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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37화 (37/115)

#37화

“아니. 호수에 웬 함선이에요!”

서브 남주의 재력이란. 그의 행색을 훑자, 뒤늦게 에카르트의 소매 끝이 붉은 얼룩으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저도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에카르트가 팔을 뒤로 숨기고 싱긋 웃었다. 나는 어떤 불길함을 느끼고 니나에게 물어봤다.

“…뭐가 묻어 있던데. 와인일까요?”

“그, 그럼요! 공작님이 옷을 갈아입으시는 동안 제가 얼른 세탁할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공녀님.”

니나가 잠시 나간 사이 나는 겉옷으로 걸칠 옷을 찾아보았다.

밤이라 조금 쌀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말끔한 셔츠로 갈아입은 에카르트가 돌아왔다. 근육이 탄탄해서 그런지 어떤 옷을 입든 태가 났다.

나는 그의 몸을 흘긋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았다.

“에카르트. 저, 둘 중에 뭐가 더 어울리는지 봐줄래요?”

“그럼요. 영광입니다.”

나는 일단 팔을 쭉 뻗어 하얀 카디건을 걸쳤다. 그때 주머니에서 어떤 병이 떨어지더니, 그의 검은색 구두 발치까지 굴러갔다.

“앗.”

호텔에 들어온 첫날 급하게 숨겼던 피임약이었다.

에카르트가 허리를 숙여 피임약을 주워 들었다.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지만 동공이 흔들린 걸 보니, 안타깝게도 무엇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호텔에 처음 왔을 때 서랍에 있었거든요.”

나는 황급하게 해명을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놓을 데가 없어서 주머니에 잠깐 넣어 뒀는데 빼놓는 걸 깜빡했네요. 하하. 요즘 호텔은 이런 용품, 용품? 아무튼 별걸 다 제공하네요!”

횡설수설 둘러대다가 문득 현타가 찾아왔다.

에카르트 역시 병을 건네주려다가 어정쩡한 손짓 그대로 멈춰 있었다.

“얼른 저기 버려 버려요.”

“…알겠습니다.”

그는 병을 만지작거리다가 쓰레기통에 가차 없이 집어넣었다.

***

뱃놀이를 할 호수는 마차로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호숫가 근처에서 과일꼬치나 음식을 팔고 있었다. 내가 그쪽을 흘긋 바라보자마자 에카르트는 헬라에게 금화를 건넸다.

“사 와.”

“몇 개 사 올까요?”

“몇 개 드실 겁니까?”

당연하게도 나를 향한 물음이었다.

“음. 하나씩 먹어요. 네 개?”

충직한 헬라는 윤이 나는 과일꼬치 네 개를 사 왔다. 그리고 먼저 에카르트와 내게 건네고 니나와 나눠 먹었다. 신난 니나의 눈의 반짝임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저 배입니다.”

에카르트가 꼬치를 먹고는 호수 한쪽을 가리켰다.

두 명이 앉을 정도로 작은 나룻배가 호숫가에 두 척이 떠 있었고, 그 주변은 빛나는 별무리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누가 봐도 근처에서 대여한 게 아니라 완전히 새것처럼 보였다.

“당신과 제가, 헬라와 니나가 함께 타면 됩니다. 둘 중 마음에 드는 거로 고르시지요.”

“저거요.”

파란색 꽃으로 장식한 나룻배를 가리키자 에카르트는 먼저 배에 올라 내가 안전하게 타도록 손을 잡아 줬다.

헬라와 니나는 같이 남은 다른 나룻배에 탔다.

“그런데…. 근처에 사람이 우리밖에 없네요. 축제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적지?”

그러자 에카르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오레이칼 왕국 변두리의 레스토랑 안. 손님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엘리나 님은 원래 백마법사라는군. 성력으로 제국의 최강자까지 진료했다던데!”

“마력뿐만 아니라 성력까지 뛰어났다니! 본성이 선해서 다른 참가자까지 도왔나 보군. 너무 감동이야.”

오레이칼 왕국 곳곳에 시엘리나의 소문이 퍼졌다.

매년 개최하는 마법 대회였으나 올해는 더 화제가 되었다. 아주 간단하게 경쟁자를 제압한 실력. 어린 참가자를 성력으로 치료해 준 인품. 화려한 외모까지 갖춘 시엘리나 덕분이었다.

칭송을 넘어서 이참에 그녀의 추종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매번 자취를 감추시더군.”

“루솔릿 가문으로 찾아가면 뵐 수 있으려나?”

리타는 구석의 테이블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와인을 몇 잔째 마셨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은 더 선명해졌다.

‘어떻게 그동안 더 발전했지?’

해충 주제에 얼마나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었단 말인가! 리타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라멜은 침울하게 접시 위의 음식을 깨작거렸다.

그녀 역시 사람들의 대화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당연히 리타의 이야기도 나오게 되었다.

“결승에 진출한 그 빨간 머리 남동생 말이야. 루솔릿 공작이 전부 공녀에게만 재능을 물려준 거 아닌가 몰라.”

“큭큭, 그럴지도. 지팡이 한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완전히 처발렸잖아!”

“나라면 쪽팔려서 참가하지도 않았어.”

“…….”

조용히 분을 삭이던 라멜은 참가자들이 모인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랑하는 동생이 모욕받는 걸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신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뭐야, 이 여자는? 잠깐, 빨간 머리잖아. 혹시 루솔릿 가문인가.”

“그럼 시엘리나 님은 어디 계시는지 아시오?”

“몰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라멜이 성질을 내자 사람들은 수군대며 자리를 옮겼다. 다른 손님들을 내쫓고 자리로 돌아온 라멜은 씩씩거렸다.

“리타. 시엘리나가 부정한 방법으로 우승했다고 하자. 예전에도 공작성에서 그 비슷한 방법을 써서 내쫓은 적 있잖아!”

“…그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리타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 시엘리나는 에카르트와 동행했다. 예전 공작가에서 제대로 된 지원군도 없던 그녀가 아니었다.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데다가 황실까지 눈치를 보는 크로덴 공작가.

그곳의 가주가 시엘리나에게 집착한다. 만일 시엘리나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면 제 일처럼 곧바로 나서겠지.

그때, 루솔릿 공작이 새로운 음식을 갖고 돌아왔다. 둘은 이전에 벌인 자작극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공작은 대회 결과에 상심했다. 그래도 일단은 리셀의 아들이고 공작가의 후계자인 리타를 위로했다. 비록 리셀은 대회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년이 너를 그렇게 쉽게 이길 리 없어. 지팡이에 어딘가 문제가 있겠지!”

“맞아요, 아빠. 리타가 착해서 넘어가는 거죠.”

“…….”

아니, 문제는 제 실력이었다. 마법 아카데미에서도 저를 따라올 자는 없었건만. 대체 시엘리나의 실력은 어느 경지고, 어떻게 그 힘을 가졌단 말인가?

‘신관이었던 어미에게 물려받은 힘일까.’

“죄송합니다, 아버지. 공작가의 명예를 드높이고 싶었는데.”

“리타, 괜찮아. 오늘 고생 많았어.”

라멜이 리타를 꼭 안으며 위로했지만 그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 능력은 해충에게 과분하지. 장차 루솔릿 공작이 될 내게나 어울리는 힘이야.’

시엘리나에게 다시 주제를 알려 주겠다고, 리타는 다짐했다.

***

나는 배에 오르고 나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자고로 뱃놀이란 평소에 마음에 안 들던 상대를 빠뜨리는 좋은 핑계가 아닌가. 원작의 시엘리나가 블랑세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그래서 신중히 주변을 둘러보고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었다.

“뱃멀미하십니까?”

어두워서 안색이 잘 안 보일 텐데, 에카르트는 내가 경계하는 상황을 눈치챘다.

“아뇨.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 물에 빠지면 안 되니까.”

그러자 그는 노를 젓다가 멈칫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은 절대 안 빠뜨립니다.”

“…네?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요.”

이렇게 좋은 날에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허허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

“어쨌든! 와서 좋네요.”

“저도 좋습니다.”

그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때 신비로운 빛을 내는 나비 떼가 날아들며 호수를 밝혔다. 나비 몇 마리가 나룻배의 꽃에 앉았다.

불빛에 비친 에카르트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잠시라도 어떤 걱정 없이 고요함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서 좋았다.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따뜻해 보여.’

처음엔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 시선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뭍에서 충분히 멀어진 후 우리는 나뭇잎 위에 소원을 적기로 했다.

헬라가 나룻배에 미리 펜과 나뭇잎을 준비해 뒀다. 나는 웅크리고 글씨를 쓰니 어깨가 뻐근해 팔을 가볍게 돌렸다.

“마사지라도 해 드릴까요?”

“네-에? 무슨.”

누가 들으면 오해를 살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옆을 보니 나룻배에 탄 니나가 이미 히죽 웃고 있었다.

“…헬라와 니나는 무슨 소원 적었어요?”

둘은 순순히 나뭇잎을 보여 줬다.

- 공작성에서 정년까지 무사히 일할 수 있기를.

- 공녀님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겠어요!

한 장은 힘 있고 또박또박하게, 한 장은 하트와 별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니나가 여기까지 와서 대체 왜 저런 소원을 빌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니나를 외면하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에카르트는요?”

“이루고 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내밀고 슬쩍 엿보려고 하자 에카르트는 글씨가 보이지 않게 나뭇잎을 뒤집었다. 문득 그의 입버릇이 생각났다. 틈만 나면 블랑세를 죽인다더니 그런 말을 일삼았지.

“혹시 블랑세에 관한 건 아니겠죠?”

그러자 그는 호수를 얼릴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설마 당신은 그 작자에 대해 적었습니까?”

“아뇨.”

나는 순순히 소원을 적은 나뭇잎을 보여 줬다.

- 들숨에 건강, 날숨에 재력.

“…꼭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

“에카르트가 쓴 것도 어서 보여 줘요.”

그러자 그가 나뭇잎을 아예 숨겼고 나는 손을 뻗어 달라고 졸랐다.

그때 나룻배 옆쪽에서 가볍게 쿵 소리가 들렸다. 헬라와 니나의 나룻배가 밀려와 부딪친 것이다. 순간 내 몸은 균형을 잃고 휘청했다.

에카르트의 눈이 커지더니 재빨리 나를 붙잡아 앉혔다. 다만, 의자의 촉감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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