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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33화 (33/115)

#33화

짧게 잘린 붉은 머리카락 아래 가느다란 눈썹이 드러난 리타였다. 그는 내 옆에 다른 발판 앞에 멈춰 섰다.

“…그러게.”

라멜이 공작성에 왔을 때도 무도회에서도 리타를 만나지 못했다. 가족이지만 라멜보다 더 어색한 사이였는데. 굳이 구석으로 따라와 말을 걸다니 경계를 놓을 수 없었다.

“대회에 참석하실 줄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뭐. 너는 잘 지냈어?”

“근황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닐 텐데요. 이야기는 대련으로 충분합니다. 그때 이후 한 번 더 제대로 겨뤄 보고 싶었거든요.”

그때라니. 기사 둘을 제압하고 공작성을 뛰쳐나왔던 때 말인가.

“일방적으로 져 놓고서는.”

“여유가 넘치시는군요.”

나는 리타의 말에 긍정하는 대신 침묵했다. 참가자들이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서자, 해설자는 곧바로 카운팅을 했다.

“자. 그럼 3초 후 바로 발판을 밟으세요! 3, 2, 1!”

발판을 밟자 마법진이 눈높이 정도의 위치에서 멈췄다.

딱 무난한 난이도의 문제였다.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다시 리타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이유로 여기 참가했나요?”

“근황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라더니. 뭐, 그래도 답해 주자면 지팡이가 없어서랄까.”

“그 이유가 끝?”

“응. 루솔릿 공작가에서 지원해 준 게 없다 보니 지팡이도 자급자족해야 하거든.”

내 대답을 들은 리타는 여전히 나를 무시하듯 웃었다.

“어련하시겠어요. 1위가 목표라면 1층까지는 쉽게 오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곧바로 어려운 마법진의 술식을 해제하고 보란 듯이 포탈로 넘어갔다.

“루솔릿 가문의 리타 님! 참가자 중 가장 먼저 9층으로 갑니다.”

해설자의 말에 나도 다시 마법진을 살펴봤다.

나는 어떤 문제가 나오는지는 몰랐지만, 무슨 마법진이든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곳의 모든 언어와 기호는 작가가 임의로 정한 것. 작가와 같은 한국어를 사용한 덕분인지 어느 마법진이든 바로 핵심이 보였다.

그 덕에 여태 모든 마법을 빨리 습득했고, 간단한 마법은 바로 따라 할 수 있던 것이다.

지금도 그 능력 덕분에 단숨에 마법진을 풀어내, 앞에 떠오른 포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행히 이번 포탈은 아무 이상이 없었어.’

같은 방식으로 9층부터 6층까지 무난하게 통과했다. 결승전 전까지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문제를 푸는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시엘리나 님, 5층에 입장했습니다!”

그사이 몇 명의 참가자가 술식을 해결하고 4층 포탈로 들어갔다. 4층을 지난 참가자는 리타와 보어를 포함해 총 여섯. 적당한 속도였다.

“리타 님, 3층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속도군요.”

하지만 그 후로 해설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분명 누군가 새로운 층에 진입할 때마다 알려 줬는데 말이다.

‘그럼 3층까지 도착한 사람이 리타밖에 없는 건가?’

4층을 통과한 사람이 다섯 명이나 되는데. 나는 이번에도 포탈로 들어가기 전에 방어 마법진을 걸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겨 나머지 참가자가 3층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포털로 들어오자 3층이 아닌 다른 공간이 나왔다.

어둑어둑한 공간에서 불꽃이 타닥이며 점멸하고 있었다.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고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뜨거운 화염이 곧바로 내 위로 쏟아졌다.

“낄낄. 그러게 아까 같은 팀이 되었으면 좋았잖아!”

“당신은.”

보어였다. 다행히 내 비상 마법진이 작동한 덕에 무사했다. 그가 공격 마법을 내게 몇 번이나 더 쏟아붓기 시작했다. 주황색 불꽃과 붉은색 불꽃이 이리저리 튀었다.

‘포털은 원래 층마다 이어져야 하는데. 보어가 공간 조작 마법까지 가능한 실력이었나?’

나는 다른 가능성을 추측했다.

‘아니야. 리타의 마력이 느껴져.’

싸움이 붙도록 판만 깔아 주고 빠진 건가. 리타가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보어는 이때다 싶어 포탈로 들어오는 참가자를 족족 공격했겠지. 그들 역시 습격을 예상하고 방어를 준비했지만, 보어의 공격력이 너무 높아 파괴되었으리라.

“참가자를 전부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셈인가?”

“그래. 그럼 최소한 준결승에라도 진출하겠지!”

내 질문에 보어가 낄낄거리며 답했다.

“그런 한심한 방법을 선택하다니.”

“참가자를 공격하지 말라는 규칙은 없어!”

그간의 여러 경험으로 나는 길게 말다툼할 필요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쪽 같은 인간은, 말로 하는 것보다 똑같이 갚아 주는 게 더 잘 통하더라고.”

나는 방어 마법을 해제하고 바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하, 배짱 한번 두둑하군. 내 마법이 더 빠를-!”

보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아래를 바라봤다. 바닥에서 솟아난 얼음이 순식간에 그의 하반신을 얼리고 있었다.

내가 눈 깜빡할 사이 곧바로 빙결 마법을 발동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손목 한번 움직였을 뿐이잖아!”

보통 이런 마법은 발동하는 데에 몇 초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마력이 많은 숙련자일수록, 최상위 마법도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까.

쓰러진 참가자들을 흘긋 바라봤다. 저대로 중상을 입은 상태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 두려니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나가는 길이니까.’

나는 간단한 치유 마법을 사용한 후 출구로 보이는 빛을 향해 걸어갔다.

“뭐 하는 거야! 이봐, 나도 풀어 주고 가야지!”

“혀까지 얼릴 걸 그랬나 봐.”

나는 보어의 외침을 뒤로하고 리타가 만든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3층에 입장한 후 심사위원에게 보고했다.

“포털에 문제가 있던데 그대로 두실 건가요?”

“네? 확인하겠습니다!”

심사위원은 후다닥 저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충분히 예측했을 텐데, 경기의 재미를 위해 내버려 둔 모양이다.

‘보어에게도 별다른 제제가 가해지지 않겠지.’

뒤이어 나머지 참가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3층은 사실 일명 폭탄이라고 부르는, 가장 어려운 마법진이 섞여 있습니다.”

해설자가 신난 듯이 덧붙였다. 내가 발판을 밟자 아래에 붉은색 불빛이 켜졌다.

“안타깝지만 시엘리나 님이 당첨되었군요. 술식을 해제하지 못하면 아래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어렵다니 뭐니 해도 내겐 암산으로 가능한 문제였다.

순위권에 넉넉히 들어야 했기에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단숨에 마법진을 해제해 버리고 아래층으로 가는 포탈을 띄웠다.

“풀었습니다! 고블린이 아기를 재울 때 사용하던 주문을, 오레이칼 왕국 고대어로 변환한 마법이었습니다.”

쓸데없는 문제를 출제하는 건 이전 세계나 지금 세계나 마찬가지구나.

우여곡절 끝에 나는 2층에 다다랐다. 리타는 가장 먼저 마법진을 무효화하고 1층으로 나갔다.

“리타 님이 가장 먼저 다음 스테이지로 진출합니다! 탑을 탈출한 시간은 15분 12초. 이제 남은 자리는 아홉 개뿐입니다.”

별의 꽃을 대체할 방법을 고안한 마법사다웠다. 내가 성전에 들어온 후 마법을 수련했듯 그 또한 연습했겠지.

“그전에, 잠시만요! 이것 보십시오. 포털 안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해설자가 띄운 영상석에는 화염 마법에 당한 마법사들과 꽁꽁 얼어 있는 보어가 보였다. 보어의 화염 마법은 익히 유명했다. 그랬기에 모두가 충분히 상황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저 대머리. 아까 포털을 들어가 놓고 여태 나오질 않더라니!”

“자기들끼리 싸웠나 보군.”

“다른 참가자를 훼방한 모양이군. 그러다 당한 거면 꼴좋지, 뭐!”

관객들이 보어에게 야유를 퍼붓고 있는 사이 나는 마침내 1층에 다다랐다. 탑 밖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고, 객석의 사람들은 참가자가 나올 때마다 함성을 질렀다.

“시엘리나 루솔릿 님! 4위로 여유롭게 본선을 통과합니다.”

“와아!”

“윈터로드 제국의 루솔릿 가문, 대단하군요. 과연 두 분이 준결승까지 진출할까요?”

나는 에카르트와 헬라, 니나가 있는 곳을 눈으로 보았다.

에카르트는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니나는 손을 휘적휘적 흔들다 헬라를 치고 말았다.

마침내 다음 스테이지에 참가할 열 명의 마법사가 정해졌다. 탈락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중에는 보어도 있었다.

그는 내게 원한이 남았는지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인상 써서 어쩔 건데, 뭐.’

나머지 40명의 탈락자는 경기장 밖으로 안내받았다.

“아, 저놈보다 내가 더 빨리 풀었다고!”

“영상석으로 다 기록했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십시오.”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작은 소동이 있었으나 금세 정리되었다. 해설자 역시 매년 있는 일인 듯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이번 스테이지에서는 네 명의 준결승 진출자를 정해야 합니다!”

경기장의 거대한 입구가 열리고 관객석에 방어 마법진이 씌워졌다.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속구를 씌운 마수들이 들어왔다.

“어떤 마법이든 상관없으니 참가자는 마수를 공격해야 합니다. 가장 많은 대미지를 기록한 네 명에게 진출권이 주어지며, 마수에게 입히는 대미지는 마도구로 전부 측정합니다. 상급 마수일수록, 상급 마법일수록 더 큰 점수를 획득하죠!”

대부분의 마수는 북부에서도 본 흔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마수뿐만 아니라, 최상급 오크와 블랙 드래곤까지 있었다.

“저것은 타르 공국에서 온 드래곤입니다. 산맥과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기사 한 군단이 상대해도 끄떡없던 사악한 놈이죠. 가장 높은 점수가 걸려 있습니다.”

‘마법 대회를 위해 다른 왕국의 마수까지 수입하다니.’

“그럼 참가자 여러분, 모두 마법을 펼쳐 주시길 바랍니다!”

해설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경기 시작을 알렸다.

본선을 치르고 곧바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온 바람에 집중력이 흐트러졌을 법한데, 모두의 표정은 결연하기만 했다.

리타는 곧장 드래곤을 공격했다. 1위로 탑을 빠져나온 그가 넘을 수 없는 실력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부분 그에게 드래곤을 맡기고 평범한 마수를 처치하려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드래곤에게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면 시간 낭비였으니 질 대신 양을 택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볼까.’

나는 반사되는 빛 마법을 사용해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마수를 공격했다.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충분히 대미지를 입히고 있었으며, 내 점수는 차곡차곡 쌓여 갔다.

시엘리나는 제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객석의 사람들은, 블랙 드래곤을 처치하고 있는 리타가 아니라 대부분 시엘리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법이 아니라 하늘하늘하고 긴 리본을 들고 장난치는 것 같은데.”

“…저렇게 간단한 마법으로 저렇게 높은 대미지를 얻는 게 가능하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아까 보어를 제압한 것도 저 마법사 아니야?”

“왜곡된 포탈을 통과했으니까 그러하겠지.”

그렇게 관중들의 시엘리나를 향한 관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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