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흉악한 그림 따위는 니나가 갖다 버리게 내버려 두고 홀로 남은 나는 생각에 빠졌다.
마법을 사용하기 전에 다른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저주가 나았다는 사실을 숨기려면… 내가 떠난 후에도 에카르트가 백마법 치료를 받는 척해야겠지.’
하지만 그의 주변에 백마법사라곤 나를 제외하면 블랑세뿐.
그러나 지금 블랑세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그런 부탁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마에 손을 짚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서랍에서 꽃잎을 보관한 상자를 꺼냈다.
그때, 하얀 실타래 같은 게 스윽 내 앞에 드리워졌다. 순간 헛것을 보나 싶어 걷어 보려 했지만 그 실타래는 손에 잡혔다.
바로 블랑세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녀가 어느새 소리도 없이 내 뒤에 다가와 있었다.
“으악!”
나는 서랍 문을 쾅 닫고 비명을 질렀다.
“시엘, 이기고 왔구나. 축하해.”
“브, 블랑세….”
겨우 정신 차린 나는 숨을 골랐다. 그녀의 소매 끝에 검댕이 묻어 있었고, 도서관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먼지 냄새가 느껴졌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서랍에 뭐가 있는지 먼저 말해 줘, 시엘.”
싱긋 웃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집요했다.
‘말해 달라고? 자기는 그렇게 비밀이 많으면서.’
남에게 쉽게 마음을 털어놓아 손해를 보던 원작과 달리 말이다. 내가 선뜻 재료를 가린 손을 떼지 않자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시엘. 우리 비밀 하나씩 교환할까?”
“비밀?”
“나는 어디 다녀왔는지 말하고, 너는 그게 뭔지 말하는 거야. 3초 세고 동시에 말하면 돼.”
나는 블랑세에게 어느 정도의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괜찮을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블랑세는 지금도 맨날 나를 염탐하는 데다가 어딘가에 에카르트의 이야기를 발설할 이유는 없겠지.’
“그럴까.”
결국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가 동시에 “하나, 둘, 셋.”을 외쳤다.
“신전.”
“치료 재료…. 신전?”
나는 블랑세의 대답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블랑세 역시 내 이야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은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치료할 재료라니?”
“다른 방법으로 저주를 치료해 보려고 해.”
“그동안 공작님을 백마법 술식으로만 치유했잖아! 혹시 다른 방법을 찾았어?”
나는 동방 의사 한나에게 지압을 전수받았으며, 실험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고 있다고 짧게 했다.
“공작님의 저주를 완전히 치료할 수 있어?”
“그렇지만 성공할지 안 할지는 몰라. 이 재료는 무엇인지는 말해 줄 수도 없고. 미안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됐어.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블랑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의아했으나 그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저게 필요한 건 어떻게 알았어?”
“아, 아직은 가설이야. 아무튼 몇 가지 재료만 더 모아서 저주를 풀어 볼 생각이야. 일단 고대 수호목의 줄기를 구해야 하는데-”
“고대 수호목의 줄기는 신전에 있어. 수습 신관으로 지내 봐서 알아.”
“그래?”
하긴, 신전이라면 그런 물건이 있을 것이다.
루솔릿 공작가도 신전에 꽤 많은 돈을 납부했으니, 연구용으로 하나 달라고 하면 받으려나.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블랑세가 선뜻 말했다.
“내게 맡겨. 고대 수호목의 줄기뿐만 아니라 뿌리와 잎까지 싹 다 갖다 줄게.”
“왜?”
“그야 백마법 때문에 네가 집착당하잖아? 나와 결혼하려면 공작님의 저주를 풀고 깔끔히 헤어져야지.”
“그놈의 결혼….”
“어쨌든 줄기 말고 다른 필요한 건 없어?”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싶어서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블랑세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상의 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음, 네가 신관의 축복을 내려 주면 성공 확률이 더 올라갈지도 몰라.”
“그렇구나. 나도 간단한 축복이라면 할 줄 알아.”
블랑세가 눈을 감고 고대어를 중얼거리자, 손 틈에서 장미 꽃잎이 쏟아졌다. 제멋대로 구는 것만 봤는데 이런 능력이 있었을 줄이야!
“받을래? 생화야.”
그녀가 장난스럽게 꽃 한 송이를 내게 내밀었다.
그때, 쾅쾅 문이 부서질 듯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가 내민 장미를 받으려다 흠칫 놀라 손을 떼었다. 그 순간 곧바로 에카르트가 난입하더니 마검을 소환했다.
그가 나를 위해 만들었을 디저트는 이미 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감히 내 공작성에서 공녀에게 프로포즈를 하다니!”
눈 깜빡할 사이 장미 꽃송이가 발밑에 툭 떨어졌다.
“너같이 음침한 여자를 내버려 뒀다니 판단 실수였군. 당장 꺼져.”
“변함없이 성격이 급하고 더럽군요.”
블랑세가 장미를 쥐고 내민 모습이 오해의 소지를 산 모양이다.
서브 남주와 여주는 다시 용과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는 블랑세의 손에서 줄기만 남은 장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블랑세는 당신의 치료를 도와줄 거라고요!”
“그렇습니까? 제 생각엔 저 여자가 사라지는 게 도와주는 일 같습니다만.”
“그런 못된 말 하지 마요.”
에카르트의 등짝을 때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래 봤자 그는 새로운 치료라고 착각해서 오히려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그는 한참 후에야 못미더운 눈빛으로 마검을 검집에 넣었다.
***
나는 둘을 진정시킨 후 계획을 설명했다.
“수호목의 줄기를 얻어 성공적으로 조합한다면, 능력을 확장시키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나머지 재료는 헬라 님께 부탁할게요.”
“그래! 그럼 나는 신전에 다녀올게.”
“알겠습니다. 재료 목록은 헬라에게 그대로 전하죠.”
블랑세와 에카르트는 순순히 말했다.
그 후 블랑세가 이대로 떠나나 싶었는데, 그녀는 내 손목을 대뜸 잡고 말했다.
“시엘. 잠시 둘이 얘기하자.”
“…음, 에카르트. 나가 주시겠어요?”
이전에 블랑세를 빼고 에카르트와 단둘이 얘기한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에카르트를 내보내야 공평하겠지. 그는 내 요구에 따라 주면서도 신신당부했다.
“저 여자가 당신의 몸에 손대면 바로 저를 부르십시오.”
“블랑세를 치한 취급하지 말아요.”
블랑세 역시 대놓고 못마땅해하다가 그가 나가자 진지한 눈빛이 되었다.
“시엘. 혹시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았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어?”
“아직.”
그러자 블랑세는 안도하며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럼 당분간 비밀로 하는 게 어때?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 될 테니까.”
“모두를 위한 일?”
“그래. 여전히 저주가 약점인 것처럼 보이는 게 좋겠어.”
블랑세의 눈빛은 마치 목적지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강해 보였다.
“마을 상단에서 들었어. 대체 크로덴 공작가가 얼마나 부유하기에, 제국 내에 대부분의 상권이 그의 소유냐고.”
견제하는 게 황실뿐이 아닌가. 제국 실세의 삶도 참으로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에카르트가 강하기는 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내 생각도 같아.”
“좋아. 그리고, 시엘. 이건 네게 좋은 소식인데.”
그녀는 잠시 방 안을 몇 걸음 걷다가 마음을 굳힌 듯 말했다.
“공작님의 저주가 완전히 낫는다면 시엘이 떠나도 잡지 않을게. 적어도 나는 말이야.”
“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있는 어느 곳이든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그녀가 나를 놓아준다고? 그것만으로도 어안이 벙벙했는데, 블랑세가 덧붙인 말은 더더욱 놀라웠다.
“네가 떠날 경우… 대외적으로는 그의 전담 백마법사가 필요할 거야. 그의 몸에 대한 비밀은 다른 백마법사는 모르겠지. 그 역할은 내게 맡겨 줘.”
재료를 가져오는 것도 모자라 나를 놓아주고, 아직 세우지 않은 계획에까지 동참하다니!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그럼 좋긴 한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이제 시엘은 원하는 삶을 살면 좋겠어. 우리 둘에게 집착당하느라 고생했잖아.”
역지사지 작전이 뒤늦게 효과가 있는지 헷갈렸다. 하지만 블랑세의 말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확인할 기회기도 하고 말이야.”
“네 마음?”
“그래. 시엘을 보내 주고도 내가 잘살 수 있는지.”
“…….”
잘살 수 없다면 다시 집착당하는 것인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내가 여전히 떨떠름해하자 그녀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대신 부탁이 있어.”
“말해 봐.”
“혹시, 팔찌 같은 거 있으면 작별 선물로 줘. 쓰던 것도 좋아. 네 흔적이 남았으니까….”
블랑세가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붉혔다.
“무조건 새것으로 줄게. 원하는 모양 있어?”
“글쎄. 시엘이 주는 거면 다 좋은데. 그래도 줄이 얇고 한 줄로 되어 있는 거로.”
굳이 작별 선물이 아니라도 블랑세가 원하면 팔찌 정도는 언제든 줄 수 있었다.
‘나를 놓아주고 계획에도 동참하니 좋기는 한데.’
나는 조심스레 한 가지 추측했다.
추측이 맞다면 원작의 여주와 완전히 다른 성격, 잘생겼지만 미친 서브 남주는 거들떠보지 않는 안목, 게다가 은근히 그의 저주를 신경 쓰는 것!
전에 도망치고 싶다고 흘리듯 한 말까지 전부 설명이 된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봤다.
“…블랑세. 너 혹시 빙의했어?”
“빙의? 뭐에 씌였냐고?”
순진무구한 눈빛을 보니 완전히 잘못 짚은 걸 깨닫고 머쓱해졌다.
“막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몸을 갖는다거나.”
“글쎄. 그런 힘도 있던가.”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
블랑세가 신전에 재료를 가지러 간 후.
에카르트는 혹시라도 그녀가 돌아올세라 연구실에서 나를 감시했다. 물론 디저트는 다시 만들어 와서 말이다.
“블랑세가 당신에게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그런데요.”
그는 그게 몹시 만족스러운지 씨익 웃었다.
“시엘리나는 제 몸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까. 그 반대도 어느 정도는 성립하겠지요. 제가 당신을 만나지 못했으면 어떡했을까요?”
에카르트가 내 손을 들고 제 뺨에 가져가서 비볐다. 그는 달콤한 케이크를 먹는 것처럼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