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대체 내 백마법이 뭐기에.’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볼 때면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데. 원작에서 어째서 그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을까.
“…일단 손 좀 놓아주세요.”
“조금만 더요.”
에카르트는 내 손을 꼭 쥔 거로도 모자라 뇌쇄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별 의도 없이 마력 때문에 집착할 뿐인데 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그 사실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전 세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잘생긴 뱀파이어를 봤을 때, 저런 얼굴이면 내 피를 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크로덴 가문도 마력을 뜯어내기 위해 잘생기게 진화한 모양이다.
***
에카르트와 시엘리나를 공작성으로 돌려보낸 다비온은 황태자궁으로 복귀했다.
‘공녀가 정말 마법 대회에서 승리할 줄이야.’
시엘리나는 자신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계획을 세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계획을 실행할 능력까지 전부 갖췄다.
‘정말 에카르트의 저주를 해제할 수 있을까?’
다비온은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 시엘리나가 걱정되었다.
집무실 문을 열은 다비온은 굳었다. 황후가 그의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책상 위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디 다녀온 것이냐.”
“…잠시 잠행을 다녀왔습니다.”
다비온의 옷차림을 훑어본 황후가 날카롭게 물어보았다.
“홀로?”
“…….”
“되었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책상 위의 서류를 몇 장 넘겼다. 제국 각 영지의 세금 조정 계획 서류였다. 그러더니 깃펜을 들고 이미 다비온이 처리한 부분에 줄을 찍찍 그었다.
“팔콘 영지는 세율을 더 높이거라. 얼마 전 납부액을 낮추기 위해 재산을 빼돌린 정황을 포착했으니 이참에 본보기로 삼아야 해.”
“하지만 그 부담이 결국 영주민에게 갈 거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팔콘 영주만 처벌하면-”
“네가 동서 구역을 감독했지. 영주는 너를 능멸했다. 주민들 역시 그 대가는 함께 치러야 할 것이야.”
“…….”
“스스로를 살필 능력도 안 되면서 착해 빠져서야 먹잇감이 될 뿐. 팔콘 자작은 처형이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이럴 때면 황태자의 위치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하고 목숨까지 뺏을 수 있는 그 권한이, 너무나도 막중하게 느껴졌다.
황제가 되기 전에도 이러한데. 그 후에는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묻혀야 할까.
“또한 시엘리나 공녀 말인데.”
다비온은 태연하게 서 있었지만, 혹시 뒤를 밟혔을까 봐 불안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크로덴 공작과 몹시 가까워 보이더군.”
다행히도 황후는 그가 몰래 성전에 다녀오고 이동 마법진을 사용한 사실은 몰랐다.
“루솔릿 공작가와 크로덴 공작가는 큰 접점이 없었을 텐데. 그 공녀는 조금 다른 모양이야. 공작이 곁을 주다니.”
“걱정 마십시오. 계속 그를 돕지는 않을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곧 제국을 떠난다고 합니다.”
다비온은 적어도 시엘리나만이라도 황실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황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만 가 보겠다. 마저 정무를 보거라.”
다비온이 사무적으로 예를 차렸다.
황후는 의자에 일어서 황태자궁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났다.
‘에카르트 크로덴.’
어리지만 견제하기 쉽지 않은 남자였다.
원래 충실한 심복 백마법사를 보내 에카르트의 동태를 가까이서 살피려고 했지만, 그는 시엘리나가 있다며 다른 백마법사에게 치료받기를 거부했다.
그랬기에 동태를 살피기 위해 병사들을 파견했으나 전부 전사했다.
‘끄나풀이란 걸 알아차리고 죽였겠지.’
다비온의 말대로 시엘리나가 언젠가 제국을 벗어난다면, 그의 힘에 대해 보고할 첩자를 보낼 생각이었다. 사실 이미 적임자를 알아봐 두었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걸음을 멈추자, 뒤에서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블랑세.”
블랑세는 긴장된 얼굴이었지만 예법에 따라 황후에게 인사했다.
“그대가 에카르트를 지켜보겠나?”
“네. 공작님은 저를 죽이지 못할 겁니다.”
이유는 단 하나. 시엘리나가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마검의 지배자는 그 백마법사의 말을 지킬 것이다.
“시엘리나 공녀와 친한 그대가 이 일을 맡겠다고 했을 땐 놀랐네.”
“제국을 위한 일이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저는 늘 제국에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신전은 갓난아이인 저를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폈고, 성전은 제가 백마법사로 성장하도록 가르쳤죠.”
“그러했군.”
“제국은 제게 부모님과도 같아요. 크로덴 공작님을 보필하고 폐하께 보고드리는 게 제국을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블랑세는 여부가 있겠냐는 듯이 덧붙였다.
***
한편 시엘리나가 별의 꽃을 대체할 마법을 연구하는 사이. 시스 자작령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비록 작위는 높지 않더라도 시스 자작령은 제법 부유했다.
바로 교역로가 있는 덕분이었다.
일명 초록의 길이라고 불리는 교역로는 윈터로드 제국과 다른 여러 왕국을 이었다.
시스 자작은 교역로를 보유했다는 사실에 무척 자부심을 가졌으나, 황실 무도회에 다녀온 후 한동안 기가 죽어 칩거했다.
시엘리나의 살벌한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자작이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드디어 자작령 체리베리 개발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맛있군.”
시스 자작이 긴 꼭지가 달린 검붉은 딸기를 와그작 깨물었다. 체리와 딸기를 교배한 과일로서 당도도 높아 부드러우면서도 상큼했다.
“이 기쁜 소식을 사교계에도 알려야겠어.”
자작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방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넓은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응답하듯이 촛대 위의 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교역로를 따라 수도에 도착한 자작은 살롱에 도착했다. 그는 친구들을 위해 크게 한턱 쏘며 자랑했다.
“그래서- 자작령에 온다면 최고로 맛있는 체리베리를 대접하겠소!”
“어머, 정말 영광이에요!”
한동안 사교계와 담을 쌓고 지냈던 자작은 은근히 시엘리나의 소식이 궁금했다. 체리베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자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시엘리나 공녀가 오레이칼 왕국의 마법 대회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는데요.”
“이전에도 눈에 띄셨지만… 이제는 아예 시선을 사로잡는 분위기가 있달까요.”
그러자 자작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선을 넘었다.
“과연. 그래서 크로덴 공작님이 빠져 지내시나 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로덴 공작이 황족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이상, 칭찬이 아니라면 알아서 말을 아끼는 것이 당연한 상식.
하지만 자작은 체리베리 개발이 성공을 거두며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였다.
이참에 아예 에카르트를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서 그가 자작령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랐다.
에카르트가 방문한 의상실이나 음식점은 금세 귀족들의 예약으로 꽉 차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두려우면서도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오레이칼 왕국에서 머물렀다는 호텔은 비수기임에도 가격이 몇 배나 뛰었으며, 뱃놀이 장소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나.
마침 체리베리를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그가 자작령으로 맛보러 와 준다면! 제국의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리라. 꿈에 잔뜩 부풀은 자작은 폭탄 발언을 했다.
“황실 무도회도 데려오고 오레이칼 왕국도 응원을 다녀오시더니… 공녀님 때문에 마검이 녹슬까 봐 걱정이군요. 뭐 그래도 공작님 실력은 굳건하시겠죠, 하하!”
아니나 다를까 귀족들의 반응은 미묘했으나 자작은 칭찬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음….”
“어….”
귀족들은 이 이야기가 크로덴 공작의 귀에 들어갔다가 혹시라도 자신의 가문에 불똥이 튈까 봐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들이 머물던 살롱은 크로덴 공작가의 소유였다. 차를 대접하던 직원이 헬라에게 고스란히 그 대화를 전했다.
***
에카르트는 내 맞은편 책상에 앉아 여러 서류를 처리했다. 펜을 쥔 손에는 힘줄이 솟았고 글씨체는 유려하며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그가 집중한 모습을 흘긋흘긋 훔쳐봤다.
저런 얼굴로 살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별의 꽃을 정제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서류 다 처리하셨어요?”
“그렇습니다.”
“그럼 말씀하시지.”
“집중하고 계신 것 같아서.”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문득 궁금해졌다.
요즘 왜 그렇게 그를 의식하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어렴풋이 짐작이 되지만 나는 내 감정을 모른 척했다.
“공작님.”
그때 헬라가 들어와 에카르트에게 작게 속삭이며 뭔가를 전했다. 반듯한 눈썹이 올라가더니 에카르트가 우아하게 일어났다.
“시엘리나. 오늘은 출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북부로요?”
“아뇨. 시스 자작령입니다. 시스 자작 놈이 제 검술 실력이 녹슬까 봐 몹시 걱정하는 모양입니다.”
“에카르트가 그럴 리가요! 그 자식은 또 무슨 헛소리를… 어이가 없네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수련을 하고는 제게 마력과 성력을 요구할 정도로 열심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참으로 보람찬 날을 보내고 있지요.”
별로 칭찬은 아니었는데 그는 빙그레 웃으며 뿌듯해했다.
‘그런데 시스 자작이 왜 에카르트를 언급했지?’
북부 마수 출몰이 적어지며 견제하게 된 세력이라고 보기는 시점상 아닌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노이즈 마케팅?’
자작령은 체리베리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고 들었다.
마검의 지배자가 들른 곳들은 유명해지니 호재를 만들어 보기 위해 낚으려는 건가.
자작은 관심이 많이 필요한 타입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찍이 공작 작위에 오른 에카르트 역시 그런 수작을 모르진 않을 터.
“그런 헛소리를 하는 놈은 응징해야죠. 그런데 왜 직접 출전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