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모쪼록 다비온이 이동 마법진을 준비할 테니, 떠나는 인원은 미리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천하의 황태자를 이동 전담 마법사처럼 부려 먹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에카르트는 이미 계획을 다 구상한 듯했다.
“기사단 열 명 정도를 미리 보내죠. 저와 헬라로 호위는 충분할 테고. 하녀를 한 명 더 데려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요.”
뭔가 부담이 커진 나는 기필코 우승하겠다는 의지를 다잡았다.
그날, 저녁 무렵. 내 머리를 말려 주던 니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어봤다.
“공녀님, 오레이칼 왕국에 가신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에요?”
“맞아요.”
“다른 하녀는 보실 필요도 없어요! 꼭 저를 데려가세요.”
니나가 가슴을 쫙 펴고 듬직하게 말했다.
“…오레이칼 왕국에 가 보고 싶었어요?”
“네! 그리고 무엇보다, 블랑세 양에게 공녀님의 활약을 전해 드려야 하니까요. 후후.”
이상한 사명감으로 불타오르는 그녀를 보니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일도 잘하고 치장도 예쁘게 해 주니 괜찮겠지.
니나가 들뜨며 향유를 가지러 잠시 자리를 벗어난 사이. 블랑세가 창문을 열고 소리도 없이 스윽 들어왔다.
“시엘.”
“…블랑세? 그동안 어디 있었-”
“오레이칼 왕국의 대회에 나갈 거야?”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응, 마법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려고.”
이쯤 되니 제국에서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흐음, 정말 네가 하려는 일은 예상할 수 없다니까.”
그녀는 내 눈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네가 승리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 이번에 경기 규칙이 달라지니까.”
블랑세가 내게 속삭이며 그 내용을 몰래 알려 줬다.
“저, 정말?”
“아무리 명망 있는 대회라도 언제까지 관심을 받겠어. 다른 왕국도 마법 대회를 개최한다는 소문이 돌다 보니 슬슬 변화를 주려는 모양이야.”
원작에서 그런 이야기는 없었지만 나는 납득했다. 작가가 설명을 대충 때우고 넘어갔으니, 그런 규칙이 있더라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블랑세는 어떻게 알까? 출제 장소에 몰래 잠입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가 솔직하게 털어놓길 바라면서 말을 꺼냈다.
“블랑세. 만약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서 수배당하면 꼭 말해 줘. 어떻게든 내가 돈을 마련할 테니까.”
“시엘, 돈 많아?”
“보석은 충분히 있어.”
에카르트가 선물한 보석들은 값어치가 상당할 테니 보석금이나 합의금으로 충분하겠지.
돈으로 해결이 안 되면 동방으로 블랑세를 도주시키고, 나는 나중에 다른 왕국으로 도망치면 될 거다. 하지만 그녀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 태연히 맞받아쳤다.
“보석이라니. 우리 혼수를 미리 준비했구나!”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능력이다. 난 진지했단 말이야! 네가 위험한 일을 했을까 봐.”
“걱정 마.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블랑세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블랑세의 쓸쓸함이 너무 찰나여서 나는 잘못 봤을 거라고 넘겨짚었다.
“아. 그런데 블랑세도 참가해?”
그럼 곤란했다. 내가 승리해야 지팡이를 얻을 수 있었는데, 블랑세를 상대로 싸우기는 정말 싫었으니까.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가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걱정 마.”
그렇다면 나가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아는지. 역시 수상했다. 이런 규칙을 알고도 원작에서 패배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의문까진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내가 골똘히 생각에 빠지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시엘. 다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와. 다시 만나자.”
그러고 다시 인사할 틈도 없이 블랑세는 훌쩍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
“그래서- 니나가 가겠다는데요.”
나는 연구실에서 에카르트를 치료하며 니나의 말을 전했다. 블랑세가 찾아왔더라는 말을 하려다가, 또 괜히 분위기가 싸늘해질까 봐 나중에 하기로 했다.
마력 주입을 끝난 후 가슴에서 손을 떼려고 했는데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에카르트?”
“그 여자, 당신과 너무 가까워지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가슴에 안착시켜 차분한 심장박동을 느끼게 했다.
‘더 이상 마력은 안 들어간다고, 이 마력 집착남아!’
“일단 이것 좀 놓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요?”
“무슨 말씀이에요. 공작님이 하녀를 데려가라고 하셨잖아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다는 것마저 잊었다.
“제가 여자였다면 당신을 모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집착 서브 남주가 여주를 견제하는 거로 모자라 내 하녀가 되려고 한다니. 나는 그의 말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혹시 변장할 겁니까? 그렇다면 어려지는 제 로브를 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아, 성전에 갈 때 사용한 그 로브 말이죠.”
“네.”
“변장이라….”
우승자나 눈에 띄는 참가자들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래도 나중에 제국을 조용히 떠나려면 가명을 사용하고 최대한 본모습을 바꾸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하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저와 비슷하게 생긴 소녀를 찾아내려 할지도 모르니까요.”
“무슨 상관입니까?”
“우승자에겐 여러 세력이 접근하려 하죠. 제가 변장한 후 자취를 감춘다면 정체를 찾아내려 할 거예요. 그럼 애꿎은 소녀들이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커요.”
“…….”
“힘을 얻기 위해 나쁜 수단까지 동원할지 모르고요. 그러니 조금 번거롭더라도 신분은 확실히 밝히겠어요.”
에카르트의 가슴이 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슬쩍 몸을 떼어 냈고 나도 손을 내렸다.
“왜 그렇게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죠.”
“백마법사가 된 것도 타인을 위해서인가요? 아픈 사람을 돕기 위해. 그런 사명감을 가진 이도 더러 있다던데.”
“에이, 그 정도로 착한 사람은 아니에요.”
애초에 다른 왕국에서도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찾는 게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멸종한 정령을 만난 듯 흥미로운 눈빛이 되었다.
“착해 보입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무, 저와 다릅니다.”
“네? 에카르트도….”
가끔 사람을 죽이거나 납치하고, 부하를 구박하고, 내가 도망치지도 못하게 하지만. 예의상으로 착하다고 말해 줄까. 그런 고민이 들었다.
말문이 막힌 나를 향해 에카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참. 그래도 제 로브는 챙기는 게 어떻습니까? 굳이 경기에 참가할 때가 아니라도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게요. 경기장 밖에서는 로브를 쓰는 게 좋겠어요.”
경기가 이틀에 걸쳐 치러지는데 숙소는 제공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참가자에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접근할 가능성이 컸다. 본선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면 더더욱 말이다.
“에카르트. 그런데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뭡니까? 뭐든 말씀하십시오.”
그는 당장 마검을 소환하려는 듯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오직 원석을 얻는 게 목적이니까. 알겠죠?”
“물론 납득은 했습니다.”
“눈에 안 띄게 누굴 죽이는 것도 안 돼요.”
“…어쩔 수 없죠.”
그는 매우 아쉽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더니 주먹을 천천히 폈다.
나는 정신 의학 관련 종사자는 아니었으나… 이쯤 되니 에카르트가 정말 단순히 거슬린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지 궁금했다.
“에카르트. 왜 그러세요?”
“저놈들이 선을 넘질 않습니까.”
“그건 그런데요.”
나는 순간 납득했다가 이내 황급히 설교를 시작했다.
“물론 세상엔 쓰레기가 많죠. 저도 가끔은 짜증 나는 인간들을 모아서 어디 마수가 가득한 무인도로 가는 배에 태워 보내고 싶어요.”
“좋은 계획입니다. 배를 준비해 드리지요. 가다가 상어밥이 되지 않고 오래 고통받도록 적당한 해로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저, 정말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아무튼 고용인들도 그놈이 그놈인가요?”
“그놈들은 좀 낫죠.”
“그렇다면 좀 더 잘 대해 줘도 되겠죠? 간단한 것부터 해 보는 거예요. 죽이거나 심하게 괴롭히지 않기!”
“아하. 그럼 상을 주시는 겁니까?”
“언젠가는…요?”
내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리며 웃었다.
다음 날. 헬라가 오레이칼 왕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무리했을 때. 에카르트가 검토를 하고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주 형편없지는 않군.”
“감사합니다.”
헬라는 왠지 울컥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게 뿌듯하게 미소를 짓는 에카르트를 보며 그게 칭찬이었음을 깨달았다.
***
“공녀, 무운을 빕니다. 루솔릿 공작가를 비롯한 귀족들도 참석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문제가 생기거든 꼭 연락을 주세요.”
황태자는 사교계에 가까운 인맥이 없는 나를 걱정하는 듯했다.
평범하게 검문소 게이트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에카르트의 극성에 결국 다비온이 공작성 근처까지 재료를 가져와 워프 마법진을 준비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레이칼 왕국으로 미리 마중하러 와 있어. 조금이라도 기다리게 하면-.”
“에카르트!”
고마운 황태자를 상대로 명령도 모자라 협박을 하다니. 이름을 부르자 곧바로 의도를 알아들은 듯이 미소 짓는 그였다.
“며칠간 왕국에 더 머물다 올까요?”
“…아니에요. 지금 출발하죠.”
“네, 마차로 갑시다.”
짧은 거리인데도 에카르트는 굳이 내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려 했다. 다비온은 그런 그를 어서 떠나 주었으면 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마차에 타자마자 곧바로 이동 마법이 발동했다.
마차로 몇 분간 달리니 오레이칼 왕국 국경이자 예선 장소에 도착했다. 여기서 참가자는 곧바로 예선 결과를 확인한 후 입장할 수 있었다.
본선으로 진출하는 마법사를 선발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마력의 양을 충족하면 자동으로 본선 참가 자격이 된다. 참가자는 마력 양을 측정하는 마도구 위에 손을 올리고, 색이 1/2 이상 채워지면 자동 합격이다.
애초에 그 정도의 마력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보니 본선 진출자는 늘 50명 남짓이었다.
국경 입구는 마법 대회를 위해 출전한, 복식이 제각각인 마법사들로 즐비했다. 저들 중에는 허수가 많았다. 떨어지더라도 제대로 된 마도구로 마력 측정은 해 보는 게 목적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에카르트에게 말했다.
“줄이 기네요. 저 혼자 기다려도 되니까 저기 마차에 가든가, 먼저 호텔로 가세요.”
“괜찮습니다. 함께 있을게요.”
“음.”
혹시 그가 사람들을 치우겠다고 나설까 봐 나는 주의를 돌리기로 했다.
“그럼, 기다리는 동안 놀이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