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내가 신경 쓰는 참가자는 따로 있었다. 원작의 블랑세가 다친 걸 도와줬던,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 이야기는 이번에도 다칠지 모른다는 거지. 이름이 데이지였던가.’
그쪽을 눈여겨보던 찰나 불덩이가 쏟아졌다. 보어가 참가자들을 공격한 것이다.
데이지는 보어의 마법에 부상을 당했고, 관객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른 참가자는 마수를 해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승부에 눈이 멀어서 저런 어린이까지 공격하다니.’
블랑세가 없으니 내가 나서기로 했다. 내게는 도울 능력이 충분히 있으니 말이다.
나는 잠시 공격 마법을 중지하고 데이지에게 회복 마법진을 발동했다. 그러자 객석이 술렁거렸다.
“도운 거야?”
“득점하지 못하는데도 일부러.”
데이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고, 고맙습니….”
나는 그녀의 인사를 흘려듣고 곧장 보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최상급 오크를 향해 그는 공격을 맹렬히 퍼부었고, 대미지는 착실히 측정되고 있었다. 나는 보어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쪽 때문에 시간을 썼으니 그 마수는 내가 처치하겠어.”
“오만하군! 이 오크는 최상급 마수다. 기본 마법이나 쓰는 아가씨 따위가 할 수 있을 리가-”
보어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지팡이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늘에서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숨에 오크의 목이 쿵 떨어졌다. 내가 마법으로 고드름처럼 끝이 예리한 얼음을 만들어 베어 낸 것이다.
그 순간 보어의 입이 떡 벌어졌고, 객석의 관객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거의 죽어 가던 걸 처치했더니 점수가 아슬아슬하네.’
다른 평범한 마수들과 사투하며 점수를 얻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있다.
바로 리타가 점찍은 검은 드래곤을 처치하는 것이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리타의 마법이 급소를 뚫지 못했기에, 드래곤은 만신창이가 되어 몸을 마구 비틀고 있었다.
산맥에서 넘어와 마을을 습격한 검은 드래곤. 토벌당해야 마땅한 마물이지만 그것의 포효는 너무 괴롭게 들렸다.
“리타.”
내가 인상을 찌푸린 채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네 점수, 지금도 준결승에 진출하기 충분하잖아.”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 쉬라는 이야기야.”
내가 드래곤의 역린을 응시하며 지팡이로 가볍게 선을 그렸다.
‘차라리 단숨에 숨통을 끊어서 고통 없이 보내 주자.’
끝이 날카로운 얼음이 순식간에 역린을 관통했다. 비늘에서 피가 솟구쳤고 커다란 눈꺼풀이 마침내 안식을 찾은 듯이 감겼다.
나는 얼굴에 튀긴 피를 소매로 쓱 닦아 냈다.
‘죽이고 나서도 찝찝하네. 이런 대회, 다시는 참여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그 덕에 준결승에 진출하기 간당간당했던 점수는 단번에 상승하였다.
관중석에 잠시 적막이 감돌더니 모두 한마디씩 내뱉었다.
“말도 안 돼! 저렇게 간단한 마법으로 드래곤을 죽였다고?”
“속성을 완전히 무시했잖아!”
“대체… 마법보다 더 마법 같군.”
해설자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각을 불었다.
“시엘리나 님. 최상급 마수를 해치우고 누적 305,800점의 대미지를 기록했습니다! 이로써 1등으로 준결승전에 진출합니다.”
객석에서 뜨거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
“대단해!”
순위가 차례로 발표됐다. 3위는 대머리 보어, 4위는 데이지였다. 데이지는 중간에 공격을 받아 득점하지 못한 걸 감안하면 꽤 좋은 실력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을 직접 처치할 기회를 놓친 리타는 2위에 올랐다.
물론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건 나였다. 객석은 물론 참가자의 시선이 내게 꽂혀서,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니까.
***
“시엘리나 님 말이야. 점수를 따기 바쁜 와중에 다른 참가자를 치료했어.”
“그러면서도 1위를 하다니 대단해! 왜 그동안 저런 마법사를 몰랐지?”
관중석에 있는 모두가 시엘리나를 극찬하자 에카르트는 기쁜 동시에 언짢았다.
그는 오늘따라 변덕이 심했다. 시엘리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푹 쉬다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헬라는 그런 제 주인의 상태가 염려스러우면서도 시엘리나의 마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걱정했는데 백마법 외에 다른 마법도 능하셨군요.”
“너무 대단해요! 하아. 저, 공녀님께 공격당하고 싶을 지경이에요….”
“헬라, 니나.”
에카르트의 부름에 그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시엘리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명했다.
“호텔로 먼저 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알겠습니다.”
“네, 넵!”
니나는 아쉬운 티가 났지만 무슨 이유냐고 따질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함께 공녀를 모시고 돌아가고 싶어도 주인의 명령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랬기에 아쉬운 눈빛으로 객석을 벗어났다.
에카르트는 당장이라도 시엘리나를 데리고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에게 남의 시선이 닿으면 닳을 것 같았고 비록 환호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조차 불쾌했다.
그의 안에서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끓어올랐다.
“내일은 준결승과 결승전이 치러집니다. 지팡이의 주인은 과연 누가 될지, 끝까지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해설자가 공식적으로 경기 종료를 알리자 에카르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변장용 망토을 전달해 주기 위해 곧바로 일어섰다.
***
경기장을 나가면 아까 에카르트와 헤어진 야외의 대기 장소였다.
성벽처럼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로 넓었으며, 참가자의 가족이나 보호자만 입장 가능한 곳이었다.
나는 누가 말을 걸기 전에 쌩하니 옆으로 돌아 걸었다.
‘어서 변장용 로브를 받고 나가야겠어.’
그대로 가면 아까 객석의 반응으로 보아 공항을 나오는 연예인처럼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게 뻔했다.
서둘러 3분의 1바퀴 정도 달리자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던 그를 만났다. 경쟁자들과 계속 함께 있었기에 그가 내심 반가웠다.
“에카르트!”
“일단 쓰십시오.”
말을 잇기도 전에 그는 내게 로브를 씌웠다.
마술사의 비둘기가 된 기분이었다. 시야가 쭉 내려가더니 어느새 나는 에카르트의 허리 정도 오는 키가 되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직 당신만 눈에 들어오더군요. 저만 보고 싶을 정도로 멋졌습니다.”
안도한 듯이 한숨을 쉰 그가 뒤늦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자연스럽게 잡고 출구로 빠져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참가자들을 향해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
“시엘리나 님을 가까이서 보니 어떻습니까?”
“그분은 대체 언제 나오시는 거야?”
“한번 기다려 보자고! 기다리면 언젠가 나오시겠지. 운이 좋아서 인터뷰를 따내면-”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미 빠져나왔으니까.
왠지 나와 관련된 질문이 다수였으나, 다행히 나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다.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모른 척하고 우리는 마차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작아진 와중에 낯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손을 잡고 걷는 게 마음이 편했다.
‘뭔가 듬직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는 마차에 탄 후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이 당신을 본 건, 살면서 다시는 없을 행운일 겁니다. 그들 인생의 최후의 날이라 해도 행복하게 눈을 감겠죠.”
“대체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제가 여기 온 목적을 잊지 말아요.”
가끔 믿음직스럽다가도 이렇게 무서운 말을 하니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둘만 탄 상태로 마차가 출발했다.
“잠깐. 헬라와 니나는요.”
“경기가 끝나고 먼저 보냈습니다.”
그는 호텔에서 식사를 준비하겠다는 사정을 설명했다. 어떤 참가자들이 레스토랑에 사주해 독을 타기도 한다나.
보어 같은 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았기에 나는 납득했다. 우리가 묵는 호텔은 레지던스처럼 조리 도구가 있으니 음식을 만들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요리는 니나가 하나요?”
“제가 합니다.”
“에카르트가요?”
어렸을 때 암살 위협을 겪고 한동안 직접 요리를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대접한 적은 없었으니 맛있을지 다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빙의하자마자 라멜이 내게 대접했던 스프보다는 맛있을 것이다. 자수도 섬세하게 두었으니 의외로 그런 쪽으로 재능이 있을지도.
***
호텔 룸으로 들어오니 한쪽으로 식료품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로브를 벗기도 전에 양 소매를 걷어 올린 니나가 내게 돌진했다.
그리고 나를 껴안으려는 것처럼 팔을 벌렸다.
“공녀님! 오늘 너무 멋졌어요. 이렇게 저렇게 마법을 쓰시는데 막!”
“고마워요. 그런데 음! 제 옷에 먼지가 묻어서….”
나는 콧김까지 내뿜는 그녀가 무서워서 슬쩍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그럼, 어서 목욕하러 가요. 안아서 모실게요.”
서비스 정신이 과한 니나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욕실로 데리고 갔다. 니나의 어깨 너머로 에카르트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목욕을 마친 후. 물기를 털고 실내복 차림으로 나오니 테이블 위가 푸짐했다. 내 목욕이 끝나는 시간을 미리 맞춰 준비한 모양이었다.
접시에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요리가 예쁘게 비치되었다.
“요리를 좀 해 봤습니다.”
“조금이 아닌데요! 맛있게 먹을게요.”
그런데 테이블 위에 마련된 식기구는 두 개뿐이었다. 이 정도로 푸짐하게 차렸다면 분명 헬라와 니나도 도왔을 텐데 설마 나만 먹으라는 건가?
“헬라와 니나 꺼는요?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아까도 마차에서 둘의 행방을 물으시더니. 둘에게 관심이 상당하군요.”
“…그 정도 관심 갖는 건 당연하잖아요.”
“당연합니까?”
그가 살기 어린 아우라를 내뿜자 접시 위의 샐러드가 시들어 갔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싶어서 나는 샐러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더듬었다.
“당연할 걸요?”
“당연하다고요?”
“당연해요!”
도대체 무슨 대답을 요구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재차 말하자 그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원하신다면 조금 맛보게 하지요.”
“그래요. 그럼 제 방에서 드시면 되겠어요.”
아무래도 에카르트와 같은 테이블에서 먹는다면 둘은 체할 테니 말이다.
그러자 헬라와 니나는 감사하다고 꾸벅 숙인 후, 기미 상궁처럼 요리 몇 가지를 접시에 조금 덜어 안쪽의 방으로 가져갔다.
“…살면서 공작님의 요리를 맛보는 날이 오다니.”
“너무 과분한 대접이에요. 저, 내일 해고당할지도 몰라요. 그럼 공녀님은 누가 모시죠?”
나는 그들의 대화를 모른 척하고 에카르트와 단둘이 식사를 시작했다.
샐러드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넣자, 하루 피로를 전부 풀어 주는 산뜻함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너무 맛있어요! 생각보다 더 잘하시는데요.”
“그저 작게나마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미안한 게 있어서.”
“뭐가 미안해요. 이렇게 해서 저주가 나으면 좋은 거죠.”
맛있는 걸 먹고 기분이 풀린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넓은 어깨를 토닥였다. 그는 움찔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좋게 봐주시니 기쁘군요.”
원작의 에카르트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무심했기에 이런 반응이 신기했다. 그러다 문득 나를 향한 집착을 걷어 내면 그에게 무슨 감정이 남을지 궁금해졌다.
때마침 선명한 붉은 눈동자와 매혹적인 입술로 그가 주문을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