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설마 저주 때문에 말도 못 할 정도로 힘든 건가. 예의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걱정이 되어 문을 열어젖혔다.
“괜찮아요?”
그는 후다닥 이불을 말더니 몸을 웅크렸다. 열린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고 곤란한 표정이 눈에 선했다.
“어서 치료해 드릴게요!”
“잠시, 잠시만 이따가요. 지금은 돌아가 주십시오.”
“네? 그 정도예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주가 얼마나 그를 괴롭혔기에 저렇게 괴로워하는지 속상했다.
‘어서 고통을 사라지게 해야겠어.’
나는 걱정하며 방을 나가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 기다렸다. 저렇게 힘들게 보낸 밤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굳이 그에게 불행한 가정사를 주고 사람들을 파멸시킨 흑막으로 만든 작가가 원망스러웠다.
‘반드시 원작을 뜯어고쳐야지.’
“시엘리나.”
곧 조금 거친 목소리로 에카르트가 방 안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열이 났는지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아요? 옷도 갈아입으셨네요.”
“…땀에 젖어서요.”
“그래서 창문도 열어 놓은 거예요?”
“…네.”
“그럼 이제 치료해 드릴게요. 일단 셔츠 단추를 푸시는 게.”
“아뇨. 지금은 손으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많이 아팠다면서요.”
에카르트가 시선을 회피한 채 침대에 가볍게 걸터앉았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듯 한 차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가슴에 하면 참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고통이요?”
“네. 그렇다고 칩시다.”
에카르트는 평소와 달리 왼손을 내밀며 말했다.
붉은 눈동자가 이글이글하게 나를 노려봤다. 너무 꼬치꼬치 물어봐서 화가 났나? 나는 더 묻는 대신 얌전히 치유 마법을 걸었다.
***
에카르트는 시엘리나가 들어오기 전, 차마 말할 수 없는 꿈을 꿨다.
피아노 건반 위를 짚듯 손이 제 가슴 위를 더듬었다. 시엘리나의 하얀 손가락이 제 몸과 닿을 때면 기분이 나아지고 좋은 향기가 전해졌다.
“지금부터 제가 하려는 건.”
그녀가 제 가슴을 간질이다가 말했다.
“치료가 아니에요.”
손끝에 마력은 없었다. 시엘리나가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고 눈을 감아 왔다.
에카르트는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짙고 긴 속눈썹이 예뻐서 세어 보고 싶었다. 하얀 피부도, 분홍색 뺨도, 붉은색 잔머리카락도 전부 아름다웠다.
한참 입을 맞추다 숨을 고른 후. 그는 그대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
그 이후의 장면을 되짚던 그는 제 입술을 매만지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누구를 상대로 이런 꿈을 꿔 본 적이 없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 꿈인지는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건가.’
집착하는 이유가 여태 백마법이라고 생각해 왔을 뿐. 어느새 시엘리나의 더 많은 걸 소유하고 싶어졌다.
그는 그간 백마법사가 탐탁지 않았다. 정해진 치료법만 수동적으로 사용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
선대 공작이었던 어머니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똑똑히 봐 왔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아무리 사랑했어도 저주의 고통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했다.
에비게일 크로덴. 제 어머니는 평생을 고통에 시달리다가 암살로 생을 마쳤다.
‘하지만 시엘리나는 다른 백마법사와 달라.’
그녀는 동방 의학을 알아보려고 하고, 별의 꽃을 얻으려 했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계속 시도했다.
새로운 방식을 찾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이 저주를 아예 사라지게 할 방법을 찾기 위해, 남들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노력해 주고 있다.
심지어 치료 재료를 얻기 위해 대회에 참가하고자 다른 왕국까지 왔다. 전부 다 고마웠다. 무도회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준 것도.
이렇게 저렇게 여러 이유가 많아지다 보니 어느새 마력 궁합이 잘 맞는 건 덤이 되었을 뿐이다.
‘한데 그런 사람을 두고 이런 꿈을 꾸다니.’
그녀가 저주를 두려워하진 않지만.
저를 상대로 이런 마음을 품은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에카르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시엘리나는 영혼부터 다른 선한 사람이니까. 한없이 아껴 줘도 모자란 그녀인데….
동시에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온전히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게 이기적인 생각이라도 말이다.
다음 날, 에카르트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로했다.
시엘리나와 함께 경기를 치르기 위한 대기 장소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도 시선은 시엘리나를 집요하게 좇았다. 그녀는 참가자용 막대 지팡이를 배급받고 돌아온 후, 손수건을 손목에 묶고 재잘거렸다.
“손수건은 지팡이에 묶으면 안 된대서 대신 손목에 묶었어요.”
“네. 예쁩니다.”
에카르트의 시선은 손수건이 아닌 시엘리나의 가느다란 손목에 꽂혀 있었다.
시엘리나가 아무 무늬도 없는 평범한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나무 막대기일 뿐인데도 그녀가 들고 있으니 신성한 지팡이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이런 결투는 처음이네요.”
“처음….”
이번에는 시엘리나의 붉은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는 에카르트였다. 그는 떠오르는 망상을 참느라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가 놓았다.
시엘리나는 별로 중요한 단어도 아닌데, 한 말을 나지막이 되풀이하는 그가 이상했다.
“또 아픈가요?”
“아닙니다.”
“아니긴요! 어서 치료해 줄게요. 보는 눈도 있으니까 가슴은 곤란하고 손으로.”
시엘리나의 손이 닿자 에카르트는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움찔했다. 그는 황급하게 손을 빼내며 괜찮다고 되풀이했다. 나쁜 상상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꼭 승리하고 올게요.”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럼요. 아, 승리의 의식 같은 게 있던데. 이런 미신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해야죠.”
시엘리나가 지팡이 위에 어설프게 입을 맞췄다.
검사들이 행운을 빌거나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검에 키스하듯, 마법사들 또한 그러한 의식이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없는 걸 잘 알지만.
에카르트는 조각상처럼 굳었다. 자꾸 혼자 몹쓸 생각을 하는 바람에 얼굴을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미치겠군.”
“에카르트?”
“아, 아닙니다. 부디 다치지 마세요.”
그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가 달린 망토를 푹 눌러쓰고는, 발걸음을 돌려 관중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작님, 그쪽이 아닙니다! 관중석은 반대편이에요.”
헬라가 다급히 에카르트를 쫓아갔다.
***
나는 탑 꼭대기인 10층에 도착했다.
바닥은 체스 무늬처럼 검정색과 하얀색의 타일이었고, 벽은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통유리였다. 계단으로 통하는 문도 투명했다.
안에는 층마다 심사위원 두 명이 배치되어 있고, 나 외에도 50여 명의 마법사가 모였다.
‘그래도 공간이 넉넉히 남을 만큼 넓어.’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얼굴과 이름을 전부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멀리서 리타의 얼굴만은 눈에 들어왔다.
‘안 만난 지 3년도 더 되었지. 빨간 머리만 아니면 몰라볼 뻔했네.’
전에 봤을 때보다 키가 커졌고 날카로운 눈매는 이제 소년의 티를 완전히 벗어났다. 그가 내가 있는 쪽을 흘긋 보았고, 나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시선을 돌렸다.
“아아. 마도구 테스트.”
바깥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단상에 앉아 있는 해설자였다. 그는 마이크처럼 목소리를 크게 하는 마도구를 들고 있었다.
탑 내부의 상황은 영상석을 통해 바깥에 전해져, 관객들은 스크린 화면처럼 경기를 지켜보았다.
“예선을 통과해 탑까지 오신 여러분- 지금부터 본선을 치르겠습니다! 오늘 열 명의 본선 통과자를 정한 후, 곧바로 준결승 진출자를 선발하는 스테이지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경기 방식은 간단했다. 문제를 풀어서 10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면 된다.
“보다시피 탑의 바닥은 특수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요, 검은색 타일이 바로 발판입니다. 저렇게 발판을 밟아 문제를 확인해야 합니다!”
심사위원 중 하나가 타일을 밟아 시범을 보이자 마법진이 둥실 떠올랐다. 그 마법진 자체가 문제였다.
“마법진의 술식을 풀어야만 아래로 향하는 포탈이 드러납니다. 포탈을 통과하면 바로 아래층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1층에 도착한 10명의 참가자가 다음 스테이지에 진출하죠.”
심사위원이 마법진을 해제하니 타원 모양의 빛이 떠올랐다. 그가 포탈에 손을 뻗자 빛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이동 마법진이 아니라 탑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마법이구나.’
이윽고 그가 문을 열고 헉헉거리며 등장했다. 심사위원이 되돌아오자 해설자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단, 어떤 포탈에서는 참가자끼리 마주칠 수 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이례적으로 생긴 규칙이었다.
“뭐?”
“문제를 풀고 내려가는 게 다가 아니야?”
술렁거리는 참가자들과 달리 나는 침착했다. 오레이칼 왕국에 오기 전, 블랑세가 미리 귀띔해 준 덕분이었다.
“습격에 대비해야 해. 포탈을 통과하기 전에 방어 마법을 미리 준비해.”
그동안 다음 스테이지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참가자끼리 부딪칠 일은 없었다. 하지만 포탈이 사각지대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인 포탈은 들어가면 곧바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만, 포탈 내부에 공간이 있다면….
다른 참가자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몇 명이 단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무사히 통과하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 안일했다.
참가자 사이에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근처에 있던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봐, 아가씨. 나와 동행하겠어?”
대머리에 험한 인상의 남자였다. 키는 작았지만 몸집은 우락부락했고 검은 눈동자는 희번덕희번덕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보어. 인상착의를 보아하니 블랑세가 조심하라고 한 참가자인데, 하필 내게 말을 걸어올 줄이야.
“문제 풀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다고. 동시에 포탈을 통과하면 아무래도 안전할 것 같단 말이지.”
“사양할게.”
내가 반말로 답하자 그는 혀를 찼다.
“그래? 그거 아쉽군.”
괜히 저 남자와 함께했다가 발목이나 잡히지 않으면 다행이지. 나는 다시 해설자의 안내에 집중했다.
“자, 그럼 검은 발판을 찾아가십시오! 어떤 발판에서 무슨 문제가 나올지는 모릅니다!”
몇몇은 웅성거렸지만 새로운 규칙을 재밌어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다른 참가자들과 적당히 떨어진 구석으로 걸어갔다.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한들 많은 사람과 경쟁한다고 생각하니 떨렸다.
‘해내야 해. 블랑세도 에카르트도 내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걸.’
나는 에카르트가 자수를 놓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검정색 발판 앞에 서서,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오랜만입니다.”
그때, 내 옆에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