차렸다면 알고도 숨겨 왔거나, 개발 사업 초창기부터 동조했다는 뜻인데… 자작가는 황실과 단단히 결탁한 가문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지 몰라도 지금으로서 짚이는 바가 없었다.
“일단 다비온 황태자 전하께 보고드리는 게 어떨까요?”
“좋습니다. 그 굼벵이도 머리를 굴리면 쓸모가 있겠지요.”
만약 이 교역로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면… 제국은 다른 교역로를 개발할 터. 아마 루솔릿 공작령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
시스 자작은 에카르트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성문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히극, 공녀님?”
자작은 나까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깜짝 놀랐다.
“시스 자작. 무도회 이후로 오랜만에 뵙네요. 어쩜 하나도 달라지신 게 없는 것 같아요.”
내가 태연히 그의 인사를 받아 주며 그때나 지금이나 입방정을 떨고 있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하하. 관리를 열심히 하긴 했습니다. 체리베리 즙이 노화 방지에 좋다더군요.”
“어머. 그런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눈치 없는 것도 여전하기에 나도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자작은 잠시나마 머쓱해했으나 다시 꿋꿋하게 어필했다.
“체리베리는 이제 여러 살롱에서 자신 있게 내놓는 디저트가 되었습니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 많으셨으니 성안으로 드셔서 한번 맛보시지요.”
그놈의 체리베리! 여태 무뚝뚝하게 서 있던 에카르트가 입을 열었다.
“시스 자작.”
“네, 크로덴 공작님.”
“나는 네놈을 포상하러 온 게 아니라 입을 허투루 놀린 죄를 치르게 하러 왔다.”
에카르트는 이곳에 온 목적이 오직 결투 때문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