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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38화 (38/115)

#38화

“…헉.”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 그가 순식간에 내 허리를 잡아들고 물건처럼 다시 맞은편에 앉혀 두었다. 그는 안도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이었지만 뭔가 닿아서는 안 될 게 스쳐 지나간 듯한데.

“괜찮습니까?”

“네? 네에. 네! 괜찮죠? 아마?”

여러모로 충격을 받은 나는 말을 더듬었다. 그저 멋진 풍경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내가 새로운 세계를 볼 뻔한….

그때 아련한 헬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공녀님. 두 분을 위험에 처하게 한 죄는 마땅히 치르겠습니다.”

헬라가 재킷을 벗어 가지런히 내려놓더니 신발을 벗을 준비를 했다. 나는 그녀가 입수하기 전에 손을 휘휘 저으며 서둘러 말렸다.

“괜찮아요! 배가 부딪친 건 헬라 탓만이 아니에요. 공작님과 제 존재감을 옅게 하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랬을 수도요.”

“아닙니다. 충분히 거리를 두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세상에. 에카르트, 어서 괜찮다고 해 주세요.”

“당신이 용서하신다면요.”

에카르트는 의외로 관대하게 넘어갔다. 그러자 헬라는 내가 생명의 은인인 것처럼 감격하며 냉큼 재킷을 입었다.

“공녀님,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별일 아니라니까요, 헬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지어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는 것 같았다.

겨우 상황이 정리되니 내가 무릎에 앉았을 때의 촉감이 다시 떠오를락 말락 했다.

어차피 소원도 나뭇잎에 띄워 보내고, 나비도 수백 마리는 봤으니 슬슬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이제 돌아갈까요? 내일 아침에 출발해야 하니까요.”

“그러지요. 아주 만족스러운 뱃놀이였습니다.”

“그, 그래요.”

나는 결국 에카르트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묻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내용을 쓰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펜을 쥐었을 때 눈빛이 다정해 보였으니까.

***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오레이칼 왕국 국경까지 마차로 왔다.

국경에는 약속대로 다비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 너머로 그와 대화를 잠깐 나눴다.

“축하드립니다, 공녀. 우승이라니 정말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동 마법 덕분에 체력을 아낄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훈훈하게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제게도 공녀처럼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

“어서 마법이나 발동해.”

에카르트가 다비온의 말을 끊고 냉정하게 말했다.

마검의 지배자의 기에 눌린 다비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법진을 그렸다. 이동 마법사로 전락한 황태자를 안타깝게 바라보자 곁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엘리나. 창문은 닫겠습니다. 바람이 차군요.”

별로 안 추운데 에카르트는 창문을 닫는 거로 모자라, 바깥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까지 쳤다.

마차 안이 어둑어둑한 채 공작성에 도착할 때쯤 그가 창문을 다시 열어 줬다. 그러고는 마차에서 내린 후에도 자석처럼 달라붙어 나를 에스코트했다.

그러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헬라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헬라.”

“네. 준비되었습니다.”

‘뭐가 준비돼?’

무슨 일인가 싶어 에카르트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곧 육중한 문이 열리자….

내 앞에 색색의 꽃잎이 잔뜩 쏟아졌다. 하녀들이 바구니에 든 꽃을 내게 던지고 있었다.

“공녀님!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예요.”

“닷 세 정도…밖에 안 됐는데요.”

“흑흑, 그렇게 오래됐다뇨!”

꽃을 다 던진 하녀들은 옹기종기 내 주변에 모여들었다.

“저는 꼭 다음 생에 공녀님의 지팡이로 태어날 거예요.”

“우리 공녀님 너무 멋져요. 흑, 다음엔 니나 대신 꼭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이들이 호들갑 떠는 건 한두 번 일도 아니었지만, 오늘은 더 유난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알록달록한 현수막이 공작성을 장식하고 있었다.

“에카르트. 대체 이게 다 뭔가요?”

“미리 축하 파티를 준비하라고 명했습니다.”

그가 마음에 드냐는 듯이 말했다. 떨떠름하던 그때, 하녀 한 명이 꽃다발을 수줍게 건넸다.

“공녀님, 여기 받으-”

“받으십시오. 당신이 좋아하는 꽃으로 골랐습니다.”

에카르트는 하녀가 주려던 꽃다발을 가로채 내게 내밀었다.

내가 지나가듯이 “예쁘다.”라고 말한 파란 미니 델피움을, 하얀 안개꽃과 스타티스로 장식한 꽃다발.

“미리 준비한 거예요?”

“그렇습니다.”

“제가 졌으면 어떡하려고….”

“이길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가끔 에카르트는 나보다 나를 더 믿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치료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니 말이다.

그저 원석을 얻기 위해 대회에 출전했을 뿐인데.

언제부턴가 물질적인 것 외에도 그가 내게 해 주는 일이, 내가 그에게 해 주는 것보다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될까?’

함께한 어떤 시간들이 즐겁고 고마웠다.

에카르트는 원작처럼 늘 블랑세를 몰아세우던 흑막이 아니라,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럴 때마다 종종 도망치겠다는 결심이 흔들렸다. 좋고도 혼란스러운 이 마음은 대체 뭘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 아뇨. 고마워요. 이런 파티가 처음이라 좀 낯설어서.”

잠시 생각을 접어 두고 나는 꽃다발을 받아 들고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좋으셨다면, 축하할 일 없이도 매일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곁에 있어 주세요.”

그의 눈빛은 따뜻했지만 한편으론 위협적이기도 했다. 전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분위기가 공존하니 묘했다.

순간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어쩌면 나는 그의 저주를 해결하고 자유롭게 떠날 몸.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야 없었다.

“향기가 좋네요. 아름답고 부드럽습니다.”

어쩐지 꽃에게 하는 말치고는 이상했다.

그가 뱀이 먹이를 감싸고 서서히 압박시키듯, 꽃다발을 쥔 내 손 위에 손깍지를 끼웠다. 이상한 압박감이 들었다.

꽃다발을 사이에 둔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

꽃다발은 연구실 창가 화병에 꽂아 두었다.

귀빈실에 두려다가 당분간 연구실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서 이 자리로 정했다.

만능 집사 헬라가 지팡이에서 오레이칼 원석을 분리하는 중이었고, 에카르트는 맞은편 책상에서 서류를 성의 없이 넘겨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왠지 블랑세가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다시 뒤돌아보자 맞은편 책상에서 서류를 처리하던 에카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애써 그 눈빛을 상관하려 하지 않으며 자리에 앉으려던 그때 헬라가 나를 불렀다.

“공녀님. 원석 분리를 마쳤습니다.”

“고마워요, 헬라.”

오레이칼 원석은 재료로 쓸 수 있을 만큼 지팡이로부터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감탄하기 전에 에카르트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럼 곧 제 능력을 확장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요.”

“그렇군요. 오늘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남은 재료가 하나 있기는 한데… 일단 지금은 달달한 게 먹고 싶어요.”

호텔에서 그에게 대접받은 요리를 떠올리자 입에 침이 고였다.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디저트를 만들어 오죠.”

“에카르트가요?”

“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순간 마검의 지배자를 내 요리사처럼 부려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도 그를 위해 마법 대회까지 다녀왔으니 뭐 괜찮겠지.

에카르트는 헬라가 나와 단둘이 있는 게 싫었는지 제가 나갈 때 같이 데리고 나갔다.

그래 봤자 그들이 나간 후 니나가 연구실 청소를 하러 들어왔지만 말이다.

***

디저트가 잘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레이칼 왕국에서 돌아온 크로덴 공작께는 당장 급히 진행할 일이 있었다.

“이봐.”

“네, 주인님.”

헬라는 에카르트가 이번에는 또 무슨 명령을 내릴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답했다.

“네 그림. 어떻게 그렸기에 시엘리나의 마음에 들었지?”

“잘 그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모없는 대답이로군. 나도 한번 그려 보지.”

헬라는 하녀에게 도화지, 연필과 채색 도구를 받아 왔다.

에카르트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연필을 쥐고 밑그림을 그렸다.

헬라는 그 단계부터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에카르트는 남의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감 넘치게 그림을 완성했다.

“어떤가?”

“…공녀님을 그리신 겁니까?”

“그렇다.”

에카르트의 작품은 마녀의 화형 장면을 연상케 했다.

불꽃인 줄 알았던 것은 머리카락이었고 신전 기둥인 줄 알았던 것은 지팡이였다. 큰 눈과 오똑한 코와 앵두 같은 입술 표현은 미취학 아동의 실력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

‘선대 공작님. 그림은 전혀 가르쳐 주지 않으셨군요!’

헬라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참으로 잘 그리셨습니다.”

“알고 있다. 좀 더 연습해서 공녀께 보여 줘야겠군.”

주인은 만족스럽게 팔짱을 끼고는 지그시 그림을 감상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헬라처럼 칭찬받을 생각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둘이 다시 디저트를 확인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창문 너머로 바람이 불었다.

마주한 창문 밖으로 종이가 날아갔고 하필 그건 연구실 창문으로 들어왔다. 연구실을 청소하다 종이를 발견한 니나가 조심스럽게 그림을 주워 들고는 화들짝 놀라 뒤로 감추려 했다.

“뭐예요?”

“아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라고 말하긴 어려운 그림이었지만 붉은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로 미루어 보아 시엘리나 같았다.

니나가 숨기려 했으나 시엘리나는 이미 그림을 보고 상처받았다.

“누군가 제게 악감정이 있는 걸까요? 제가 가는 길에 일부러 이런 흉물을 놓아두다니.”

만약 에카르트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간 범인을 찾기 위해 저택이 발칵 뒤집어엎질 게 뻔했다.

“니나는 절대 아니죠?”

“히엑, 그럼요! 제가 공녀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괜찮아요. 뭐, 성전에도 비슷한 적이 있어서. 저랑 가까운 사람만 아니면 돼요.”

“누가 공녀님께 그런 못된 짓을! 뭐하는 사람이든 제가 다 때려잡을게요.”

니나가 허공에 몇 번 주먹질을 했다. 시엘리나는 속상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것도 아닌데.”

한편 에카르트가 다시 디저트를 확인하러 돌아갈 때.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것도 아닌데.”

연구실을 지나며 그 말만을 명확하게 들었다. 에카르트는 무인도 감금 계획을 더 구체화시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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