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서인지, 그가 속삭이듯 말해서인지 목적어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공녀의 마법요. 그 힘의 파장과 생명력을 느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 제 마법이라.”
포크에 이미 파스타를 충분히 둘렀는데도 나는 포크를 계속 돌리기만 했다. 뭐랄까, 조금 묘했다. 내가 바라던 대답은 뭐였기에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당신을 알게 되어 정말 행운입니다.”
촛대의 촛불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마음을 남긴 채 오레이칼 왕국에서의 밤이 접어들었다.
***
다음 날, 준결승과 결승을 치르기 위해 네 명의 참가자가 경기장에 모였다. 관객석은 어제 탈락한 마법사까지 자리를 채워 더욱 북적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적색과 금색의 옷이나 장신구를 착용하거나, 부채를 들고 있었다.
“시엘리나 루솔릿!”
“정의로운 금안의 마법사!”
‘뭐야. 그 듣기만 해도 낯부끄러운 호칭은!’
환호하는 관객들을 보자 부담이 느껴졌다. 어쩐지 에카르트의 볼로 타이 끈도 붉은색에 펜던트까지 내 응원색으로 맞췄나 보다. 헬라는 금색 브로치를, 니나는 붉은색 리본을 달았다.
‘정말….’
그쪽을 피해 시선을 돌리자 옆에는 리타가 서 있었다. 느긋하게 지팡이를 쥔 그의 손목에 손수건이 묶여 있었다.
“라멜 누님께서 만들어 줬습니다.”
안 물어봤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법 궁금하였다.
“가족도 왔어?”
“네. 어제도 저쪽에 계셨죠.”
리타가 관중석 한쪽을 가리켰다. 멀리서 보기에도 체격이 전혀 다른 남자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안 속아.”
시답잖은 말장난을 듣고 정색하자 리타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요?”
“무슨?”
“아니면 뭔가 당신을 달라지게 했나요.”
이전의 시엘리나를 떠올리며 하는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잖아.”
동생들이 원작의 성격대로였다면 우리의 관계도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이제 와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리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고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자아,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준결승을 치르겠습니다!”
이윽고 해설자가 등장했다.
“와아-!”
커다란 상자를 들은 심사위원이 네 명의 참가자에게 다가왔다.
“상자 안에는 네 장의 검은색 쪽지가 들어 있습니다. 쪽지는 붉은 동그라미, 파란 동그라미 둘 중 하나가 그려져 있습니다.”
동그라미 색깔이 같은 참가자끼리 결투하고, 승자에겐 결승 진출권이 주어진다. 랜덤이니 리타와 준결승전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다.
“어제 최고 대미지를 기록한 시엘리나 님부터 뽑아 주십시오.”
나는 상자에 손을 집어넣어 쪽지를 빼냈다. 펼쳐 보니 파란 동그라미였다. 그다음으로 보어가 나와 같은 색의 동그라미를 뽑았다.
“이런. 아무래도 나와 아가씨는 운명인가 보군.”
“개소리하는 걸 보니 결승 진출은 틀렸네.”
내가 차갑게 답하자 보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곧 리타와 데이지도 쪽지를 집어 들었다. 나와 보어가 파란 동그라미를 뽑았기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붉은 동그라미네요.”
“붉은 동그라미.”
“준결승 상대는 시엘리나 님과 보어 님, 리타 님과 데이지 님의 승부입니다! 참가자들은 망토를 착용해 주십시오.”
심사위원들이 비늘이 달린 망토 네 벌을 내밀었다.
“이 망토는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었기에 대미지를 흡수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상대의 공격을 받을수록 비늘은 떨어집니다!”
즉, 경기가 종료된 후 더 많은 비늘이 남아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방식인 것이다. 상대의 공격이 너무 강하면 한꺼번에 비늘이 전부 떨어져 바로 탈락할 수도 있다.
“또한 원 밖으로 밀려나거나 벗어나면 자동으로 탈락하니 유의해 주십시오.”
바닥에는 지름 5미터의 하얀색 원이 표시되었다.
준결승은 두 번으로 나뉘어 치러졌다. 먼저 리타와 데이지의 경기였다. 그들은 원 안으로 들어가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법을 사용했다. 여러 색의 빛이 원 안을 가득 메웠지만 데이지가 약세였다. 리타의 파장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녀는 계속 뒤로 밀려 나갔다.
망토의 비늘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지만, 데이지는 별도의 큰 공격은 하지 못하고 오직 방어에만 집중해 버텼다.
‘차라리 비늘 몇 개를 내어 주고 공격을 하지.’
나는 데이지의 의도를 짐작해 보았다.
설마 리타가 결승에 나가기 전에 최대한 마력을 빼놓겠다는 건가? 준결승을 마친 후 마력을 회복할 틈 없이 곧바로 결승을 진행하니 말이다.
‘…그럴 필요 없는데.’
5분의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비늘은 전부 떨어졌다. 심사위원은 깃발을 들어 준결승 종료를 알렸다.
“리타 님, 결승에 진출합니다!”
“뭐야. 저 꼬마는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잖아.”
“장난해?!”
관중석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해설자는 관중을 조용히 시켰다.
“자아, 자! 이어서 시엘리나 님과 보어 님의 승부가 있겠습니다.”
나와 보어가 원 안으로 들어왔다. 마주 보고 서니 새삼 곰처럼 그의 덩치가 커 보였다. 그는 허세를 부리듯 팔을 우드득 꺾으며 몸을 풀었다.
“통구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기권하지 그래. 뭐, 아가씨라면 피부가 좀 타도 내 취향이겠지만-”
보어가 허세를 부려도 그래 봤자 위협이 되기는커녕 요란해 보이기만 했다.
“자르기 전에 입 다물어.”
내가 경고하자 그가 당황했다. 호각 소리와 함께 경기 시작을 알리자마자 보어가 어떤 술식을 읊었다. 동시에 푸른 화염이 내 주변을 덮었다.
“잠깐. 처음부터 저런 마법을 써도 되는 거야?”
“죽일 셈이냐고!”
“순식간이었어. 막지 못할 거야.”
객석의 우려와 달리 내 망토의 비늘은 단 한 점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의 수를 읽고 방어벽을 준비했으니 말이다.
필사의 화염 마법이었겠지만 그저 화창한 봄 날씨 같았다. 내가 지팡이를 가볍게 뒤틀어 금세 불길을 꺼뜨리자 보어는 당황했다.
“이, 이게 끝이 아니다!”
타닥, 다시 작은 불꽃을 점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마법을 발동하려는 거겠지. 그래 봤자 내게는 일 더하기 일만큼 단순한 계산처럼 보였을 뿐.
‘이제 내 차례지.’
단숨에 커다란 나무줄기를 만들어 내자 보어가 비웃었다.
“화염 마법을 쓰는 내게 초목 마법을 사용한다니! 기초 속성 공부부터 다시 해야겠군. 이딴 나무줄기 따위-”
줄기는 그를 휘릭 감고 순식간에 선 밖으로 끌고 갔다. 동시에 그의 망토에 달린 비늘도 우수수 떨어졌다.
경기가 시작한 지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나는 보어를 완벽히 패배시켰다.
“마, 말도 안 돼!”
“내 망토는 결승전에서 다시 써도 되겠네.”
나는 원 안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저, 저렇게 빨리 퇴장시켰어? 비늘까지 한 점도 안 남기고.”
“화염 마법에 특화된 보어를 초목 마법으로 제압하다니. 완전히 속성을 무시했잖아!”
“잠깐, 이렇게 되면….”
관객석이 술렁이자 해설자가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시엘리나 님, 결승 진출권을 획득했습니다. 결승 진출자가 전부 같은 가문입니다!”
수백 개의 눈이 나를 응시하며 박수를 보냈다.
나는 여전히 원 안에 남아 있었고 새로운 망토를 착용한 리타가 들어왔다. 그는 이미 승리한 자처럼 여유롭게 말했다.
“그 단순한 패턴은 다 파악했습니다.”
“와, 대단하네.”
“한 번에 한 가지 속성의 마법만 사용했죠. 두 가지 속성은 무리인가요?”
그건 두 자리 숫자 덧셈을 하는 정도려나 싶었지만, 굳이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곧 경기가 시작되고 리타가 지팡이로 선 몇 개를 빠르게 그으니 바닥이 움직였다.
동시에 탑이 진동하기 시작하자 객석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무슨 마법을 쓰려는지 파악했다.
“그만해. 주변의 자원을 끌어다 쓰는 마법이잖아.”
“그래서요?”
“오레이칼 왕국은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했다던데. 고작 나를 밀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치고 과분해.”
“아주 성녀가 되었군요.”
“네가 공작가의 후계자라면 당연히 다른 왕국의 국민도 생각해야지.”
나는 그의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몇 가지 마법 술식을 읊었다.
곧바로 땅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뭔가 나오길 기대했으나 주변이 고요해지자 관객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아직 발동이 되지 않았나?”
“아냐. 발동하기 전에 시엘리나 님이 간파해서 막은 거야!”
“뭐라고? 그건 이론으로만 가능한 일 아니었어?”
모두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총구를 막아 총알을 불발시키듯, 그의 마법을 중지시켰다는 것을. 리타의 눈동자는 충격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마법진이나 술식을 구상하는 대신, 마력의 힘 그 자체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왜. 이런 방식은 자신 없나요?”
우리는 검술 합을 주고받듯 몇 번 지팡이를 맞부딪쳤다. 에카르트의 검술을 본 덕분에 나는 유연하게 그의 마력을 받아 내 쳐 냈다.
간단한 속성의 마력 그 자체. 하지만 실수한다면 망토의 비늘이 떨어져 나가기엔 충분했다.
‘슬슬 여기까지 하자.’
내가 지팡이를 가볍게 비틀자 그 끝을 향해 모여드는 시선이 느껴졌다.
바람의 흐름. 사람들의 호흡. 날아가는 새. 지팡이의 움직임. 모든 상황을 지휘하듯 정신을 집중하고 한 번 눈을 감았다 떴다.
곧바로 리타가 붕 떠올라 순식간에 원 밖으로 밀려났다.
그가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며 흙먼지가 일었고, 망토에 매달린 비늘이 우수수 떨어졌다. 승부는 간단하게 끝났다. 관중석이 그 어느 때보다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법도 쓰지 않았는데 그냥 밀려난 거야?”
“아냐. 투명한 마법이었어. 보고도 믿기 어렵군.”
“저렇게 힘도 안 들이고 승부를 내다니.”
이내 해설자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각을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