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시엘리나 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와아!”
귀가 멀 것 같은 뜨거운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리타의 은색 눈동자는 경악에서 분노로 물들었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망토를 털고 일어나 내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공기를 조종한 겁니까?”
“그래.”
“미쳤군, 당신은. 정말 놀라워!”
그의 눈동자는 마치 누구도 찾지 못한 귀한 물건을 발견한 것처럼 번득였고 입꼬리는 경련했다. 순간 터져 나온 광기에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했다.
“…….”
“어차피 지팡이에 흥미는 없었습니다.”
그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먼저 퇴장했다. 곧바로 해설자가 내게 다가와 지팡이를 주고 축하를 건넸다.
“우승자는 시엘리나 루솔릿!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수상 소감을 들어 볼까요?”
“감사합니다. 지팡이는… 잘 사용하겠습니다.”
나는 짧게 소감을 마무리했다. 박수와 함성이 점점 더 커져 갔고 모두가 내 이름을 외쳤다.
“시엘리나 루솔릿!”
“시엘리나 루솔릿!”
오레이칼 원석을 얻는 목적을 달성한 나는 재빨리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차분한 척했지만 소매 아래로 손은 떨렸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
에카르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그의 열망은 점점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얼굴, 손가락과 옷자락, 힘차고도 부드러운 선.
마법을 사용할 땐 집중하다가도 그 틈 사이로 보이는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남에게 보여 주기엔 너무 황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멀리서도 정말 눈에 띄어. 여태껏 저런 마법사를 알지 못했다니!”
“남동생보다 더 잘하는데. 당연히 가주 작위도 받겠지?”
그는 다른 관중들의 눈을 전부 멀게 하고 입을 닥치게 하고 싶었다. 시엘리나의 마법은, 아니 그녀는 자신만 보아야 했다.
커다란 새장이 있다면 가두고 싶었다. 자신만 알고 싶던 소중한 사람을 이제는 많은 이가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찾을 수 없게 새장에 검은 천을 씌우고 싶어졌다.
“당신의 세계가 더 넓어지면 좋겠어요.”
시엘리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에카르트는 그녀의 세상을 좁히고 싶었다. 비틀어진 상상을 하는 동안 그의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갔다.
다른 관객들과 함께 퇴장하던 그때. 곁을 지나가던 귀족 몇몇이 시엘리나를 두고 낄낄거렸다.
“저런 마법사는 얼마면 고용하지?”
“신부로 맞으면 무료지.”
“하하! 루솔릿 가문에 대한 소문을 좀 들었는데, 공작이 일찍이 재혼한 모양이더군. 공녀가 뭐하러 성전으로 갔겠어? 틀림없이 눈칫밥 좀 먹었나 봐.”
“괜히 가주가 동생으로 정해진 게 아닌가 보군. 십중팔구 애정결핍이 있을 테니, 칭찬하고 좀 잘해 주면 넘어올….”
그러다가 그들은 에카르트의 기운에 오한을 느끼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해 최대한 멀어졌다.
마검의 지배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그들을 처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급적 시엘리나가 모르게 처리해야 했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시엘리나의 모습을 담은 눈을 뽑아야 했고 불경한 말을 지껄인 혀를 잘라서 말이다.
“헬라.”
“네, 공작님.”
묵묵히 앞의 길을 터 주던 헬라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답했다.
“기사단을 시켜 저들이 머무는 곳을 알아내. 왕국을 떠나기 전에 정리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마검의 지배자의 표적이 된 이상 저들은 살아 있어도 죽느니만 못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물론 에카르트는 언제 잔혹한 말을 했냐는 듯이, 시엘리나를 데리러 갈 땐 무해한 강아지 같아졌다.
그는 시엘리나를 만나자마자 변장용 로브를 씌웠다.
“정말 대단합니다. 이참에 공녀께서 세계를 제패하는 게 어떻습니까?”
찬사라고 하기엔 어딘가 무서운 말을 늘어놓으며 말이다.
그러고는 길 잃은 아이를 인도하듯 시엘리나의 손을 꼭 쥐고 마차로 직행했다. 시엘리나를 감금시키듯 마차에 태우고서야 그는 안심했다.
“영상석으로 멋진 모습을 담아 두지 못해 아쉽지만 대신 헬라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을요?”
대회 규정상 심사위원 외에 영상석을 소지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카르트는 영상석을 가져와 시엘리나의 모든 모습을 담고 싶었으나 그녀의 격한 만류로 어쩔 수 없이 차선을 택했다.
“공녀님의 멋진 모습을 다 담기에는 실력이 부족했습니다.”
헬라는 품에서 그림 몇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너무나 근사한 실력이었기에 시엘리나는 깜짝 놀랐다.
“겸손하시긴요! 정말 대단해요, 헬라. 재능이 많네요.”
“그저 취미로 하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화가였지요.”
“우와. 성함이-”
시엘리나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에카르트의 눈썹이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저 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자 심기가 거슬린 탓이었다. 그는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다짜고짜 헬라를 내쫓았다.
“마차가 좁군. 그림은 내가 보관하지. 가서 마부석에 앉아.”
“네, 공작님.”
헬라는 항의하는 대신 순순히 문을 열고 나갔다. 마차 안은 시엘리나와 에카르트, 니나만이 남았다. 이 사람이 또 왜 저러나 싶어 시엘리나가 분명히 말했다.
“안 좁은데요.”
“좁습니다.”
시엘리나는 한숨을 쉬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지금은 어쨌든 별의 꽃을 대체할 재료를 얻었으니까.
“이것이 오레이칼 원석이에요.”
그녀는 지팡이를 보여 주며 끝에 달린 반투명한 보석을 가리켰다. 영롱한 금색 눈이 더 보석 같다고 생각하는 에카르트였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공작성으로 돌아가면 됩니까?”
“네? 오늘요?”
시엘리나가 당황한 티를 역력히 내자 에카르트는 아차 싶어 변명했다.
“공작성을 오래 비워서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시엘리나가 승리하고 원하던 재료를 얻어 기뻤지만,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노골적인 관심은 불쾌했다.
누군가 그녀를 가로챌까 봐 불안했다. 어서 공작성으로 돌아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아, 그렇군요. 하긴 바쁘신 분이니까.”
그러나 제 거짓말 때문에 풀 죽은 시엘리나를 보니 그 또한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지금은 로브 때문에 어려진 모습이다 보니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에카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레이칼 왕국에 더 머물고 싶습니까?”
“네. 오늘 뱃놀이가 있다고 들었어요.”
나룻배에 타서 나뭇잎에 소원을 적고 호수에 띄워 보내는 행사인데, 이맘때쯤 반짝이는 별무리 나비를 볼 수 있다나. 그렇게 말하며 시엘리나는 니나를 흘금 바라보았다.
사실 어제, 뱃놀이는 니나가 시엘리나의 목욕 시중을 들며 슬쩍 운을 띄운 것이다.
“공녀님. 아까 장을 보면서 들었는데 내일 뱃놀이 행사가 있다던데요.”
“아. 가고 싶어요?”
“네! 사실, 그런 축제에 가 본 적이 없어서요. 뱃놀이에서 빌고 싶은 소원도 있고요.”
시엘리나는 그녀가 이 먼 왕국까지 따라와 열심히 시중을 들어줘 고마웠고, 에카르트 밑에서 고생하는 게 짠했다. 그랬기에 그런 부탁쯤은 들어줄 수 있었다.
니나는 혹시나 제가 부탁한 게 들켜서 헬라처럼 마부석으로 내쫓길까 봐 눈을 깔았다.
“흐음.”
에카르트는 정확한 사정을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사실 시엘리나와 함께하는 일이면 다 좋았다.
더욱이 단둘이서만 있을 생각을 하니 더 흐뭇했다. 행사라면 인간이 많겠지만 미리 호수에 빠뜨려서 적당히 정리해 두면 그만이겠지.
“좋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당연히 당신 뜻대로 해야지요.”
그러자 시엘리나가 방긋 웃었다. 에카르트는 어려진 그녀가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가 아이를 보고 미소 지은 적은 처음이었다.
***
호텔로 돌아온 시엘리나가 잠시 쉬는 동안.
에카르트는 헬라와 함께 관객석에서 눈여겨 둔 잔챙이 귀족을 처리하러 가기로 했다. 기사단이 이미 뒤를 밟아 그들의 거처를 알아봐 두었다.
마검의 지배자는 그들이 머무는 여관에 도착해 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힉, 누구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 것이냐!”
잔챙이 귀족들은 뜻밖의 방문에 당황했다.
에카르트는 함부로 시엘리나를 담은 눈동자와, 그녀의 이름을 거론한 목소리를 단숨에 앗아 갔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비굴하게 무릎을 꿇었다. 바로 보어였다. 이 잔챙이들은 그의 일행이었다.
“공녀는 자비로우시지.”
“서, 설마.”
“하지만 난 아니라서.”
보어는 이 암살자가 시엘리나와 관련된 사람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이 쓰레기가 입을 놀릴 틈도 주지 않았다.
보어가 마지막으로 본 건 검은 칼날이었다.
시엘리나를 두고 함부로 말했던 사람을 전부 처리한 에카르트는 마검을 다시 사라지게 했다.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오는 학살자의 표정은 담담했다.
“나머지는 기사단에게 처리를 맡기지.”
“알겠습니다.”
“나도 이 정도면 많이 자비로워졌군.”
“…저 역시 주군의 생각과 같습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시엘리나가 아니었다면 에카르트는 이들의 가족까지 벌했을 테니까. 자신의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이는 절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라도.
마검의 지배자는 사람을 죽인 데에 별다른 감상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시엘리나와 함께 뱃놀이를 갈 생각뿐이었다.
***
니나는 내게 옅은 화장을 해 주고, 머리를 예쁘게 땋아 줬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예쁜 스타일이었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다 이렇게 솜씨가 좋은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공녀님! 어떠신가요?”
“와, 정말 마음에 들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보며 옆모습도 확인했다.
“공녀님이 아름다워서 무슨 스타일이든 다 소화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어려지는 로브를 쓰실 건가요?”
“음. 아뇨. 어차피 밤이니 얼굴은 잘 안 보일 테고.”
나는 에카르트의 변장용 로브에 걸린 마법을 응용해, 존재감을 다소 옅게 하는 일시적인 술식을 개발했다.
로브를 쓰지 않더라도 오늘 나를 만나는 사람은 내 인상이 다소 흐릿해질 것이다.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안 통하는 주술이지만, 나보다 강한 사람이라곤….
“아름답군요, 시엘리나.”
에카르트뿐이니까. 열려 있던 문가에서 어느새 그가 나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갔다 오셨나요?”
“…네. 뱃놀이를 즐길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나룻배도 새로 구매하고 장소도 미리 알아봤지요.”
“샀다고요? 대여하는 장소가 있을 텐데.”
“남이 타던 배에 당신을 앉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함선을 끌고 오려고 했는데, 당장 가져오기엔 무리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