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결국 마법사들은 별의 꽃의 효용에 대해 1년간 연구를 더 이어 갔다. 그러다 마침내 리타는 꽃잎 한 장으로 나머지 꽃잎은 물론 줄기와 뿌리를 대체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렇게 백 명의 마법사가 능력을 향상시켜 에카르트와 대적했다.
‘그래도 마검의 수호자에게는 날파리에 불과했지.’
그때야 폭주하는 에카르트를 경계했던 선택이 백번 옳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견제받고 있다.
에카르트는 여러모로 능력이 뛰어나도 황위를 탐할 사람은 아닌데. 황후와 가깝게 지내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에카르트. 궁금한 게 있는데 크로덴 가문은 원래 황실과 사이가 어땠나요?”
“황실이라….”
그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오른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알려 주기 곤란한 건지 물어보려 할 때 이윽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잠시 어디서부터 이야기할지 고민했습니다. 초대 공작이 작위를 받게 된 계기는 알고 계십니까?”
“조금 들어 본 것 같아요.”
“처음부터 설명드리죠. 크로덴 가문이 처음부터 공작 가문이었던 건 아닙니다.”
그의 설명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1대 가주 아르디 크로덴은 남작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강한 체력과 마력을 타고난 데다,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실도 그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아르디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에게 도전해 오는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뿐.
하여 누구보다 강한 그를 사람들은 악마의 환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간이 흐르며 마력과 능력이 약화됐습니다.”
그러자 다른 가문들이 담합해서 크로덴 가문을 몰락시키려고 했다.
당시 크로덴 가문은 레드 다이아몬드 광산을 갖고 있었는데 그 가치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원래부터 사교계와 담을 쌓고 지내던 아르디는 힘이 약해진 후 온갖 권모술수에 시달리게 되었다.
“갑자기 능력이 약화되다니. 다른 가문에서 흑마법이라도 쓴 게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선조들이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작가가 그 원인까지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아서였을까. 나는 다시 한번 피폐한 결말을 내기 위한 목적으로만 소설을 쓴 작가를 원망했다.
“크로덴 가문이 위기를 겪던 그때, 윈터로드 제국도 전례 없는 위기와 마주했죠.”
“북부에 균열이 생긴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 시기와 맞물려 북부에서 거대한 균열이 생겨 수만 마리의 마수가 쏟아졌다.
당시 황실은 수백 년간 전해 오던 성물로 마수를 제압하려고 했다. 바로, 신전에서 간직해 오던 마검이었다.
“지금의 에카르트가 갖고 있는 검이군요.”
“네. 황제는 마검을 각성시키는 자에게 황족만큼의 권한을 약속했습니다.”
하여 복권의 기회가 절실했던 아르디는 황실을 찾아갔다.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던 마검이 그에게 반응했다.
아르디는 마검의 힘을 이끌어 내 북부의 마수를 소탕하고 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얻었다. 그래서 황실에서는 그에게 공작 작위와 북부의 영토를 하사했다.
“북부가 영지로 쓸 만한 곳은 아닌데.”
“앞으로도 마수가 발생하거든 그쪽을 책임지라는 뜻이었죠.”
그렇게 몰락 위기를 넘기고 황족만큼 화려한 삶을 사는 대가로, 크로덴 공작들은 마검으로 북부를 지켜 왔다.
하지만 크로덴 가문은 마검과 계약하면 저주를 받는 걸 몰랐다.
이미 계약한 뒤라 어쩔 수 없기에 검에 대한 정보도 더 얻어 보려 했으나. 천사가 선물했지만 악마 같은 검이라는 고대의 기록이 다였다.
그렇게 저주를 풀어낼 도리가 없었기에 크로덴 가문은 수도에 공작성을 두고, 백마법사를 지원받으며 북부를 수호하게 되었다.
“…아무리 영웅이라고 불려도 선대 공작님들은 평생 고통에 시달렸던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후손에게 검을 물려주지 않는 방법은 없나요?”
“후계자가 될 자녀는 성년이 지나기 전에 마검과 계약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몇 대를 지나오며 알게 된 원리죠.”
“…그렇군요.”
나는 피폐물다운 설정에 한숨을 쉬었다.
에카르트 역시 선대 공작이 그랬듯이 제국의 수호자이자 황실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에게는 철혈의 공작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는 아까 다비온이 쥐었던 내 소매를 빳빳하게 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이 검의 주인인 이상.”
“주인인 이상?”
“시엘리나. 당신의 존재가 필요한 겁니다.”
에휴! 결국 기승전 백마법 집착이었다.
마차가 공작성에 도착해 갈 때쯤. 나는 다비온과 있었던 일을 전했다.
“황태자 전하는 당신을 돕고 싶어 해요.”
“그놈이요?”
“…네. 별의 꽃을 몰래 주려고 하셨는데 괜히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거절했어요. 대신, 꽃잎 한 장으로도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슬그머니 손수건을 빼내 꽃잎을 보여 주었다. 그는 꽃잎을 흘긋 보더니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검은색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졌다.
“잘했습니다. 역시 제 백마법사답군요.”
“가, 갑자기 왜 쓰다듬으세요?”
“당신도 저를 만지지 않았습니까. 칭찬의 의미였습니다.”
머리를 쓰다듬는데 가슴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 후 다시 꽃잎을 품에 넣고 당부했다.
“전하께서 저주를 치료하게 되더라도 보고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네. 그 사실을 숨기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저주의 고통은 에카르트가 다른 사람 앞에서 숨겨 왔고, 저주의 표식은 맨가슴을 확인해야만 보이고 말이다.
“…전하께서 그런 당부를 하신 이유는 안 물어보나요?”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합니다.”
이미 황실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는 건가.
“그런데 시엘리나. 그 자식이 다른 말은 안 했죠? 어디가 아프니 치료해 달라고 했다거나.”
“안 그러셨다니까요!”
좌우지간 한 번 대답한 거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안심이 안 됐는지 한 번 더 물어봤고, 내가 툴툴거리는 동안 어느덧 공작성에 다다랐다.
***
에카르트와 나는 연구실에서 별의 꽃을 펼쳐보았다.
평범한 꽃잎이면 이미 시들었겠지만 별의 꽃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싱싱함을 유지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연구에 매진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나머지 재료를 모아야 했다.
‘꽃잎 한 장을 얻었다고 해도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일단 마법에 필요한 재료를 모아야 해요. 이것 말고도 여러 왕국에서 나오는 원석이 필요한데, 대부분은 헬라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대부분?”
“네. 오레이칼 원석을 제외하고는요.”
오레이칼 원석은 일명 여신의 눈물이라고 알려진 희소한 보석으로 시간에 따라 색이 변했다.
지금으로선 미적 가치만 있을 뿐. 그 원석이 원작에서 별의 꽃의 부족한 부분을 대체할 재료란 게 밝혀진 건 리타 덕분이었다.
당연히 원작을 읽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달력을 확인했다. 원석은 오직 특정한 왕국에서, 특정한 기간에만 구할 수 있었다.
“에카르트. 마차 빌려 주시겠어요?”
“어디 가시려고요?”
“오레이칼 왕국요. 마법 대회에 참가해야겠어요.”
왕국은 매년 마법 대회를 개최했고 한 명의 우승자를 뽑았다. 상품은 오레이칼 원석으로 장식한 지팡이였다.
희소한 데다가 미적 가치가 있어 보석이나 장식품으로 효용이 있지만, 워낙 고가이고 소량의 유통마저도 오레이칼 왕국에서 관리를 하기에 쉽게 구할 수 없었다.
하여, 마법 대회의 상품에서 구하는 것만이 가장 쉽게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물론 지팡이를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라도 마법 대회는 검술 대회만큼 흔하지 않았기에 각지의 아니, 각국의 역량을 뽐내려는 마법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원작에서도 역시 블랑세가 참가했지만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다.
그녀는 본선에서 다른 참가자를 돕다가 충분한 점수를 받지 못하고 탈락했다. 소식을 들은 다비온은 블랑세를 위로하며 다른 좋은 지팡이를 선물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제가 어리석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아요.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대사를 주고받았던 것이 기억났다.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은 그런 선하고 이타적인 성격이 통했다.
손해 보는 성격을 바꿀 수 없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을 탓하던 블랑세였다. 그런데 질책하거나 이용하는 대신 용기 있다고 말해 주다니.
그 사건은 블랑세가 다비온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블랑세가 그 대회에 참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미 다른 지팡이가 있기도 하고 지금껏 우리는 원작의 사건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가 참가해야 해. 그 지팡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없지.’
원작의 우승자는 다름 아닌 시엘리나의 이복동생인 리타였다.
에카르트를 대적할 마법사들을 구할 때 이미 리타는 ‘마법 대회에서 승리한 마법사’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유명했으니 말이다.
대회에 참석하면 필히 그와 경쟁하게 되겠지. 그러한 원작의 내용을 떠올린 사이, 에카르트가 신중히 말했다.
“시엘리나. 알다시피 마법 대회는 직접적으로 전투해야 합니다. 그거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라면 있습니다만.”
에카르트가 수상하고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설마 우승자를 죽이고 상품을 갈취하는 방법은 아니겠죠?”
“죽인다뇨.”
“어휴, 그렇죠. 제가 너무 앞서 생각했어요.”
“네. 딱 반만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눈빛이 되었다.
“에카르트. 혹시 밤잠 안 설치나요?”
“제 잠자리를 걱정해 주신 겁니까? 당신이 곁에 있어 주면 더 좋은 꿈을 꿀 것 같습니다.”
그에게 기본적인 도덕성은 기대한 게 잘못이었기에 나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저는 승리할 거예요.”
성력과 마력 모두 뛰어난 데다가 백마법사니 말이다.
원작에서 리타가 우승했다는 건, 나머지 참가자는 그보다 마력이나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 게다가 나는 이미 이전에 리타를 이긴 적 있었다.
“사람을 상대로 전투한 경험은 적지 않습니까? 대부분 치유 마법을 사용하셨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마법도 틈나는 대로 연습해 두었으니. 대회 방식도 잘 알고 저는 강해요. 출전할 테니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당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니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의외로 순순히 보내 준다 싶었더니 그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저와 같이 가는 겁니다. 저는 당신이 위험해지면 바로 관중석에서 뛰어내려 나서지요.”
“공작님 휴가가 좀 기네요.”
“휴가는 이미 끝나서 한 번 더 황태자를 협박했습니다.”
네? 아니! 그래도 되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