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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31화 (31/115)

#31화

“놀이?”

“네. 음. 일단 엄지손가락만 빼고 나머지 손가락은 이렇게 깍지를 끼운 다음….”

감싸 오는 손이 간질거려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자 그도 미소 지었다. 손 크기 차이가 많이 난다는 생각이 들 때 그가 내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꾹 눌렀다.

“이렇게 말입니까?”

“네! 이, 이건 연습이었고요.”

물론 다음 판에서도 에카르트는 쉽게 꾹 눌렀다. 나는 쓸데없이 승부욕이 발동해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물고기 같네요. 귀엽습니다.”

“…고마워요?”

어쩔 땐 일부러 져 준 것 같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승부는 손 크기가 작은 내게 불리했다.

내가 이전 세계에서 자주 했던 가위바위보 등을 가르쳐 주는 동안 어느새 차례가 성큼 다가왔다.

“한 판 더 하면 안 됩니까?”

“곧 제 차례인데요.”

그러자 그는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다.

“재밌습니다, 이런 놀이. 이전에 세상이 넓어진다고 하신 말씀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군요.”

이 정도 놀이는 너무 사소하지 않나?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소한 놀이도 모르고 오직 마검의 지배자로 자랐을 테니. 나는 마음이 쓰여 나도 모르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

“즐거웠다면 다행이에요. 다음에 또 해요.”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러자 뒤에서 니나가 안절부절못했다.

“어떡하죠, 헬라 님.”

“문제 있는가?”

“아, 아뇨. 둘도 잘 어울려서.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공녀님을 응원할래요!”

니나가 볼이 붉어진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경기에 참가하는데, 당연히 나를 응원해야지!

“이거, 측정 도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오?”

내 앞에서 대기하던 참가자는 구슬의 1/5도 채우지 못하고 투덜대며 떠났다. 심사위원은 퉁명스럽게 “마도구는 정확합니다.”라고 대꾸했다.

이윽고 내 순서. 하얀 사제복 비슷한 옷을 입은 심사위원 앞에 반투명한 구슬이 놓여 있었다. 바로 마력을 측정하는 마도구였다.

“마법 대회 출전을 위해 오셨습니까?”

“네.”

“명단에 본인의 이름을 기록하시고, 이 마도구 위에 손을 올리십시오. 꽉 쥐어야 정확히 측정됩니다.”

자신 있었다. 이전에 성전에 들어갔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측정했는데, 이 구슬에 손을 대면 색이 차오른다.

나는 실제의 마력보다 덜 측정이 되도록 일부러 손을 살짝 띄웠다.

그런데도 구슬은 하얀색으로 빈틈없이 꽉 차올랐다. 급히 명단을 확인한 심사위원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말했다.

“대, 대단하군요. 루솔릿 가문의 시엘리나 님! 예선을 가장 높은 마력 양으로 통과하셨습니다.”

“공녀님, 너무 멋져요!”

니나는 반짝반짝 눈을 빛냈고 에카르트는 구슬을 부술 기세로 쳐다봤다. 에휴, 하다 하다 물건에까지 질투를 느끼다니.

“당신의 마력은 저런 마도구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뭐로 평가하는데요?”

설마 뻔뻔하게 자기 몸이라고 답하진 않겠지.

“평가할 수 없어요.”

“…….”

“어머.”

니나가 먹먹한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심사위원은 허허 웃으며 하얀색 티켓을 보여 줬다.

“예선 통과자에겐 최대 네 장의 관중석 티켓을 드립니다. 일행분들은 이 티켓이 있어야 경기를 관전할 수 있지요. 몇 개가 필요하신가요?”

“세 장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본선에 참가하는 모든 마법사는 경기 당일 배급되는 지팡이를 사용해 주셔야 하며-.”

심사위원은 몇 가지 규칙을 설명한 안내서와 함께 티켓을 건네줬다.

“오전 10시. 탑에서 본선 경기가 치러집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수도 중심에 있는 투명한 탑을 가리켰다.

신이 지었다고 하는 투명하면서도 햇빛을 반사하지 않는 탑. 저 탑에서 예선을 통과한 50명의 마법사들이 경연을 펼치고 오직 한 명만 지팡이를 얻게 된다.

***

나와 에카르트, 니나와 헬라가 탄 마차는 유유히 오레이칼 왕국 성문을 통과했다.

마차에 들어간 후 나는 어려지는 로브를 썼다. 루솔릿 공작가가 어디 머무는지 알 수 없지만, 경기장 밖에서 또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카르트는 지도를 펼쳐 우리가 묵게 될 수도의 호텔을 알려 줬다.

“다이아 호텔로 룸 두 개를 예약하라고 했습니다.”

“두 개요?”

“제가 쓸 방. 그리고 당신과 니나가 사용할 룸 말입니다.”

사흘 전. 전담 하녀로 함께 온 니나는 먼 왕국에서 혼자 있기 무섭다며 나와 같은 방을 쓰길 원했다.

솔직히 에카르트가 더 무섭지 않은지 묻고 싶었지만, 방이 두 개로 나뉘었으니 상관없었기에 그러라고 했는데. 다만 에카르트가 니나를 찾아와 으름장을 놓고 갔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겠지.”

니나는 그의 아우라에 대답도 못 하고 기절할 뻔했다. 나는 그때를 잠시 생각하다가 허허 웃었다.

“저와 니나…. 그럼 헬라는요?”

“미리 보내 둔 이클립스 기사단과 함께할 겁니다.”

헬라를 흘긋 보자 그녀는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다이아 호텔은 마차로 오면서 봤던 다른 호텔과 규모부터 확실히 차이가 났다. 내부의 조명이나 조형물도 예뻤다. 게다가 마력으로 냉난방도 된다나.

프론트에서 헬라와 직원이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방이 하나밖에 없다고요? 분명 헬라와 니나라는 이름으로 두 개를 예약했을 텐데.”

프론트 직원은 명단을 열심히 확인하고 진땀을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 측 착오였던 것 같습니다.”

“착오라. 일급 호텔이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그런 실수를 저지릅니까?”

순간 헬라에게서 에카르트와 비슷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호텔 직원은 한껏 겁을 먹었다. 게다가 키 크고 체격이 좋아 보이는 남자가 수상하게도 얼굴 절반을 로브로 덮고 있으니 말이다.

“네, 네! 다른 숙소를 제공해 드리거나 방 값을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최대 인원이 여섯 명인지라, 네 분께서 충분히 객실을 사용할-.”

“아니, 방 하나를 빼면 되겠지.”

에카르트가 다가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공작성 전부를 금화로 채울 수 있는 부자였다. 깎아 준다는 제안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 리가.

“그, 그럼! 일단 근처에 다른 숙소를 알아봐 주세요.”

나는 그가 이국에서 마검을 꺼내 들까 봐 먼저 나섰다.

프론트 직원은 감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로브를 뚫고 나오는 살기에 움직임이 급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다른 호텔에 방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직원은 다른 직원을 불러 세워 데스크를 맡기고 도주하다시피 자리를 벗어났다. 나와 에카르트는 로비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

“마법 대회 기간이라 빈 방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만약 없다면…. 같은 객실을 쓰는 건 어떨까요?”

애꿎은 손님을 강제로 쫓아내는 것보다 낫겠지.

물론 성인 남녀 둘이 같은 객실을 쓴다면 사교계에 큰 화자가 되겠지만, 그는 로브로 얼굴을 가린 채였고 나 역시 어려지는 망토를 쓴 상태였다.

“같이 말입니까?”

“역시 좀 그런가요.”

“아닙니다. 공녀께서 괜찮다면 그렇게 하지요.”

그는 길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냉큼 답했다.

돌아온 호텔 직원은 아니나 다를까 다른 숙소는 여관만 남아 있다는 말을 전했다. 시설도 뒤떨어지고 따뜻한 물도 안 나오는 곳이 대부분이겠지.

“어쩔 수 없죠. 그냥 객실로 안내해 주세요.”

“네, 넷!”

직원은 객실 안내를 마친 후 후다닥 도망쳤다.

그래도 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는 평판이 정말인지 시설이 괜찮았다. 화장실도 두 곳이 있었다. 욕조도 따뜻한 물이 나왔고, 방도 넓고 침대도 깨끗했다.

에카르트는 작은 욕실이 딸린 가장 큰 방을 내게 주기로 하고, 자신은 작은 방에서 자기로 했다. 나는 순순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저는 그럼 짐을 마저 가져다드리고 근처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헬라는 슬쩍 주군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니나는 거실, 나와 에카르트는 각각 방에서 머물게 되었다.

어차피 호텔 안으로 들어왔으니 나는 편하게 로브를 벗고 성인의 몸으로 돌아왔다. 그 후 간단히 걸칠 카디건 같은 옷을 입고 서랍을 열어 보았다.

거기엔 작은 유리병 안에 물약이 놓여 있었다. 나는 물 약병을 살짝 열어 냄새를 맡아 봤다.

‘대체 이런 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이런 어메니티는 필요 없다고.’

그때, 에카르트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엘리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힉.”

나는 순간적으로 주머니 안에 피임약을 넣어 감췄다. 그리고 거실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가벼운 잡담을 주고받았다.

“시엘리나. 약소하지만 드릴 게 있습니다.”

그는 잠시 방에 들어가더니 상자를 가져와 뚜껑을 열어 건넸다. 그 안에는 붉은색 꽃 자수가 놓인 손수건이 보였다.

“…언제 준비하셨어요?”

“대회에 참석한다고 했을 때부터 조금씩 배웠습니다.”

“배우다니. 직접 자수를 놓은 거예요?”

“그렇습니다.”

“정말 잘하셨는데요!”

나는 손수건을 펼쳐 보고 감탄했고 그는 조금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유순하게 자수를 둔 손수건을 건네주는 남자와 틈만 나면 사람을 죽이려고 드는 흑막이 동일 인물이라니.

“고마워요.”

나는 손수건을 소중하게 받았다. 대회에 관한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9시가 넘었고 니나는 자리를 정돈해 주었다.

“내일 대회를 앞두었으니 일찍 주무십시오.”

“에카르트도 잘 자요. 니나도.”

나는 자기 전에 손수건을 한 번 더 펼쳐 보았다.

‘원작에서 아무한테도 이런 선물을 준 적이 없었는데. 이런 실력이 있을 줄도 몰랐고.’

의외로 섬세했구나.

‘내일 본선이야. 잘해야 하는데.’

여러 생각 때문에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아니면 방이 분리되어 있긴 해도 에카르트와 같은 객실을 쓴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져서인가.

나는 뜬눈으로 뒤척이다가 거실로 나와 보았다. 에카르트나 니나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잠이 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나와서 보니 니나는 자고 있었다.

그때, 에카르트의 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문에 가까이 다가가 작게 노크했다.

“에카르트?”

“…시엘리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통을 참는 듯 목소리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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