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나는 다비온에게 이어서 말했다.
“꽃잎 한 장만 주세요.”
“한 장요?”
“네, 별의 꽃이 들어가는 마법들은 전부 꽃 한 송이가 재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화 시기도 상관없이 말이죠.”
그러니 꽃잎 한 장을 떼어 낸들 추후에 별의 꽃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꽃잎 한 장은 내게도 큰 도움이 된다.
별의 꽃 ‘한 송이’가 있다면 곧바로 새로운 치료를 시도하겠지만, ‘한 장’만 있어도 시간이 약간 걸릴 뿐 불가능하지 않았다.
‘원작에서 이 힘을 증폭시킬 방법이 나와 있으니까.’
이 시점에서 그 방법은 빙의자인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한 장이라.”
다비온이 얼마간 신중히 생각하더니 별의 꽃을 쥐었다가 놓았다.
“공녀가 원하는 꽃잎으로 고르십시오. 황태자로서 명령이니 이번에도 거절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환한 빛을 내는 꽃잎을 똑 떼어 냈다. 다비온이 내 손짓을 놓치지 않고 신중히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공녀.”
“네, 황태자 전하.”
‘이 꽃잎 한 장에 대가를 요구하기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심 그를 경계했다.
“만약 연구가 성공해서 에카르트의 저주가 풀리면 비밀로 해 주시겠습니까?”
“비밀로요?”
“네. 저뿐만 아니라…. 공녀와 에카르트를 위해서 말입니다.”
다비온의 요구는 뜻밖이었다.
내가 부탁하고 싶었는데 먼저 말할 줄이야. 황실 전부가 비협조적이지 않고, 그가 이렇게 남몰래 도와주어서 든든했다.
“그럼요. 애초에 책갈피나 꽃차로도 만들 수 있는 게 꽃잎인걸요. 물론 귀한 재료니 더욱 좋은 데에 활용하겠지만 말이에요.”
우리의 계획에 에카르트를 슬쩍 배제했다. 그러자 다비온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런. 에카르트가 왜 공녀에게 집착하는지 알겠습니다.”
“아, 그야 백마법 때문이지요.”
내가 말해서 무엇하냐며 한숨을 쉬었다.
“두 분이 정말 똑같으시군요.”
똑같다니!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에 나는 꽃잎을 쥐고 황태자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하하. 모쪼록 공녀가 떠나 있는 동안 에카르트는 제가 잘 지켜보죠.”
“잘 부탁드립니다?”
친구 사이에 쓰는 인사말로 무난했지만 솔직히 통제 안 되는 어린이를 유치원에 맡기는 기분으로 부탁했다.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꽃잎을 감싸고 품에 넣어서 챙겼다. 그 후 우리는 꽃으로 가득한 언덕에 잠시 어색하게 서 있었다.
“…….”
“…….”
볼일은 다 끝났는데 다비온이 말없이 나를 민망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가는 결계가 어디인지 감이 안 잡혔다. 결국 내가 먼저 물어보았다.
“그런데 전하. 여기서는 어떻게 나가나요?”
“아아, 지금 떠납시다. 들어왔을 때처럼 제게 옷깃을 빌려 주세요.”
내가 손을 내밀자 그가 조심스레 내 소매 끝을 쥐었다.
눈을 뜨니 넓은 책장이 보였다. 다시 서고로 돌아온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책을 꾹꾹 눌러 보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이런 이동 마법은 여전히 낯설었다.
“공녀님은 에카르트와 함께 오셨지요?”
“그렇습니다.”
다비온이 마법으로 작동하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로브를 눌러쓰고 다급히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보죠. 같이 나왔다가 에카르트에게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겠군요.”
“…설마요.”
“가끔 저를 진심으로 죽이려고 하거든요.”
원작에서 남주가 서브 남주에게 죽었기에, 그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착한 다비온이 별안간 무슨 상상을 하고 공포를 느꼈는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내가 에카르트에게 섬뜩함을 느꼈을 때의 증상과 똑같아서 동질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걱정 말라고. 저주를 풀면 당신도 살아남을 거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모쪼록 공녀님께서도 다시 뵐 날까지 무탈하시길.”
“황태자 전하께서도요. 감사합니다.”
다비온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나는 가볍게 예를 갖춰 그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별의 꽃에 대해 기록된 책을 한번 빠르게 읽어 보았다.
체력과 마력을 늘리는 마법, 중상을 입거나 의식을 잃은 사람이 회복하는 마법, 망가진 도시를 원래의 상태로 돌리는 마법 등등….
꽃잎 한 장을 활용하는 원작의 마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별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나만 알 테지.
***
한편 그 시각 루솔릿 공작 저는 폭렬 마법이 휩쓸고 지나가 정원이 쑥대밭이 되었다.
수련을 지켜보던 하녀 몇이 리타의 파괴적인 마법에 두려움을 느꼈다. 리타는 마법을 몇 번이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대체, 지팡이 없이 어떻게 마법을 쓴 거지?’
리타는 3년 전에 시엘리나가 공작성을 떠난 순간을 떠올렸다. 기사들 두 명을 단숨에 제압한 그녀는 당당해 보였다.
해충이 제 마법을 단숨에 복제한 거로도 모자라, 감히 가주가 될 자신을 업신여기다니!
‘공작성에 빌붙어 살던 해충 따위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밟아 줄 것이다.
그래야 하는데. 시엘리나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으나 자신은 성력도 마력도 부족했다.
분명 같은 공작 아비를 두었음에도 태생적인 한계를 깨달았다.
리타는 어떻게든 시엘리나를 꺾고 싶었다.
“리타!”
그때 예쁜 드레스 차림의 라멜이 다가와서 시원한 물을 건넸다.
“집사가 오레이칼 왕국의 마법 대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는데.”
“네. 정말 누님도 따라오실 겁니까?”
“그럼. 내 동생이 가는데 당연하지. 다치지 않게 꼭 조심해.”
리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곧 인근의 오레이칼 왕국에서 대회가 열린다. 그 대회에 참석해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다면, 모두가 자신의 실력을 알아볼 것이다.
자신 역시 시엘리나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
서고를 나오자마자 뭔가와 부딪칠 뻔했다. 에카르트가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나는 슬쩍 그의 옆으로 비켜 나왔다.
“에카르트, 일단 가요.”
“알겠습니다.”
그의 살벌한 포스에 서고를 지키던 병사들이 움찔했다.
병사들에게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걸어오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시엘리나. 그 자식을 만났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어봤더니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황태자 전하 말이지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당신이 제 백마법사라서 부럽다고 했는데….”
그는 나를 따라 걸어오다 멈추고 뭔가 깨달은 듯 짧게 “아.”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불사조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이 되었다.
“혹시 그 자식이 시엘리나에게 뭔가 곤란한 요구를 했습니까?”
“네? 앞서 나가지 말아요.”
“황실 마법사가 되어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헛소리를 지껄이거나, 전담 마법사가 되어 달라고 했다면 이번에야말로 죽일 겁니다.”
“그런 말씀 안 하셨으니까 진정해요!”
내가 팔을 뻗어 에카르트의 머리를 열심히 쓰다듬자 그의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전에 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내가 기댔던 게 좋았다고 하고, 마력을 담지 않았는데도 손길에 기분이 풀린 것을 보니….
이젠 몸만 닿아도 기분이 나아지는 효과가 생긴 건가 싶었지만, 뭐 아무렴 어떠하랴. 맹수가 잠잠해지기만 하면 되지 싶어진 나였다.
“진정하겠습니다. 책은 찾으셨습니까?”
“네, 그럭저럭 도움이 되었어요.”
다비온 덕분에 꽃잎을 구했다만 그 이야기는 공작성에 가서 할 것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 누군가의 귀에 들어갈지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단장님은 어디 가셨나요? 감사 인사는 전하고 가려고 했는데요.”
“볼일이 있다며 먼저 가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도 공작성으로 돌아가요.”
에카르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보폭을 맞추는데 대뜸 낮은 음성이 들렸다.
“손.”
“네?”
“손잡아 주셔야죠. 왔을 때처럼.”
잡아 달라고 해 놓고 그가 먼저 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오다가 심기 불편하게 중얼거렸다.
“혹시 그놈이 당신에게 허튼짓했습니까?”
“그놈이라니. 황태자 전하요?”
“네. 오른쪽 옷소매가 구겨져 있습니다. 들어가셨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요.”
예리하긴! 나는 그가 조시처럼 황태자의 팔도 꺾을까 봐 얼버무렸다.
“하하, 전하께서 설마 허튼짓을 하셨겠어요.”
“그야 모르는 법이지요. 그놈을 편드시는 건가요?”
“정말, 무슨 말을 못 하겠군요. 일단 가기나 해요.”
내 마력에 꿀이 발라진 것도 아닌데 집착할 일인가. 백마법 의처증에 시달리느라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에카르트는 성전에서 나와 마차에 탄 후 로브를 벗고 다시 늠름한 성인의 모습이 되었다. 어려서 약간이나마 편히 대할 수 있던 모습이 사라지니 뭔가 아쉬워졌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어렸을 땐 에카르트도 귀여웠구나 싶어서요.”
“지금은요.”
그는 카리스마 넘치고 품격 있다는 말에 익숙했다. 심지어 아무리 귀여운 생명체일지라도 심기에 거슬리면 썩 치울 것 같은 냉혹한 이미지였다.
“시엘리나. 지금은요?”
에카르트가 못마땅하게 제 손깍지를 끼더니 맹금류처럼 나를 응시했다. 졸지에 사냥당하는 참새의 기분을 느낀 나는 간신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지금도 귀여우세요?”
설마 이런 대답을 원하나 싶어서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자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깍지를 풀고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 네.”
덩치는 산만 한 사람이 왜 귀엽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원! 좌우지간 알다가도 모르겠다.
마차가 달려 공작성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황태자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황실 세력이 에카르트를 견제한다는 짐작은 더 확실해졌다.
‘어쩐지. 원작에서 에카르트가 흑막이 되었을 때, 황후가 일사천리로 계획을 진행했지.’
<황후는 리타를 포함한 유수의 마법사 백 명을 연구실 한데에 모았다.
“지금부터 크로덴 공작은 제국의 반역자로 간주한다. 필요한 재료는 무엇이든 지원하지. 그를 제거할 방법을 알아내는 자에게 큰 포상을 하겠다.”
황후가 각종 희귀한 마법 재료를 펼쳐 보이자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원작에서는 그때 에카르트를 저지하거나 힘을 봉인하는 대신 분명 곧바로 제거하라고 말했다.
‘정황상 줄곧 벼르다 흑화한 참에 완전히 없애려던 게 분명해.’
당시 수백 명의 마법사는 연구실에 모여 해결 방법을 모색했지만 아무리 전력을 끌어모아도 에카르트를 대적하기 역부족했다.
마법사들은 고심 끝에 그와 맞설 사람들을 선별해 능력을 키워 주려고 했다.
능력 향상에 필요한 마법 재료는 별의 꽃. 하지만 한 송이뿐이었기에 오직 한 명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적자 단 한 명에게 능력을 몰아주고 승리하길 기대하는 건 너무 무모했다.